건강한 여성주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우먼카인드》
vol. 17 : 실패의 의미를 나누다
이번 《우먼카인드》는 ‘실패’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지 성공의 반대말인 실패가 아니다. 그 실패의 의미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삶의 가치를 찾고 목표를 향해가는 중에 의도치 않게 관계를, 일을, 자기 자신을 그르쳤을 때 찾아드는 상실감과 패배감 속에 머물렀던 경험에 좀 더 가깝다. 그 실패가 과거의 경험이든 현재진행의 고통이든, 혹은 망연자실하게 받아들여야 할 다가올 무엇이든,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떤 형태의 실패든 그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이들의 생각이 지금 시련의 시간 속에 놓인 이들에게 작은 용기를 불어넣으리라는 바람으로.
“잃은 것이 아닌, 얻은 것에 충실한 삶”
: 신유진, 박혜윤, 정혜윤, 정희진 에세이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번역하고, 소설과 에세이를 쓰는 신유진은 어느 추운 겨울 유럽 도시를 여행하던 중 ‘무언가’를 잃었던 경험을 들려준다. 그가 낯선 도시의 의사로부터 들은 “당신은 잃었습니다”라는 말. 목적어가 비어 있는 그 문장으로부터 그는 그간 자신의 삶에서 때때로 빈칸으로 존재했던 오래된 존재를 떠올린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무엇보다 닮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떨쳐내고 싶었던 ‘엄마’라는 존재를 들여다보며, 그는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하면서 각자의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모녀 관계를 그려간다.(〈잃어본 적 있는 사람의 언어〉, p.16)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쓴 박혜윤은 7년 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시골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그는 〈적당히 살아남다〉(p.22)라는 글에서 ‘숲속의 유기농 농장’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동분서주했지만, 계획을 실천하는 중에 맞닥뜨린 예상 밖의 결과 앞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이야기한다. 잘 살고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그저 ‘살아남아 있다’는 것의 의미와 무게, 그리고 남들이 뭐라 하든 ‘모두가 비슷한 모습의 승리자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에 대해서.
라디오피디 정혜윤은 ‘믿을 수 없이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지만 청취율이 0퍼센트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했던 경험을 들려준다. 숫자로 증명되는 명백한 실패 앞에서도 잠시 ‘마술적 공상’을 통해 어지러운 생각을 가다듬는다. 속상함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자기 자신을 다독일지,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다시 무엇을 시도해야 할지 말이다.(〈속상한 밤마다 우리가 하는 일〉, p.44)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인생의 가치를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두었으나 어떻게 그 관계에 실패했는지를 말한다. 마치 실패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이제 막 빠져나와 그 일련의 상황을 들려주듯 그의 체험담은 잔인하리만치 생생하다. “자신의 삶에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신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와 동시에 자기 존중. 이 두 가지 긴장을 견디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실패에 가장 가까운 의미다.” 실패에 대한 개인 서사를 넘어 실패의 개념을 곱씹는 그의 사유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삶 또한 되돌아보게 된다.(〈루저 필링의 여왕〉, p.44)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이야기 중심에 가져오고 싶었어요”
자신의 생각을 다시 뒤집으며 나아가는 글쓰기
: 소설가 김초엽 인터뷰
소설가 김초엽은 2019년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시작으로, 올여름 첫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올가을 소설집 두 편 《방금 떠나온 세계》 《행성어 서점》을 발표했다. 그리고 올해가 끝나기 전에 중편소설 〈므레모사〉를 출간할 예정이다. 김초엽은 무엇보다 존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작가다. SF 세계를 통해 “여성, 장애인, 이주민, 혹은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을 부지런히 그려내고 있는 그를 최지은 작가가 만났다.(〈지금의 세계를 바꿔나가는 마음: 소설가 김초엽〉, p.28)
김초엽은 ‘이해의 실패’를 다루는 이야기를 많이 쓴다. 어찌 보면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늘 불완전한 이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다고 완전한 이해에 이를 수 있을까. 김초엽은 그 ‘불완전한 이해’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존재를 통해 펼쳐내고 있다. “실패하든 성공의 여지를 만들든,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이야기 중심에 가져오고 싶었어요.” 김초엽 작가의 답변은 막힘이 없고, 씩씩하다.
최지은 작가가 그에게 “궁극적인 야심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할머니 작가가 되기까지 잊히지 않는 거예요. 일단 작가가 그렇게 나이 들어서까지 명료한 정신을 가지고 시대의 흐름에 너무 뒤처지지 않는 게 힘든 일 같아요. 작가는 자기 고집만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내가 시대에 뒤처지면 내가 쓰는 글들이 다 뒤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공부하고 잘 따라가며 살아야겠죠.” 김초엽 소설가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야기를 통해 계속해서 존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we are womankind: Mexico
프리다 칼로, 그리고 멕시코 땅을 지켜내는 여성들
《우먼카인드》 17호가 찾아가는 나라는 멕시코다. 화가 프리다 칼로를 통해 멕시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소위 성공한 화가였지만 그가 ‘비극의 완벽한 주인공’이라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육체의 고통과 이혼과 재결합으로 점철된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 등 이미 우리는 그의 역사를 제법 알고 있다. 사회학자 루스 퀴벨은 프리다 칼로의 굴곡진 삶에 비해 다소 가려졌던 그의 놀라운 예술적 성취를 재조명한다. 〈그림 바깥의 프리다 칼로〉(p.60)는 고독과 권태에서 벗어날 방법을 그림을 그리면서 찾아낸 강인한 예술가 칼로의 눈빛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주자네 비솝스키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현재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패션디자이너다. 그는 오스트리아 현대미술관 쿤스트할레 빈에서 프리다 칼로에게 헌정하는 전시를 열기도 했는데, 이번 호에 그 작품이 실렸다. 비솝스키의 작품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여 되살아나는 프리다 칼로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오마주: 패션디자이너 주자네 비솝스키〉, p.70)
멕시코시티에서 약 500킬로미터 떨어진 원주민 마을 체란의 여성들이 불법 벌목꾼을 잡은 이야기도 흥미롭다.(〈벌목꾼을 잡은 여성들〉, p.126) 체란 마을의 여성들은 그들의 자생림을 약탈한 벌목꾼들을 오로지 그들만의 힘으로 잡았고,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과 결단으로 체란은 멕시코에서 “천연자원을 둘러싼 갈등의 결과로 자치권을 부여받은 최초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 밖에 멕시코의 저항적 정치 결사 단체인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사파타주의자) 내 여성 혁명가들의 활동 또한 살펴본다.(〈사파타주의자의 여성혁명법〉, p.132)
본문에서
어쩌면 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의 기회를 잃고, 작은 물음들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잃은 것에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때 그 물음들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었고, 지금 또 다른 사랑의 기회를 찾는 일에 쓰이고 있다면, 고마운 관심에 대한 정중한 거절이 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잃은 것이 아닌, 얻은 것에 충실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며 내 모든 실패의 의미를 증명하고 싶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그것이 나만의 길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 〈잃어본 적 있는 사람의 언어〉 신유진_ p.21
질문은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느냐?’여야 하고, 이 질문을 할 정도면 분명히 살아 있는 거니까 괜찮은 것이다. 게다가 살아남는 것조차 온전히 나의 능력이나 노력에 달린 것도 아니다. 운 좋게 살아남았으니 기뻐해야 할 일이다. 나머지는 그 행운을 그저 누리면 된다. 남들이 실패라고 부르든 성공이라고 부르든 내게 중요한 건 인생이 폭삭 망가지지는 않아서, 오늘을 살고 내일도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모두가 비슷한 모습의 승리자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 〈적당히 살아남다〉 박혜윤_ p.27
“쓰다 보니 결국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 어떤 영역에서 일하는 사회 활동가가 있을 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엄청난 확신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한다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들 확신보다는 의심에 가까운 태도로, 자신이 믿고 있거나 밀고 나가는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굉장히 불안해하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주도하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거죠. 그런 내면에 대해 생각하니까, 모든 거대한 변화의 이면에는 불안정한 개인의 마음, 그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나은 미래를 꿈꾸는 마음들이 있다는 걸 그려내고 싶었어요.”
○ 〈지금의 세계를 바꿔나가는 마음: 소설가 김초엽〉 최지은_ p.33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엔 잘해내고 싶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잘 버티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실패 중 하나는 나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결코 알지 못한 채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다 사는 것이므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시도해야 한다. 시도했으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나갈 때까지. 나는 모든 실패를 뚫고 변화를 만드는 사람을 지지하고 나 또한 그런 이야기의 일부분이고 싶다.
○ 〈속상한 밤마다 우리가 하는 일〉 정혜윤_ p.49
결국 실패는 자기 스스로의 서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 이야기는 객관적 서술이 힘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피하기도 어렵고,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 실패에 대한 자기평가도 쉽지 않다. 다만 실패 개념의 최소공약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에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신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와 동시에 자기 존중. 이 두 가지 긴장을 견디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실패에 가장 가까운 의미다. 그러나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 〈루저 필링의 여왕〉 정희진_ p.57
무엇이 그의 작품을 위험하게 만들까? “이상적인 여성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몸의 내부와 고통, 고립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탁월했다. (중략) 칼로는 자신의 삶에 얽힌 불안한 진실을 추출하고 묘사할 감성적인 방법을 그림에서 찾았다. 그 표현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감동을 준다. 상실과 절망을 넘치도록 경험했지만 그런 역경 속에서도 반항, 수용, 인내로 자기만의 독특한 예술을 창조했다.
○ 〈그림 바깥의 프리다 칼로〉 루스 퀴벨_ p.68
사회의 메시지가 “사회가 당신이 성공했다고 말할 때 당신은 가치가 있다”에서 “사회가 실패했다고 말하더라도 어렵고 가치 있는 일에 전념한다면 당신은 가치가 있다”로 바뀌었다고 상상해보자. 성공에 대한 열망 대신 실패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어렵고 두려운 모든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맡을 수 있게 된다.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면,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 〈노력의 가치를 무엇으로 결정할 것인가〉 마리아나 알레산드리_ p.82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할 때,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 다른 사람과 주변 세상을 소중히 여기는 것 사이에 서로 역동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 모두를 위해 동시에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생존과 번영의 열쇠다. 외부로 향하지 않은 채, 융합적 관점 없이,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독이 된다. 생존에 매우 필수적인 관계망을 오염시킨다. 더 깊은 수준에서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핵심인 사랑, 관대함, 의미 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 〈우리의 관점을 넓힌다면〉 제니퍼 쿤스트_ p.88
엮은이 우먼카인드 편집부
《우먼카인드》는 여성의 언어로 말하고 여성의 눈으로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는 문화 잡지다. 여성의 자아, 정체성 그리고 동시대 세계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문학,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논의되는 생각들을 다양한 조합으로 선보인다. 그런 토대 위에서 더 나은 삶, 충만한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방법을 모색한다. 광고가 없는 잡지로 광고 없는 자리는 삶의 지침이 되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잠언과 일러스트 작품이 대신한다. 2014년 호주에서 창간된 계간지로, 현재 27개국 독자들이 만나고 있다.
옮긴이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 권은정, 김지혜, 김효정, 유혜인, 이미영.
건강한 여성주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우먼카인드》
vol. 17 : 실패의 의미를 나누다
이번 《우먼카인드》는 ‘실패’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지 성공의 반대말인 실패가 아니다. 그 실패의 의미는 자기만의 기준으로 삶의 가치를 찾고 목표를 향해가는 중에 의도치 않게 관계를, 일을, 자기 자신을 그르쳤을 때 찾아드는 상실감과 패배감 속에 머물렀던 경험에 좀 더 가깝다. 그 실패가 과거의 경험이든 현재진행의 고통이든, 혹은 망연자실하게 받아들여야 할 다가올 무엇이든,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떤 형태의 실패든 그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이들의 생각이 지금 시련의 시간 속에 놓인 이들에게 작은 용기를 불어넣으리라는 바람으로.
“잃은 것이 아닌, 얻은 것에 충실한 삶”
: 신유진, 박혜윤, 정혜윤, 정희진 에세이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번역하고, 소설과 에세이를 쓰는 신유진은 어느 추운 겨울 유럽 도시를 여행하던 중 ‘무언가’를 잃었던 경험을 들려준다. 그가 낯선 도시의 의사로부터 들은 “당신은 잃었습니다”라는 말. 목적어가 비어 있는 그 문장으로부터 그는 그간 자신의 삶에서 때때로 빈칸으로 존재했던 오래된 존재를 떠올린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무엇보다 닮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떨쳐내고 싶었던 ‘엄마’라는 존재를 들여다보며, 그는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하면서 각자의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모녀 관계를 그려간다.(〈잃어본 적 있는 사람의 언어〉, p.16)
《숲속의 자본주의자》를 쓴 박혜윤은 7년 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 시골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그는 〈적당히 살아남다〉(p.22)라는 글에서 ‘숲속의 유기농 농장’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동분서주했지만, 계획을 실천하는 중에 맞닥뜨린 예상 밖의 결과 앞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이야기한다. 잘 살고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그저 ‘살아남아 있다’는 것의 의미와 무게, 그리고 남들이 뭐라 하든 ‘모두가 비슷한 모습의 승리자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에 대해서.
라디오피디 정혜윤은 ‘믿을 수 없이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지만 청취율이 0퍼센트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했던 경험을 들려준다. 숫자로 증명되는 명백한 실패 앞에서도 잠시 ‘마술적 공상’을 통해 어지러운 생각을 가다듬는다. 속상함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자기 자신을 다독일지,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다시 무엇을 시도해야 할지 말이다.(〈속상한 밤마다 우리가 하는 일〉, p.44)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인생의 가치를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두었으나 어떻게 그 관계에 실패했는지를 말한다. 마치 실패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이제 막 빠져나와 그 일련의 상황을 들려주듯 그의 체험담은 잔인하리만치 생생하다. “자신의 삶에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신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와 동시에 자기 존중. 이 두 가지 긴장을 견디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실패에 가장 가까운 의미다.” 실패에 대한 개인 서사를 넘어 실패의 개념을 곱씹는 그의 사유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삶 또한 되돌아보게 된다.(〈루저 필링의 여왕〉, p.44)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이야기 중심에 가져오고 싶었어요”
자신의 생각을 다시 뒤집으며 나아가는 글쓰기
: 소설가 김초엽 인터뷰
소설가 김초엽은 2019년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시작으로, 올여름 첫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올가을 소설집 두 편 《방금 떠나온 세계》 《행성어 서점》을 발표했다. 그리고 올해가 끝나기 전에 중편소설 〈므레모사〉를 출간할 예정이다. 김초엽은 무엇보다 존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작가다. SF 세계를 통해 “여성, 장애인, 이주민, 혹은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을 부지런히 그려내고 있는 그를 최지은 작가가 만났다.(〈지금의 세계를 바꿔나가는 마음: 소설가 김초엽〉, p.28)
김초엽은 ‘이해의 실패’를 다루는 이야기를 많이 쓴다. 어찌 보면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늘 불완전한 이해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다고 완전한 이해에 이를 수 있을까. 김초엽은 그 ‘불완전한 이해’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존재를 통해 펼쳐내고 있다. “실패하든 성공의 여지를 만들든,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이야기 중심에 가져오고 싶었어요.” 김초엽 작가의 답변은 막힘이 없고, 씩씩하다.
최지은 작가가 그에게 “궁극적인 야심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할머니 작가가 되기까지 잊히지 않는 거예요. 일단 작가가 그렇게 나이 들어서까지 명료한 정신을 가지고 시대의 흐름에 너무 뒤처지지 않는 게 힘든 일 같아요. 작가는 자기 고집만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내가 시대에 뒤처지면 내가 쓰는 글들이 다 뒤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공부하고 잘 따라가며 살아야겠죠.” 김초엽 소설가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야기를 통해 계속해서 존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we are womankind: Mexico
프리다 칼로, 그리고 멕시코 땅을 지켜내는 여성들
《우먼카인드》 17호가 찾아가는 나라는 멕시코다. 화가 프리다 칼로를 통해 멕시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소위 성공한 화가였지만 그가 ‘비극의 완벽한 주인공’이라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육체의 고통과 이혼과 재결합으로 점철된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 등 이미 우리는 그의 역사를 제법 알고 있다. 사회학자 루스 퀴벨은 프리다 칼로의 굴곡진 삶에 비해 다소 가려졌던 그의 놀라운 예술적 성취를 재조명한다. 〈그림 바깥의 프리다 칼로〉(p.60)는 고독과 권태에서 벗어날 방법을 그림을 그리면서 찾아낸 강인한 예술가 칼로의 눈빛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주자네 비솝스키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현재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패션디자이너다. 그는 오스트리아 현대미술관 쿤스트할레 빈에서 프리다 칼로에게 헌정하는 전시를 열기도 했는데, 이번 호에 그 작품이 실렸다. 비솝스키의 작품을 통해 시간을 초월하여 되살아나는 프리다 칼로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오마주: 패션디자이너 주자네 비솝스키〉, p.70)
멕시코시티에서 약 500킬로미터 떨어진 원주민 마을 체란의 여성들이 불법 벌목꾼을 잡은 이야기도 흥미롭다.(〈벌목꾼을 잡은 여성들〉, p.126) 체란 마을의 여성들은 그들의 자생림을 약탈한 벌목꾼들을 오로지 그들만의 힘으로 잡았고,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과 결단으로 체란은 멕시코에서 “천연자원을 둘러싼 갈등의 결과로 자치권을 부여받은 최초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 밖에 멕시코의 저항적 정치 결사 단체인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사파타주의자) 내 여성 혁명가들의 활동 또한 살펴본다.(〈사파타주의자의 여성혁명법〉, p.132)
본문에서
어쩌면 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의 기회를 잃고, 작은 물음들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잃은 것에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때 그 물음들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었고, 지금 또 다른 사랑의 기회를 찾는 일에 쓰이고 있다면, 고마운 관심에 대한 정중한 거절이 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잃은 것이 아닌, 얻은 것에 충실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며 내 모든 실패의 의미를 증명하고 싶다.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그것이 나만의 길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 〈잃어본 적 있는 사람의 언어〉 신유진_ p.21
질문은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느냐?’여야 하고, 이 질문을 할 정도면 분명히 살아 있는 거니까 괜찮은 것이다. 게다가 살아남는 것조차 온전히 나의 능력이나 노력에 달린 것도 아니다. 운 좋게 살아남았으니 기뻐해야 할 일이다. 나머지는 그 행운을 그저 누리면 된다. 남들이 실패라고 부르든 성공이라고 부르든 내게 중요한 건 인생이 폭삭 망가지지는 않아서, 오늘을 살고 내일도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모두가 비슷한 모습의 승리자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 〈적당히 살아남다〉 박혜윤_ p.27
“쓰다 보니 결국 세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예를 들어 어떤 영역에서 일하는 사회 활동가가 있을 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엄청난 확신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한다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들 확신보다는 의심에 가까운 태도로, 자신이 믿고 있거나 밀고 나가는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굉장히 불안해하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주도하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거죠. 그런 내면에 대해 생각하니까, 모든 거대한 변화의 이면에는 불안정한 개인의 마음, 그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나은 미래를 꿈꾸는 마음들이 있다는 걸 그려내고 싶었어요.”
○ 〈지금의 세계를 바꿔나가는 마음: 소설가 김초엽〉 최지은_ p.33
이번엔 실패했지만 다음엔 잘해내고 싶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잘 버티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실패 중 하나는 나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결코 알지 못한 채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다 사는 것이므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시도해야 한다. 시도했으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나갈 때까지. 나는 모든 실패를 뚫고 변화를 만드는 사람을 지지하고 나 또한 그런 이야기의 일부분이고 싶다.
○ 〈속상한 밤마다 우리가 하는 일〉 정혜윤_ p.49
결국 실패는 자기 스스로의 서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실패 이야기는 객관적 서술이 힘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피하기도 어렵고,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 실패에 대한 자기평가도 쉽지 않다. 다만 실패 개념의 최소공약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에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신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와 동시에 자기 존중. 이 두 가지 긴장을 견디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실패에 가장 가까운 의미다. 그러나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 〈루저 필링의 여왕〉 정희진_ p.57
무엇이 그의 작품을 위험하게 만들까? “이상적인 여성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몸의 내부와 고통, 고립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가 탁월했다. (중략) 칼로는 자신의 삶에 얽힌 불안한 진실을 추출하고 묘사할 감성적인 방법을 그림에서 찾았다. 그 표현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감동을 준다. 상실과 절망을 넘치도록 경험했지만 그런 역경 속에서도 반항, 수용, 인내로 자기만의 독특한 예술을 창조했다.
○ 〈그림 바깥의 프리다 칼로〉 루스 퀴벨_ p.68
사회의 메시지가 “사회가 당신이 성공했다고 말할 때 당신은 가치가 있다”에서 “사회가 실패했다고 말하더라도 어렵고 가치 있는 일에 전념한다면 당신은 가치가 있다”로 바뀌었다고 상상해보자. 성공에 대한 열망 대신 실패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어렵고 두려운 모든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맡을 수 있게 된다.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면,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 〈노력의 가치를 무엇으로 결정할 것인가〉 마리아나 알레산드리_ p.82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생각할 때,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 다른 사람과 주변 세상을 소중히 여기는 것 사이에 서로 역동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 모두를 위해 동시에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생존과 번영의 열쇠다. 외부로 향하지 않은 채, 융합적 관점 없이,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독이 된다. 생존에 매우 필수적인 관계망을 오염시킨다. 더 깊은 수준에서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의 핵심인 사랑, 관대함, 의미 형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 〈우리의 관점을 넓힌다면〉 제니퍼 쿤스트_ p.88
엮은이 우먼카인드 편집부
《우먼카인드》는 여성의 언어로 말하고 여성의 눈으로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는 문화 잡지다. 여성의 자아, 정체성 그리고 동시대 세계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문학,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논의되는 생각들을 다양한 조합으로 선보인다. 그런 토대 위에서 더 나은 삶, 충만한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방법을 모색한다. 광고가 없는 잡지로 광고 없는 자리는 삶의 지침이 되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잠언과 일러스트 작품이 대신한다. 2014년 호주에서 창간된 계간지로, 현재 27개국 독자들이 만나고 있다.
옮긴이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 권은정, 김지혜, 김효정, 유혜인, 이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