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여성주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우먼카인드》
vol. 14 : 혼자 있는 시간
자발적 고독과 강제적 고립 사이를 지나오며
코로나블루는 작년 한 해를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내향적이고, 고독을 즐기고, 자기 돌봄에 능한 사람도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고 지속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다루기 힘든 감정들과 마주하게 된다. 언택트가 새로운 일상이 되면서 자신의 몸과 감정을 잘 추스르는 일의 중요함을 깨닫는 동시에, ‘혼자 있는 시간’이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을 향해 열려 있는 웅크림의 시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우먼카인드》는 비대면 일상이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일깨우는 ‘함께’라는 감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렸다.
김소연 시인이 최근에 발표한 여행 산문집 제목은 ‘그 좋았던 시간에’이다. 시인이 여행한 이국의 풍경과 이야기를 보고 듣다 보면 책 제목이 마치 과거의 서랍 속으로 들어가버린 우리의 일상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련해지기도 한다. 최지은 작가가 만난 김소연 시인은 작년 한 해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이 아닌 집에서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와 함께 일 년을 보내며 마음의 치유를 얻고, 생활인으로서 하루하루를 잘 돌보는 일에 집중한 시인으로부터 생활을 잘 경영하는 것이 마음의 에너지를 돌보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시인의 생활 경영: 시인 김소연〉, p.34)
이주혜 소설가는 고독이 보장될 때 비로소 찾아오는 문장,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태어난 문장이 찾아나서는 연결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선사시대 동굴 벽에 손도장을 찍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단한 하루 살림을 마치고 윗목에 작은 상을 펴놓고 불경을 필사했던 할머니와 저녁마다 꼼꼼하게 가계부를 쓰며 숫자 옆에 무언가를 끼적였던 어머니의 웅크린 어깨를 떠올린다. 그로부터 끝내 고독을 갈구함에도 결코 고립되지 않겠다는 의지로서의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본다. 마치 잠수에 가까우리만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고독이 필요한 글쓰기, 그러나 그 고독 속에서 태어난 글쓰기는 타인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행위라고, 그것이 타인의 얼굴을 건져내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팬데믹 시대에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의 마음이 그의 글 속에 담겨 있다.(〈내 손이 당신의 얼굴을 건져내길〉, p.26)
한국 여성의 자살률은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2, 30대 젊은 여성들이다. 팬데믹은 증폭제일 뿐 주된 원인은 아니다. 하미나 작가는 “한국은 30분에 한 명씩 자살하는 국가이지만 자살에 관한 논의 자체는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작년부터 2, 30대 여성 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이들을 만나 취재하고 기록하면서 우리 사회가 보지 않고 지나치는 고통의 이면을 질문한다. 그의 물음이 우리가 마주하길 꺼리는 사회의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죽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p.56)
기후변화, 펜데믹,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회복력
정신분석학자 아누치카 그로스는 환경염려(eco-anxiety)가 2, 30대에게 끼치는 영향을 분석해왔고, 《환경염려 가이드(A Guide to Eco-anxiety)》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환경염려가 영국의 출산파업 운동과 멸종저항 운동, 미국의 상상가능한 미래 운동 등과 연결되는 꽤 복잡한 논쟁이라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기후변화에 직면해 느끼는 두려움과 슬픔, 죄책감과 질투심 등 다루기 힘든 감정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에 대한 견해를 들려준다. 그로스는 정신분석적 관점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행동주의를 고민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회복력을 더 좋은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는지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기후변화와 다루기 힘든 감정들〉, p.92)
아마존 열대우림은 ‘지구의 숨통’이다. 이를 위한 대체재는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2035년이 되면 아마존을 포함한 열대우림이 역으로 탄소 흡수원이 아닌 배출원이 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과학저술가 제사 갬블은 아마존 열대우림의 황폐화 원인을 되짚고, 현재 팬데믹으로 생태 복원 운동이 더욱 열악해진 상황에서도 힘쓰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한다.(〈지구의 숨통〉, p.100)
사회학자 티파니 젠킨스는 팬데믹 이후 축소된 공공의 영역, 그리고 이와 더불어 발언의 자유가 사라진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위기가 초래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캔슬 컬처(어떤 인물이 문제적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SNS에서 보이콧하는 문화), 둠스크롤링(인터넷으로 부정적 정보를 계속 소비하는 행위) 등 랜선을 통해 교류한다고 해도 실제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력을 상실하고, 음모론이 횡행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공공 생활의 출구가 사라졌다〉, p.68)
we are womankind: Peru
케추아족 여성들의 손은 거의 멈추는 일이 없다
《우먼카인드》 14호가 찾아가는 나라는 페루다. 1400년대에 최전성기를 누린 잉카제국의 유산은 전통 직물, 마추픽추 성채, 그리고 고대 언어 케추아어를 통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페루의 원주민 케추아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통 직물과 함께한다. 케추아족은 자신들의 삶 이야기, 조상의 이야기를 직물에 담아 후손이 이를 기억할 수 있게 돕는다. 케추아족 여성들이 쉬지 않고 한 가닥씩 모양을 이뤄가며 직물에 담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수 세기를 이어온 그들의 정체성이다.(〈기억이 직물에 새겨지는 방식〉, p.132)
아나 테레사 바르보자는 페루의 섬유예술가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발견한 가족사진, 어릴 적 물건인 인형, 옷, 신발 등을 그림으로 그리고, 이를 바느질로 이어 붙여 작품을 완성하면서 섬유예술 세계로 들어섰다. 어릴 때 스웨터를 뜨고, 식탁보를 수놓고, 옷을 기웠던 할머니의 창조적 노동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광활한 자연 풍경을 손수 실을 잇고 이어 완성한 바르보자의 놀라운 직물 공예 작품 속에서 일상의 지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손으로 실을 잇고 이어〉, p.48)
이 밖에도 페루 정부의 에너지 개발이 토착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페루 정부의 댐 건설을 막아낸 환경운동가 루스 부엔디아를 만난다. 그는 이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환경 분야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골드먼 환경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거대한 댐을 멈춘 사람〉, p.146)
본문에서
우리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러면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자기만의 북극성을 따라가는 법, 타인의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지 크게 걱정하지 않으면서 평생 자기계발 과정에 투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 물건을 팔려는 온갖 화려한 광고가 넘쳐나지만 삶은 경쟁이 아니다.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삶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는 삶이다.
○ 〈자기만의 북극성을 따라가는 법〉 제니퍼 쿤스트_ p.24-25
만 년 전 그 사람은 동굴 벽에 선명하게 찍은 손 모양을 문자 삼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여기 내가 있어. 이건 내 손이 하는 일이야. 나를 기억해주겠니?' 존재증명 혹은 조난신호. 만 년 후 나도 비슷한 행위를 한다. 하얀 종이에 뭔가를 끼적이고 키보드를 두드려 활자를 찍는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도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뭔가를 기록한다. 그것은 내 다짐일 때도 있고 비루한 마음의 고백일 때도 있다. 너의 이름일 때도 있고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당신의 얼굴일 때도 있다.
○ 〈내 손이 당신의 얼굴을 건져내길〉 이주혜_ p.31
“육체의 상태가 나이에 따라 좀 다르잖아요. 마음의 에너지도 그래요. 무엇보다 생활인으로서 하루를 잘 돌볼 때 마음의 회복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그걸 20대에는 몰랐고, 40대에는 알아도 실천을 안 했다면, 지금은 냉큼 실천하는 거죠. 일단 몸을 청결한 데 누이고, 낮에는 햇볕을 좀 쬐고, 소중한 식물을 대하듯이 먼지를 털어주고 잘 먹이고 씻기는 과정을 통해 내가 회복된다고 생각해요.”
○ 〈시인의 생활 경영: 김소연〉 최지은_ p.39-40
한국은 30분에 한 명씩 자살하는 국가이지만 자살에 관한 논의 자체는 텅 비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수가 자살을 직간접으로 경험하지만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자살을 숨기기에만 바쁘지 자살로 인한 상실과 자살 문제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할지에는 침묵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대단히 적극적인 행위다. 우울증이 삶에서 에너지를 앗아간다면 자살은 삶을 끝내기 위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 동기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야 한다.
○ 〈죽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미나_ p.61
분노의 다양한 활용을 연구한 철학자 마리아 루고네스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분노는 단련해야 하지만 굳이 진정시킬 필요는 없다.” (……) 분노를 진정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단련이란 자신을 위해 분노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분노의 여러 가지 활용을 배우고 나와 타인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제안한다. 만약 내 안전과 행복을 위해 타인과 거리를 둬야 할 경우에는 이차적 분노를 선택하면 된다. 친구를 고르듯 분노를 고를 때 우리가 비로소 분노를 다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분노 수업〉 마리아 알레산드리_ p.67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것은 지구를 위한 실질적 문제일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실행 가능해야 하는 문제예요. 이 모든 것이 잠재의식 속 어딘가에 기억되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무언가를 알아차리지 못해요. 따라서 고통스럽고 끔찍하더라도 행동하는 게 낫습니다. 나는 어느 의사에게 들은 ‘기능적 부정’이라는 표현을 아주 좋아합니다. 참여하거나 항의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 감정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
○ 〈기후변화와 다루기 힘든 감정들: 정신분석학자 아누치카 그로스〉 리즈 에반스_ p.94
안데스 산지에서도 특히 전통을 따르는 마을 파찬타에서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배웠던 대로 딸 실레아에게 특정한 순서에 따라 무늬를 가르쳤다. 무늬는 한 번에 한 가닥씩 모양을 이뤄가면서 후손들이 조상의 이야기를 기억하도록 돕는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무늬의 모든 수학적 관계를 암기하고자 종종 큰 소리로 케추아어로 숫자를 세면서 들어올린 무늬들을 헤아리곤 한다.
○ 〈기억이 직물에 새겨지는 방식〉 앤드리아 M. 헤크먼_ p.136
엮은이 우먼카인드 편집부
《우먼카인드》는 여성의 언어로 말하고 여성의 눈으로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는 문화 잡지다. 여성의 자아, 정체성 그리고 동시대 세계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문학,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논의되는 생각들을 다양한 조합으로 선보인다. 그런 토대 위에서 더 나은 삶, 충만한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방법을 모색한다. 광고가 없는 잡지로 광고 없는 자리는 삶의 지침이 되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잠언과 일러스트 작품이 대신한다. 2014년 호주에서 창간된 계간지로, 현재 27개국 독자들이 만나고 있다.
옮긴이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 권은정, 김효정, 서가원, 유혜인, 이미영.
차례
4 Editor’s letter
10 News From Nowhere
20 psychology 자기만의 북극성을 따라가는 법
26 writing 내 손이 당신의 얼굴을 건져내길
34 self-regard 시인의 생활 경영
48 art 손으로 실을 잇고 이어
56 sociology 죽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62 philosophy 분노 수업
68 sociology 공공 생활의 출구가 사라졌다
76 feminism 거침없이 말하고 용감하게 맞서고
84 psychology 당신의 행복을 좌우하는 생각
92 psychology 기후변화와 다루기 힘든 감정들
100 nature 지구의 숨통
106 art 무한한 꽃
110 travel 리얼리티 안팎을 넘나드는 여행
we are womankind: Peru
118 voice 페루에서 온 편지
132 anthropology 기억이 직물에 새겨지는 방식
140 herstory 미라가 되어버린 소녀
148 environment 거대한 댐을 멈춘 사람
190 Books
194 Poet
건강한 여성주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우먼카인드》
vol. 14 : 혼자 있는 시간
자발적 고독과 강제적 고립 사이를 지나오며
코로나블루는 작년 한 해를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내향적이고, 고독을 즐기고, 자기 돌봄에 능한 사람도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고 지속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다루기 힘든 감정들과 마주하게 된다. 언택트가 새로운 일상이 되면서 자신의 몸과 감정을 잘 추스르는 일의 중요함을 깨닫는 동시에, ‘혼자 있는 시간’이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을 향해 열려 있는 웅크림의 시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우먼카인드》는 비대면 일상이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일깨우는 ‘함께’라는 감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렸다.
김소연 시인이 최근에 발표한 여행 산문집 제목은 ‘그 좋았던 시간에’이다. 시인이 여행한 이국의 풍경과 이야기를 보고 듣다 보면 책 제목이 마치 과거의 서랍 속으로 들어가버린 우리의 일상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련해지기도 한다. 최지은 작가가 만난 김소연 시인은 작년 한 해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이 아닌 집에서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와 함께 일 년을 보내며 마음의 치유를 얻고, 생활인으로서 하루하루를 잘 돌보는 일에 집중한 시인으로부터 생활을 잘 경영하는 것이 마음의 에너지를 돌보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시인의 생활 경영: 시인 김소연〉, p.34)
이주혜 소설가는 고독이 보장될 때 비로소 찾아오는 문장, 그리고 그 고독 속에서 태어난 문장이 찾아나서는 연결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선사시대 동굴 벽에 손도장을 찍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단한 하루 살림을 마치고 윗목에 작은 상을 펴놓고 불경을 필사했던 할머니와 저녁마다 꼼꼼하게 가계부를 쓰며 숫자 옆에 무언가를 끼적였던 어머니의 웅크린 어깨를 떠올린다. 그로부터 끝내 고독을 갈구함에도 결코 고립되지 않겠다는 의지로서의 글쓰기를 실천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본다. 마치 잠수에 가까우리만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야 하는 고독이 필요한 글쓰기, 그러나 그 고독 속에서 태어난 글쓰기는 타인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행위라고, 그것이 타인의 얼굴을 건져내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팬데믹 시대에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의 마음이 그의 글 속에 담겨 있다.(〈내 손이 당신의 얼굴을 건져내길〉, p.26)
한국 여성의 자살률은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늘고 있다. 특히 2, 30대 젊은 여성들이다. 팬데믹은 증폭제일 뿐 주된 원인은 아니다. 하미나 작가는 “한국은 30분에 한 명씩 자살하는 국가이지만 자살에 관한 논의 자체는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작년부터 2, 30대 여성 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이들을 만나 취재하고 기록하면서 우리 사회가 보지 않고 지나치는 고통의 이면을 질문한다. 그의 물음이 우리가 마주하길 꺼리는 사회의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죽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p.56)
기후변화, 펜데믹,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회복력
정신분석학자 아누치카 그로스는 환경염려(eco-anxiety)가 2, 30대에게 끼치는 영향을 분석해왔고, 《환경염려 가이드(A Guide to Eco-anxiety)》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환경염려가 영국의 출산파업 운동과 멸종저항 운동, 미국의 상상가능한 미래 운동 등과 연결되는 꽤 복잡한 논쟁이라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기후변화에 직면해 느끼는 두려움과 슬픔, 죄책감과 질투심 등 다루기 힘든 감정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에 대한 견해를 들려준다. 그로스는 정신분석적 관점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행동주의를 고민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당신의 회복력을 더 좋은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는지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기후변화와 다루기 힘든 감정들〉, p.92)
아마존 열대우림은 ‘지구의 숨통’이다. 이를 위한 대체재는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2035년이 되면 아마존을 포함한 열대우림이 역으로 탄소 흡수원이 아닌 배출원이 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과학저술가 제사 갬블은 아마존 열대우림의 황폐화 원인을 되짚고, 현재 팬데믹으로 생태 복원 운동이 더욱 열악해진 상황에서도 힘쓰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한다.(〈지구의 숨통〉, p.100)
사회학자 티파니 젠킨스는 팬데믹 이후 축소된 공공의 영역, 그리고 이와 더불어 발언의 자유가 사라진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위기가 초래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캔슬 컬처(어떤 인물이 문제적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SNS에서 보이콧하는 문화), 둠스크롤링(인터넷으로 부정적 정보를 계속 소비하는 행위) 등 랜선을 통해 교류한다고 해도 실제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력을 상실하고, 음모론이 횡행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공공 생활의 출구가 사라졌다〉, p.68)
we are womankind: Peru
케추아족 여성들의 손은 거의 멈추는 일이 없다
《우먼카인드》 14호가 찾아가는 나라는 페루다. 1400년대에 최전성기를 누린 잉카제국의 유산은 전통 직물, 마추픽추 성채, 그리고 고대 언어 케추아어를 통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페루의 원주민 케추아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통 직물과 함께한다. 케추아족은 자신들의 삶 이야기, 조상의 이야기를 직물에 담아 후손이 이를 기억할 수 있게 돕는다. 케추아족 여성들이 쉬지 않고 한 가닥씩 모양을 이뤄가며 직물에 담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수 세기를 이어온 그들의 정체성이다.(〈기억이 직물에 새겨지는 방식〉, p.132)
아나 테레사 바르보자는 페루의 섬유예술가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발견한 가족사진, 어릴 적 물건인 인형, 옷, 신발 등을 그림으로 그리고, 이를 바느질로 이어 붙여 작품을 완성하면서 섬유예술 세계로 들어섰다. 어릴 때 스웨터를 뜨고, 식탁보를 수놓고, 옷을 기웠던 할머니의 창조적 노동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광활한 자연 풍경을 손수 실을 잇고 이어 완성한 바르보자의 놀라운 직물 공예 작품 속에서 일상의 지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손으로 실을 잇고 이어〉, p.48)
이 밖에도 페루 정부의 에너지 개발이 토착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국제사회에 알리며 페루 정부의 댐 건설을 막아낸 환경운동가 루스 부엔디아를 만난다. 그는 이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4년 환경 분야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골드먼 환경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거대한 댐을 멈춘 사람〉, p.146)
본문에서
우리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인다. 그러면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자기만의 북극성을 따라가는 법, 타인의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지 크게 걱정하지 않으면서 평생 자기계발 과정에 투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 물건을 팔려는 온갖 화려한 광고가 넘쳐나지만 삶은 경쟁이 아니다.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삶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는 삶이다.
○ 〈자기만의 북극성을 따라가는 법〉 제니퍼 쿤스트_ p.24-25
만 년 전 그 사람은 동굴 벽에 선명하게 찍은 손 모양을 문자 삼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여기 내가 있어. 이건 내 손이 하는 일이야. 나를 기억해주겠니?' 존재증명 혹은 조난신호. 만 년 후 나도 비슷한 행위를 한다. 하얀 종이에 뭔가를 끼적이고 키보드를 두드려 활자를 찍는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도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뭔가를 기록한다. 그것은 내 다짐일 때도 있고 비루한 마음의 고백일 때도 있다. 너의 이름일 때도 있고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당신의 얼굴일 때도 있다.
○ 〈내 손이 당신의 얼굴을 건져내길〉 이주혜_ p.31
“육체의 상태가 나이에 따라 좀 다르잖아요. 마음의 에너지도 그래요. 무엇보다 생활인으로서 하루를 잘 돌볼 때 마음의 회복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그걸 20대에는 몰랐고, 40대에는 알아도 실천을 안 했다면, 지금은 냉큼 실천하는 거죠. 일단 몸을 청결한 데 누이고, 낮에는 햇볕을 좀 쬐고, 소중한 식물을 대하듯이 먼지를 털어주고 잘 먹이고 씻기는 과정을 통해 내가 회복된다고 생각해요.”
○ 〈시인의 생활 경영: 김소연〉 최지은_ p.39-40
한국은 30분에 한 명씩 자살하는 국가이지만 자살에 관한 논의 자체는 텅 비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수가 자살을 직간접으로 경험하지만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자살을 숨기기에만 바쁘지 자살로 인한 상실과 자살 문제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야 할지에는 침묵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대단히 적극적인 행위다. 우울증이 삶에서 에너지를 앗아간다면 자살은 삶을 끝내기 위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 동기가 어디서 왔는지 물어야 한다.
○ 〈죽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미나_ p.61
분노의 다양한 활용을 연구한 철학자 마리아 루고네스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분노는 단련해야 하지만 굳이 진정시킬 필요는 없다.” (……) 분노를 진정시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단련이란 자신을 위해 분노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분노의 여러 가지 활용을 배우고 나와 타인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제안한다. 만약 내 안전과 행복을 위해 타인과 거리를 둬야 할 경우에는 이차적 분노를 선택하면 된다. 친구를 고르듯 분노를 고를 때 우리가 비로소 분노를 다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분노 수업〉 마리아 알레산드리_ p.67
“기후변화를 해결하는 것은 지구를 위한 실질적 문제일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실행 가능해야 하는 문제예요. 이 모든 것이 잠재의식 속 어딘가에 기억되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무언가를 알아차리지 못해요. 따라서 고통스럽고 끔찍하더라도 행동하는 게 낫습니다. 나는 어느 의사에게 들은 ‘기능적 부정’이라는 표현을 아주 좋아합니다. 참여하거나 항의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그 감정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
○ 〈기후변화와 다루기 힘든 감정들: 정신분석학자 아누치카 그로스〉 리즈 에반스_ p.94
안데스 산지에서도 특히 전통을 따르는 마을 파찬타에서 마리아는 어머니에게 배웠던 대로 딸 실레아에게 특정한 순서에 따라 무늬를 가르쳤다. 무늬는 한 번에 한 가닥씩 모양을 이뤄가면서 후손들이 조상의 이야기를 기억하도록 돕는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무늬의 모든 수학적 관계를 암기하고자 종종 큰 소리로 케추아어로 숫자를 세면서 들어올린 무늬들을 헤아리곤 한다.
○ 〈기억이 직물에 새겨지는 방식〉 앤드리아 M. 헤크먼_ p.136
엮은이 우먼카인드 편집부
《우먼카인드》는 여성의 언어로 말하고 여성의 눈으로 새로운 가치를 읽어내는 문화 잡지다. 여성의 자아, 정체성 그리고 동시대 세계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문학,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논의되는 생각들을 다양한 조합으로 선보인다. 그런 토대 위에서 더 나은 삶, 충만한 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방법을 모색한다. 광고가 없는 잡지로 광고 없는 자리는 삶의 지침이 되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잠언과 일러스트 작품이 대신한다. 2014년 호주에서 창간된 계간지로, 현재 27개국 독자들이 만나고 있다.
옮긴이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 권은정, 김효정, 서가원, 유혜인, 이미영.
차례
4 Editor’s letter
10 News From Nowhere
20 psychology 자기만의 북극성을 따라가는 법
26 writing 내 손이 당신의 얼굴을 건져내길
34 self-regard 시인의 생활 경영
48 art 손으로 실을 잇고 이어
56 sociology 죽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62 philosophy 분노 수업
68 sociology 공공 생활의 출구가 사라졌다
76 feminism 거침없이 말하고 용감하게 맞서고
84 psychology 당신의 행복을 좌우하는 생각
92 psychology 기후변화와 다루기 힘든 감정들
100 nature 지구의 숨통
106 art 무한한 꽃
110 travel 리얼리티 안팎을 넘나드는 여행
we are womankind: Peru
118 voice 페루에서 온 편지
132 anthropology 기억이 직물에 새겨지는 방식
140 herstory 미라가 되어버린 소녀
148 environment 거대한 댐을 멈춘 사람
190 Books
194 Po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