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
vol. 34 _ 관찰은 힘이 세다
‘관찰’이라는 하나의 화두 아래, 두 개의 다른 시선으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하나는 단순한 ‘보기’를 넘어선 ‘의미 있는 인식’으로서의 관찰이고, 두 번째는 관찰의 또 다른 형태인 ‘감시’가 현대사회에 일상화되는 기제를 살핀다. 산만해진 세상에서 진정한 관찰이란 요원해진 것 아닐까 생각하지만,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주의를 기울이고, 시선의 대상에 개별적 인식과 감정을 갖게 되는 일련의 패턴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특권이다. 신중하고 의식적인 관찰은 상대를 이해하게 하고, 세상을 배우게 하며, 나를 변화시키게 만든다. 하지만 관찰의 목적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 이는 감시로 탈바꿈한다. 스마트폰과 CCTV의 세상에서, 이제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현실은 능동과 피동의 구분 없이 누구나 겪는 일상이 되었다. 가치 있는 관찰이란 무엇일까? 필요악이 되어버린 감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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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보는 것’과 ‘~로 보는 것’
스크롤과 스킵 기능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우리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위이다. 수많은 ‘보는’ 행위가 떠다니는 먼지처럼 인식되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는 이 시대에, 《뉴필로소퍼》는 관찰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본다.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닐스 보어는 “어떤 현상도 관찰되지 않는 한 현상이 아니다”라고 했고, 정확히 10년 뒤 같은 상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영향을 받은 자연이다”라고 말했다. 두 위대한 물리학자가 자신이 이루어낸 결과물이 아닌, 그 결과물의 근원인 관찰의 경이로움을 공통적으로 강조하였다. 무엇보다 그들이 말한 관찰은 단순한 들여다봄이 아니라, 관찰자의 (무한한 지적 열망과 도전 의식 같은) 주관적 정신에서 비롯된 몰입의 행위였다.
관찰은 관찰의 대상을 바꿔놓는다. 무신론자는 봉우리로 이뤄진 산등성이를 보며 복잡한 생태계로 진화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만, 기독교인은 똑같은 대상이라도 이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볼 것이다. 어린아이 눈에 비친 동물원 우리 안의 원숭이와 어른이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원숭이가 같을 리 없다. 과학자 뉴턴의 사과와 화가 폴 세잔의 사과가 똑같은 관찰의 결과일 리 없다. 과학자는 “이것은 무얼까?” 하고 묻겠지만, 시인은 “이것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한 가지 방식의 관찰만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한 개의 진실만이 전부라고 믿는 것은 오판이자 위험한 일이다.
작가 마리나 벤저민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보다 폰 카메라로 작품을 찍는 데 열중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그들이 스마트폰에 담은 명작은 SNS에 당당히 재전시되어 다수의 관객들에게 노출될 것이다. 바야흐로 ‘보는 것’보다 ‘보여지는 것’에 무게 중심이 옮겨진 시대가 되었다. 관찰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다. ‘보다’와 ‘알다’를 동시에 품은 영어의 ‘see’가 그 방증이다.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일 때 곧 그 대상을 앎으로써 반응하는 것이 되므로, 본다는 행위는 상호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세상은 이미지로 넘쳐나지만 오히려 차분히 들여다보는 능력을 잃어가는 시대에, 허약해진 집중력의 근육을 키워나가는 것이 절실한 듯하다.
우리는 지켜보는 자리에 있음으로써 상황에 참여하며, 변화를 일으키고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잘 관찰한다는 것은 행위의 본질을 이해하고 안과 밖을 동시에 살피는 것,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바라보는 행위가 시선이 닿는 영역에 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본문 9쪽)
관찰하는 나, 관찰되는 나
_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감시자
관찰의 한 영역으로서 ‘감시’라는 행위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 현대 철학자들에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부르짖은 공리주의 대표자 제러미 벤담이 최초 설계한 원형구조의 감옥, 즉 판옵티콘의 존재와 의미가 현대인들이 치러야 할 감시의 메커니즘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중앙 탑의 감시자는 빙 둘러싼 각 감방의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피감시자는 자신이 감시받고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항상 감시받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판옵티콘 구조의 핵심 목적이다.
각종 사건 사고를 방지하고 조사할 수 있도록 절대 다수의 동의 아래 설치된 수많은 CCTV는 보호받고 있다는 안심과, 감시받고 있다는 불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세상에서 서로 간 찍고 찍히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의도하지 않은 감시와 피감시가 이루어지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감시의 주체는 사람을 넘어선다. 커넥팅된 세상에서 나와 너의 취향과 검색의 흔적은 알고리즘이라는 그물에 걸려 국가 기관에, 알 수 없는 서버에, 들어본 적 없는 홍보업체나 데이터 센터 등 세상 어디론가로 낱낱이 전달된다.
주체는 객체가 되고 관찰 대상은 구경거리가 된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는 이 불균형이 시스템 전체에 만연해 있다. 당신의 몸짓과 당신을 담은 영상, 당신이 서 있는 장소는 탑에 서 있는 감시자 한 명이 아니라 잠들지 않는 알고리즘이 포착하고 분석한다. 시선은 널리 퍼져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 눈은 한 개가 아니라 수백만 개에 이른다. (본문 123쪽)
미셸 푸코는 판옵티콘의 더 큰 목적이 감시가 아니라, 누구든 감시받고 있음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이 효과는 자기 규율, 즉 내면을 향하는 시선으로 나타나며, 상상으로라도 자신이 누군가의 관찰 대상이라 믿으면 스스로를 추적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어떤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 윤리적 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겸손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연결과 거리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반면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 《뉴필로소퍼》의 철학자는 말한다. 관찰을 줄이는 것보다 더 잘 관찰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산만한 시대에 두 눈을 질끈 감기보다는, 더 천천히 신중하게, 더 인간적으로 바라볼 것을 당부한 것이다.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갈 때
죽음을 의식할수록 삶의 의미가 선명해져
《뉴필로소퍼》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국내 인터뷰와 철학 에세이는 공교롭게도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는 법’에 대해 공통된 목소리와 철학적 표지판을 제시하였다. 철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며 아카데미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일상의 철학을 전파하는 박은미는 이번 인터뷰에서 심리적인 나, 논리적인 나, 그리고 무의식의 나를 오롯이 만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죽는다’는 전제를 늘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더 에너제틱하고 선명하게 삶을 이어가도록 만들며, 철저히 홀로 적막 한가운데 놓여 있는 시간을 가져야 그간 잊고 지냈던 순전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문화평론가이자 변호사인 정지우는 요즘과 같은 상시 접속의 시대에 진정한 자아관을 확립하기란 요원한 일이 되었음을 말하고,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조차 AI에게 답을 구하는 세태를 ‘자아의 외주화’라 진단하며 이에 대한 해법을 구하고자 한다.
“과거의 인간이 침묵 속에서 사유하며 자기 존재를 확인했다면, 이제 자아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실시간으로 온라인이라는 외부 저장소에 기록하고 전시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168쪽)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을 때조차,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 자체다. 댓글이나 ‘좋아요’ 숫자로 증명되는 내가 아니라, 적막과 고독과 혼자만의 생각과 글쓰기로서 만나게 되는 진정한 나 자신부터 대면하는 것이 먼저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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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 뉴필로소퍼 편집부
《뉴필로소퍼》는 인류가 축적한 웅숭깊은 철학적 사상을 탐구하여 “보다 충실한 삶”의 원형을 찾고자 2013년 호주에서 처음 창간된 계간지다. 《뉴필로소퍼》의 창간 목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으로, 소비주의와 기술만능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뉴필로소퍼》가 천착하는 주제는 ‘지금, 여기’의 삶이다. 인간의 삶과 그 삶을 지지하는 정체성은 물론 문학, 철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인문적 관점을 선보인다. 인문학과 철학적 관점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독립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2013년 창간 당시부터 광고 없는 잡지로 발간되고 있다. 《뉴필로소퍼》의 한국판 역시 이러한 정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일체의 광고 없이 잡지를 발간한다.
옮긴이 성소희, 송예슬, 강이수, 최이현, 이초희
본문 중에서
인간의 마음은 불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연속적인 서사로 편집해낸다. 노련한 영화 편집자처럼 프레임들을 봉합해 사이의 틈을 없앤다.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은 사실상 사후에 만들어진 이야기를 바라보는 셈이다. 그것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내면에서 재구성한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찰은 우리에게 겸허한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한다. 인간의 눈은 카메라가 아니라 일종의 문지기다. 인간의 눈이 토막 난 순간들을 스쳐 지나고 나면 곧바로 마음이 비어 있는 곳들을 채운다.
▲ News from nowhere (10쪽)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결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는 매일 저녁 일몰을 본다. 지구가 태양을 등지고 있다는 것 또한 안다. 그런데 이러한 앎과 설명이, 우리가 보는 풍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다.” ―존 버거
▲ News from nowhere (11쪽)
마라는 손전등과 스포트라이트라는 두 상반된 조명을 이용해서 그것을 탐구한다. 손전등은 빛을 퍼뜨리기 때문에 주의를 분산시킨다. ……스포트라이트는 미리 정한 목표에 집중하면서 주의 범위를 좁힌다. 삶에는 손전등과 스포트라이트가 모두 필요하다. ……세상은 일상과 규율에 따라 돌아간다. 관찰하던 것을 다시 관찰하지 않으면 세부 사항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하므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수시로 친절해야 한다.” 공감과 상상력이 일종의 손전등이 되어 증거와 믿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을 비춰줄 것이다.
▲ 관찰하는 자신을 관찰하기 _ 톰 챗필드 (40쪽)
데이비드 라이언은 이런 감시 체계를 “유동하는 감시liquid surveillance” 즉 액체처럼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결국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는 감시라고 설명한다. 현대 사회의 감시가 섬뜩한 이유는 친밀성 때문이다. 감시 시스템은 단순한 위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정체성까지 학습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개인의 습관, 욕망, 취약점을 때때로 자기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알아낸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간은 자신을 먹잇감으로 삼는 감시 시스템에 먹이를 공급하는 중이다. 푸코가 말한 “감시의 눈길”은 이제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과 편리함으로 설계되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 (43쪽)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고민할 때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A를 하는 나를 미래의 내가 좋아할까? 아니면 B를 하는 나를 미래의 내가 좋아할까?’ 이렇게 물어보면 거의 정확한 답이 나와요. 당장의 욕구에 충실한 건 A여도, 결국 미래의 나는 B로 행동하는 나를 더 좋아할 뿐 아니라 더 나은 선택임을 확인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 철학의 언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_ 박은미 인터뷰 (147쪽)
연결 이전에 ‘나’가 있다. 이 ‘나’는 SNS에서 받는 ‘좋아요’와 댓글 숫자로 규정되어 만들어진 내가 아니다. 알고리즘에 의해 강화된 취향으로 규정된 나도 아니다. AI가 최대치의 능력으로 자기 합리화를 해서 완성해준 나르시시즘적인 나도 아니다. ‘나’는 그 모든 것 이전에 있는 ‘나’이다. 이 ‘나’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 거의 매일 이 ‘나’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믿는 행동 강령에 따른 실천이다.
▲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갈 때 _ 정지우 (172쪽)
차례
News from Nowhere
Intro _ 겸허함으로부터의 관찰 _ 잔 보그
Experience _ 감시하고 감시당하느라 간과한 것 _ 티파니 젠킨스
Attention _ 눈먼 관찰의 시대 _ 마리나 벤저민
Comic _ 벤담, 감옥을 설계하다 _ 코리 몰러
Notice _ 관찰하는 자신을 관찰하기 _ 톰 챗필드
Shift _ ‘보는 것’과 ‘~로 보는 것’ _ 나이젤 워버튼
Artist _ 렌즈에 맺힌 존재의 연약함 _ 토마스 슈트루트
Science _ 목격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가 _ 패트릭 스톡스
Interview _ 기억보다 기록이 우위인 이유 _ 대니얼 사이먼스
Relationship _ 제4의 벽을 무너뜨릴 용기 _ 마리아나 알레산드리
Opinion _ 기념하느라 놓친 수많은 생의 본질 _ 안토니아 케이스
Interview _ 현상을 감각하다, 감각을 관찰하다 _ 니컬러스 험프리
Reality _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감시자
Philosophy _ 외줄타기 곡예사가 된 철학자들 _ 코스티카 브라다탄
Interview _ 철학의 언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_ 박은미
사소한 것들의 철학 _ 노자와 공자도 품어주는 휴지 _ 이진민
앎과 삶 _ 야만의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_ 황진규
On Thinking _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갈 때 _ 정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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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
vol. 34 _ 관찰은 힘이 세다
‘관찰’이라는 하나의 화두 아래, 두 개의 다른 시선으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하나는 단순한 ‘보기’를 넘어선 ‘의미 있는 인식’으로서의 관찰이고, 두 번째는 관찰의 또 다른 형태인 ‘감시’가 현대사회에 일상화되는 기제를 살핀다. 산만해진 세상에서 진정한 관찰이란 요원해진 것 아닐까 생각하지만,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주의를 기울이고, 시선의 대상에 개별적 인식과 감정을 갖게 되는 일련의 패턴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특권이다. 신중하고 의식적인 관찰은 상대를 이해하게 하고, 세상을 배우게 하며, 나를 변화시키게 만든다. 하지만 관찰의 목적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 이는 감시로 탈바꿈한다. 스마트폰과 CCTV의 세상에서, 이제 감시하고 감시당하는 현실은 능동과 피동의 구분 없이 누구나 겪는 일상이 되었다. 가치 있는 관찰이란 무엇일까? 필요악이 되어버린 감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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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보는 것’과 ‘~로 보는 것’
스크롤과 스킵 기능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우리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위이다. 수많은 ‘보는’ 행위가 떠다니는 먼지처럼 인식되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는 이 시대에, 《뉴필로소퍼》는 관찰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본다.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닐스 보어는 “어떤 현상도 관찰되지 않는 한 현상이 아니다”라고 했고, 정확히 10년 뒤 같은 상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영향을 받은 자연이다”라고 말했다. 두 위대한 물리학자가 자신이 이루어낸 결과물이 아닌, 그 결과물의 근원인 관찰의 경이로움을 공통적으로 강조하였다. 무엇보다 그들이 말한 관찰은 단순한 들여다봄이 아니라, 관찰자의 (무한한 지적 열망과 도전 의식 같은) 주관적 정신에서 비롯된 몰입의 행위였다.
관찰은 관찰의 대상을 바꿔놓는다. 무신론자는 봉우리로 이뤄진 산등성이를 보며 복잡한 생태계로 진화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만, 기독교인은 똑같은 대상이라도 이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볼 것이다. 어린아이 눈에 비친 동물원 우리 안의 원숭이와 어른이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원숭이가 같을 리 없다. 과학자 뉴턴의 사과와 화가 폴 세잔의 사과가 똑같은 관찰의 결과일 리 없다. 과학자는 “이것은 무얼까?” 하고 묻겠지만, 시인은 “이것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한 가지 방식의 관찰만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한 개의 진실만이 전부라고 믿는 것은 오판이자 위험한 일이다.
작가 마리나 벤저민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보다 폰 카메라로 작품을 찍는 데 열중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그들이 스마트폰에 담은 명작은 SNS에 당당히 재전시되어 다수의 관객들에게 노출될 것이다. 바야흐로 ‘보는 것’보다 ‘보여지는 것’에 무게 중심이 옮겨진 시대가 되었다. 관찰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다. ‘보다’와 ‘알다’를 동시에 품은 영어의 ‘see’가 그 방증이다.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일 때 곧 그 대상을 앎으로써 반응하는 것이 되므로, 본다는 행위는 상호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세상은 이미지로 넘쳐나지만 오히려 차분히 들여다보는 능력을 잃어가는 시대에, 허약해진 집중력의 근육을 키워나가는 것이 절실한 듯하다.
우리는 지켜보는 자리에 있음으로써 상황에 참여하며, 변화를 일으키고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잘 관찰한다는 것은 행위의 본질을 이해하고 안과 밖을 동시에 살피는 것,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바라보는 행위가 시선이 닿는 영역에 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본문 9쪽)
관찰하는 나, 관찰되는 나
_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감시자
관찰의 한 영역으로서 ‘감시’라는 행위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 현대 철학자들에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부르짖은 공리주의 대표자 제러미 벤담이 최초 설계한 원형구조의 감옥, 즉 판옵티콘의 존재와 의미가 현대인들이 치러야 할 감시의 메커니즘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중앙 탑의 감시자는 빙 둘러싼 각 감방의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피감시자는 자신이 감시받고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항상 감시받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판옵티콘 구조의 핵심 목적이다.
각종 사건 사고를 방지하고 조사할 수 있도록 절대 다수의 동의 아래 설치된 수많은 CCTV는 보호받고 있다는 안심과, 감시받고 있다는 불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세상에서 서로 간 찍고 찍히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의도하지 않은 감시와 피감시가 이루어지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감시의 주체는 사람을 넘어선다. 커넥팅된 세상에서 나와 너의 취향과 검색의 흔적은 알고리즘이라는 그물에 걸려 국가 기관에, 알 수 없는 서버에, 들어본 적 없는 홍보업체나 데이터 센터 등 세상 어디론가로 낱낱이 전달된다.
주체는 객체가 되고 관찰 대상은 구경거리가 된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는 이 불균형이 시스템 전체에 만연해 있다. 당신의 몸짓과 당신을 담은 영상, 당신이 서 있는 장소는 탑에 서 있는 감시자 한 명이 아니라 잠들지 않는 알고리즘이 포착하고 분석한다. 시선은 널리 퍼져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 눈은 한 개가 아니라 수백만 개에 이른다. (본문 123쪽)
미셸 푸코는 판옵티콘의 더 큰 목적이 감시가 아니라, 누구든 감시받고 있음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이 효과는 자기 규율, 즉 내면을 향하는 시선으로 나타나며, 상상으로라도 자신이 누군가의 관찰 대상이라 믿으면 스스로를 추적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어떤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 윤리적 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겸손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연결과 거리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반면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 《뉴필로소퍼》의 철학자는 말한다. 관찰을 줄이는 것보다 더 잘 관찰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산만한 시대에 두 눈을 질끈 감기보다는, 더 천천히 신중하게, 더 인간적으로 바라볼 것을 당부한 것이다.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갈 때
죽음을 의식할수록 삶의 의미가 선명해져
《뉴필로소퍼》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국내 인터뷰와 철학 에세이는 공교롭게도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는 법’에 대해 공통된 목소리와 철학적 표지판을 제시하였다. 철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며 아카데미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일상의 철학을 전파하는 박은미는 이번 인터뷰에서 심리적인 나, 논리적인 나, 그리고 무의식의 나를 오롯이 만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죽는다’는 전제를 늘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더 에너제틱하고 선명하게 삶을 이어가도록 만들며, 철저히 홀로 적막 한가운데 놓여 있는 시간을 가져야 그간 잊고 지냈던 순전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문화평론가이자 변호사인 정지우는 요즘과 같은 상시 접속의 시대에 진정한 자아관을 확립하기란 요원한 일이 되었음을 말하고,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조차 AI에게 답을 구하는 세태를 ‘자아의 외주화’라 진단하며 이에 대한 해법을 구하고자 한다.
“과거의 인간이 침묵 속에서 사유하며 자기 존재를 확인했다면, 이제 자아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실시간으로 온라인이라는 외부 저장소에 기록하고 전시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168쪽)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을 때조차,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 자체다. 댓글이나 ‘좋아요’ 숫자로 증명되는 내가 아니라, 적막과 고독과 혼자만의 생각과 글쓰기로서 만나게 되는 진정한 나 자신부터 대면하는 것이 먼저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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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 뉴필로소퍼 편집부
《뉴필로소퍼》는 인류가 축적한 웅숭깊은 철학적 사상을 탐구하여 “보다 충실한 삶”의 원형을 찾고자 2013년 호주에서 처음 창간된 계간지다. 《뉴필로소퍼》의 창간 목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행복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것”으로, 소비주의와 기술만능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뉴필로소퍼》가 천착하는 주제는 ‘지금, 여기’의 삶이다. 인간의 삶과 그 삶을 지지하는 정체성은 물론 문학, 철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인문적 관점을 선보인다. 인문학과 철학적 관점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독립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2013년 창간 당시부터 광고 없는 잡지로 발간되고 있다. 《뉴필로소퍼》의 한국판 역시 이러한 정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일체의 광고 없이 잡지를 발간한다.
옮긴이 성소희, 송예슬, 강이수, 최이현, 이초희
본문 중에서
인간의 마음은 불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연속적인 서사로 편집해낸다. 노련한 영화 편집자처럼 프레임들을 봉합해 사이의 틈을 없앤다.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은 사실상 사후에 만들어진 이야기를 바라보는 셈이다. 그것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내면에서 재구성한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찰은 우리에게 겸허한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다 보지 못한다. 인간의 눈은 카메라가 아니라 일종의 문지기다. 인간의 눈이 토막 난 순간들을 스쳐 지나고 나면 곧바로 마음이 비어 있는 곳들을 채운다.
▲ News from nowhere (10쪽)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결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는 매일 저녁 일몰을 본다. 지구가 태양을 등지고 있다는 것 또한 안다. 그런데 이러한 앎과 설명이, 우리가 보는 풍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다.” ―존 버거
▲ News from nowhere (11쪽)
마라는 손전등과 스포트라이트라는 두 상반된 조명을 이용해서 그것을 탐구한다. 손전등은 빛을 퍼뜨리기 때문에 주의를 분산시킨다. ……스포트라이트는 미리 정한 목표에 집중하면서 주의 범위를 좁힌다. 삶에는 손전등과 스포트라이트가 모두 필요하다. ……세상은 일상과 규율에 따라 돌아간다. 관찰하던 것을 다시 관찰하지 않으면 세부 사항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하므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수시로 친절해야 한다.” 공감과 상상력이 일종의 손전등이 되어 증거와 믿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을 비춰줄 것이다.
▲ 관찰하는 자신을 관찰하기 _ 톰 챗필드 (40쪽)
데이비드 라이언은 이런 감시 체계를 “유동하는 감시liquid surveillance” 즉 액체처럼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결국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는 감시라고 설명한다. 현대 사회의 감시가 섬뜩한 이유는 친밀성 때문이다. 감시 시스템은 단순한 위치 파악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정체성까지 학습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개인의 습관, 욕망, 취약점을 때때로 자기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알아낸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간은 자신을 먹잇감으로 삼는 감시 시스템에 먹이를 공급하는 중이다. 푸코가 말한 “감시의 눈길”은 이제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과 편리함으로 설계되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 (43쪽)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고민할 때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A를 하는 나를 미래의 내가 좋아할까? 아니면 B를 하는 나를 미래의 내가 좋아할까?’ 이렇게 물어보면 거의 정확한 답이 나와요. 당장의 욕구에 충실한 건 A여도, 결국 미래의 나는 B로 행동하는 나를 더 좋아할 뿐 아니라 더 나은 선택임을 확인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 철학의 언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_ 박은미 인터뷰 (147쪽)
연결 이전에 ‘나’가 있다. 이 ‘나’는 SNS에서 받는 ‘좋아요’와 댓글 숫자로 규정되어 만들어진 내가 아니다. 알고리즘에 의해 강화된 취향으로 규정된 나도 아니다. AI가 최대치의 능력으로 자기 합리화를 해서 완성해준 나르시시즘적인 나도 아니다. ‘나’는 그 모든 것 이전에 있는 ‘나’이다. 이 ‘나’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 거의 매일 이 ‘나’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믿는 행동 강령에 따른 실천이다.
▲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갈 때 _ 정지우 (172쪽)
차례
News from Nowhere
Intro _ 겸허함으로부터의 관찰 _ 잔 보그
Experience _ 감시하고 감시당하느라 간과한 것 _ 티파니 젠킨스
Attention _ 눈먼 관찰의 시대 _ 마리나 벤저민
Comic _ 벤담, 감옥을 설계하다 _ 코리 몰러
Notice _ 관찰하는 자신을 관찰하기 _ 톰 챗필드
Shift _ ‘보는 것’과 ‘~로 보는 것’ _ 나이젤 워버튼
Artist _ 렌즈에 맺힌 존재의 연약함 _ 토마스 슈트루트
Science _ 목격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가 _ 패트릭 스톡스
Interview _ 기억보다 기록이 우위인 이유 _ 대니얼 사이먼스
Relationship _ 제4의 벽을 무너뜨릴 용기 _ 마리아나 알레산드리
Opinion _ 기념하느라 놓친 수많은 생의 본질 _ 안토니아 케이스
Interview _ 현상을 감각하다, 감각을 관찰하다 _ 니컬러스 험프리
Reality _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감시자
Philosophy _ 외줄타기 곡예사가 된 철학자들 _ 코스티카 브라다탄
Interview _ 철학의 언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_ 박은미
사소한 것들의 철학 _ 노자와 공자도 품어주는 휴지 _ 이진민
앎과 삶 _ 야만의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_ 황진규
On Thinking _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갈 때 _ 정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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