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
vol. 32 : “나는 연결되었다. 고로 존재한다”
‘영광스러운 고립’이란 없다
_ 철학이 집중하지 않았던 인간의 상호 의존성
혼자 즐기는 삶의 장면들이 여러 매체에서 관심을 끌고, 기술적 연결 덕분에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다양한 교류가 원활히 이뤄지는 상황을 목도하노라면 점차 개인화, 고립화, 단절화되는 미래를 조금은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연결’을 주제로 한 이번 호 《뉴필로소퍼》의 첫 번째 글을 여는 철학교수 패트릭 스톡스는 한 마디 예시로 그 우려를 정리해준다. 월든 호숫가에 혼자 머물면서 자연과 함께 하며 자급자족의 삶을 실천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하지만 “소로가 자립의 미덕을 극구 찬양하는 글을 쓰던 호숫가 오두막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어머니가 깨끗한 세탁물을 가져오고, 누이들은 케이크를 전해주고 갔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혼자만의 삶’이라는 것의 맹점과 한계가 드러난다.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자립의 모습, 타 집단과의 교류나 지원 없이도 충분히 살아가는 ‘자급자족’의 힘은 분명 이 세상에서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한다면 남의 행동과 선택에 의해 나의(우리의) 운명과 행복이 결정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영구 동맹을 피하려는 영국의 정책을 두고 캐나다 정치인 조지 율리스 포스터가 표현한 대로 “영광스러운 고립”은 분명 한계가 있다. 모든 걸 소유한 듯 보이는 재벌도 누군가의 노동과 창의의 산물로 살아가고, 신의 손이라 불리는 명의도 자신의 몸을 수술할 수는 없다. 아무리 고립된 삶을 지향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붙인 이름과 언어, 정체성과 소속의 네트워크를 벗어나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오랫동안 철학자들도 인간을 자유의지와 이성을 지닌 독립된 원자처럼 생각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해갔다. 다른 인간, 혹은 다른 자연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라는 변치 않는 전제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도덕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아무리 철학이 철저하게 무시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적이라고 명시했다. 디지털 시대에 완벽히 접어들었지만, 사람의 유전자와 두뇌는 타인과의 유대와 접촉, 심지어 자연과 비자연물과도 끊임없이 연결된 채로 살아야 한다. 《뉴필로소퍼》는 사람과 사람, 기술과 철학,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다양한 주체들이 어떻게 관계지으며 살아가야 더 옳은, 더 나은, 덜 파편화된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를 제시한다.
사상과 이념의 시장에서 자급자족의 미덕을 떠들어댈 수는 있지만, 어느 날 가게 앞에 줄 서 있다가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면 이 미덕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낯선 이들의 친절에 달린 그 순간, 결국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지가 분명해진다. (본문 23쪽)
--------------------------------------------
사회적 연결, 인간은 왜 유대하는가?
_ 유전자에 새겨진 인간의 사회성
사회 연결망과 생물사회학 분야를 주로 연구하는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예일대학교 교수는 인간의 사회적 연결을 이야기할 때 탄소 결합을 설명의 예시로 사용한다. 같은 탄소 원자들이라 하더라도 이를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하면 화려한 다이아몬드를 얻게 되지만, 똑같은 원자를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면 연필의 원료인 흑연이 된다. 다시 말해 원래의 본질이 무엇이었든, 이를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된다는 것이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인간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며, 한 집단의 개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하면 부유하고 혁신적인 사회가 구성되지만, 위의 동일한 개인들을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면 가난하고 병든 어두운 사회가 된다. 즉 연결이란 ‘개인과 개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무형의 유대 관계’이며, 다양한 인간관계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특성까지 포함한다고 정의 내린다.
그는 특히 대규모 실험 데이터를 통해 ‘3단계 영향력 법칙’이라는 개념을 발표하여 학계와 대중 모두에게 사회 연결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독립적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타인의 생각과 주변 환경에 좌우되는 유전적 특성이 아로새겨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 영향력의 확산은 가족이나 친한 지인(1단계)뿐만 아니라 친구의 친구(2단계), 친구의 친구의 친구(3단계) 등으로 이어져 우리가 얼굴조차 모르는 낯선 이들과도 연결되었는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지식과 문화의 직간접적 전달 또한 실험 결과값을 통해 대체로 3단계까지 무난하게 전파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물론 손해와 피해, 거짓과 폭력 등 관계의 부정적 상황 또한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군가로부터 사기를 당하거나 목숨까지 위협받고, 혹은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바이러스에 전염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피해를 받게 되면 인간은 홀로 각자도생을 택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다. “사람들은 친족이 아닌 낯선 이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교우 관계를 오랫동안 소중하게 유지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이 무리에 속하기를 바라는 쪽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수입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다”
- 국내 철학자, 예술 작가들의 인터뷰와 철학 에세이
《뉴필로소퍼》는 해당 호의 주제와는 별개로, 국내 철학자와 예술 작가들의 인터뷰와 철학 에세이를 싣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스물다섯 권의 철학서를 낸 중견 철학작가이자 임상철학자, 동시에 국내에서 매우 드문,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안광복 교사를 만나본다. 그는 어려운 이론 철학에서 벗어나 학업에 매몰되어 우울감에 시달리는 10대들에게, 그리고 상처와 고통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수많은 대중에게 ‘철학으로 치료하기’ 위한 임상 철학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수입 학문으로서 어렵게만 다가가는 철학이 아니라, 유명 철학자들의 엄격하고 논리적인 이론을 독자들과 일반 대중 앞에 따뜻하고도 쉽게 풀어서 전달해주는 사람이 되고자, 그래서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the way of life)’을 이루는 것이 목표라 말한다.
루이 알튀세르의 ‘호명呼名 테제’에 대한 설명과 함께, 누군가에게 내 이름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는지 질문하는 황진규 철학자의 글을 만나본다. 그는 무슨 이름으로 불리는지가 아닌, 어떤 관계 아래, 어떤 자유와 애정 아래 이름이 호명되는지에 초점을 맞추며 호명의 이데올로기를 설명해나간다. 뮤지션이자 에세이스트인 임이랑 작가는 유년기부터 이어진 트라우마, 다시 말해 남들에겐 별것 아닌 크기여도 자신에게는 이후의 삶에 적잖은 생채기를 남긴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술작가 박보나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애완 로봇 인형을 경험하면서 인간과 기계,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세상의 모든 자연과 경계를 허물며 연대하는 우주적 공동체의 세상을 꿈꿔본다.
목차
News from Nowhere
Intro _ 교류 그 이상의 연결을 원한다 _ 잔 보그
Isolation _ 영광스러운 고립이 가능할까? _ 패트릭 스톡스
Connection _ 혼자가 아닌 필멸의 존재 _ 톰 챗필드
Comic _ 소크라테스 비상사태 _ 코리 몰러
Limit _ 던바의 수
Relationship _ 원거리 타인이 신경 쓰인다면 _ 마리나 벤저민
Consciousness _ 사람 아닌 모든 것들과의 교감 _ 안토니아 케이스
Wisdom _ 독소 관계에서 무모한 인내란? _ 마이샤 체리
Interview _ 사회적 연결, 인간은 왜 유대하는가 _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Philosophy _ 초고속 논쟁의 시대 _ 나이젤 워버튼
Culture _ 디지털 시대, 코스모테크닉스가 필요한 이유 _ 앙드레 다오
Interview _ 달라진 소통 지형에 적응하라 _ 케네스 거겐
Sympathy _ 슬픔은 슬픔을 알아본다 _ 마리아나 알레산드리
Classic _ 연결된 행동 _ 존 듀이
Interview _ 더 이상 수입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다 _ 안광복
앎과 삶 _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가? _ 황진규
공간이랑 _ 1초씩 느리게 가던 그날의 고속버스 _ 임이랑
Thinking in pictures _ 이제는 우주적 공동체의 시간 _ 박보나
Our Library
13 questions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
vol. 32 : “나는 연결되었다. 고로 존재한다”
‘영광스러운 고립’이란 없다
_ 철학이 집중하지 않았던 인간의 상호 의존성
혼자 즐기는 삶의 장면들이 여러 매체에서 관심을 끌고, 기술적 연결 덕분에 굳이 대면하지 않아도 다양한 교류가 원활히 이뤄지는 상황을 목도하노라면 점차 개인화, 고립화, 단절화되는 미래를 조금은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연결’을 주제로 한 이번 호 《뉴필로소퍼》의 첫 번째 글을 여는 철학교수 패트릭 스톡스는 한 마디 예시로 그 우려를 정리해준다. 월든 호숫가에 혼자 머물면서 자연과 함께 하며 자급자족의 삶을 실천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하지만 “소로가 자립의 미덕을 극구 찬양하는 글을 쓰던 호숫가 오두막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그의 어머니가 깨끗한 세탁물을 가져오고, 누이들은 케이크를 전해주고 갔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혼자만의 삶’이라는 것의 맹점과 한계가 드러난다.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자립의 모습, 타 집단과의 교류나 지원 없이도 충분히 살아가는 ‘자급자족’의 힘은 분명 이 세상에서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한다면 남의 행동과 선택에 의해 나의(우리의) 운명과 행복이 결정되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영구 동맹을 피하려는 영국의 정책을 두고 캐나다 정치인 조지 율리스 포스터가 표현한 대로 “영광스러운 고립”은 분명 한계가 있다. 모든 걸 소유한 듯 보이는 재벌도 누군가의 노동과 창의의 산물로 살아가고, 신의 손이라 불리는 명의도 자신의 몸을 수술할 수는 없다. 아무리 고립된 삶을 지향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붙인 이름과 언어, 정체성과 소속의 네트워크를 벗어나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오랫동안 철학자들도 인간을 자유의지와 이성을 지닌 독립된 원자처럼 생각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해갔다. 다른 인간, 혹은 다른 자연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동물이라는 변치 않는 전제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도덕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아무리 철학이 철저하게 무시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상호 의존적이라고 명시했다. 디지털 시대에 완벽히 접어들었지만, 사람의 유전자와 두뇌는 타인과의 유대와 접촉, 심지어 자연과 비자연물과도 끊임없이 연결된 채로 살아야 한다. 《뉴필로소퍼》는 사람과 사람, 기술과 철학,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다양한 주체들이 어떻게 관계지으며 살아가야 더 옳은, 더 나은, 덜 파편화된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를 제시한다.
사상과 이념의 시장에서 자급자족의 미덕을 떠들어댈 수는 있지만, 어느 날 가게 앞에 줄 서 있다가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면 이 미덕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낯선 이들의 친절에 달린 그 순간, 결국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지가 분명해진다. (본문 23쪽)
--------------------------------------------
사회적 연결, 인간은 왜 유대하는가?
_ 유전자에 새겨진 인간의 사회성
사회 연결망과 생물사회학 분야를 주로 연구하는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예일대학교 교수는 인간의 사회적 연결을 이야기할 때 탄소 결합을 설명의 예시로 사용한다. 같은 탄소 원자들이라 하더라도 이를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하면 화려한 다이아몬드를 얻게 되지만, 똑같은 원자를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면 연필의 원료인 흑연이 된다. 다시 말해 원래의 본질이 무엇이었든, 이를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된다는 것이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인간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며, 한 집단의 개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하면 부유하고 혁신적인 사회가 구성되지만, 위의 동일한 개인들을 다른 방식으로 연결하면 가난하고 병든 어두운 사회가 된다. 즉 연결이란 ‘개인과 개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무형의 유대 관계’이며, 다양한 인간관계와 이로부터 파생되는 특성까지 포함한다고 정의 내린다.
그는 특히 대규모 실험 데이터를 통해 ‘3단계 영향력 법칙’이라는 개념을 발표하여 학계와 대중 모두에게 사회 연결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독립적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타인의 생각과 주변 환경에 좌우되는 유전적 특성이 아로새겨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 영향력의 확산은 가족이나 친한 지인(1단계)뿐만 아니라 친구의 친구(2단계), 친구의 친구의 친구(3단계) 등으로 이어져 우리가 얼굴조차 모르는 낯선 이들과도 연결되었는 사실을 알려준다. 게다가 지식과 문화의 직간접적 전달 또한 실험 결과값을 통해 대체로 3단계까지 무난하게 전파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물론 손해와 피해, 거짓과 폭력 등 관계의 부정적 상황 또한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군가로부터 사기를 당하거나 목숨까지 위협받고, 혹은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바이러스에 전염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피해를 받게 되면 인간은 홀로 각자도생을 택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다. “사람들은 친족이 아닌 낯선 이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 교우 관계를 오랫동안 소중하게 유지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이 무리에 속하기를 바라는 쪽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수입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다”
- 국내 철학자, 예술 작가들의 인터뷰와 철학 에세이
《뉴필로소퍼》는 해당 호의 주제와는 별개로, 국내 철학자와 예술 작가들의 인터뷰와 철학 에세이를 싣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스물다섯 권의 철학서를 낸 중견 철학작가이자 임상철학자, 동시에 국내에서 매우 드문,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안광복 교사를 만나본다. 그는 어려운 이론 철학에서 벗어나 학업에 매몰되어 우울감에 시달리는 10대들에게, 그리고 상처와 고통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수많은 대중에게 ‘철학으로 치료하기’ 위한 임상 철학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수입 학문으로서 어렵게만 다가가는 철학이 아니라, 유명 철학자들의 엄격하고 논리적인 이론을 독자들과 일반 대중 앞에 따뜻하고도 쉽게 풀어서 전달해주는 사람이 되고자, 그래서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Philosophy as the way of life)’을 이루는 것이 목표라 말한다.
루이 알튀세르의 ‘호명呼名 테제’에 대한 설명과 함께, 누군가에게 내 이름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는지 질문하는 황진규 철학자의 글을 만나본다. 그는 무슨 이름으로 불리는지가 아닌, 어떤 관계 아래, 어떤 자유와 애정 아래 이름이 호명되는지에 초점을 맞추며 호명의 이데올로기를 설명해나간다. 뮤지션이자 에세이스트인 임이랑 작가는 유년기부터 이어진 트라우마, 다시 말해 남들에겐 별것 아닌 크기여도 자신에게는 이후의 삶에 적잖은 생채기를 남긴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술작가 박보나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애완 로봇 인형을 경험하면서 인간과 기계, 더 나아가 인간이 아닌 세상의 모든 자연과 경계를 허물며 연대하는 우주적 공동체의 세상을 꿈꿔본다.
목차
News from Nowhere
Intro _ 교류 그 이상의 연결을 원한다 _ 잔 보그
Isolation _ 영광스러운 고립이 가능할까? _ 패트릭 스톡스
Connection _ 혼자가 아닌 필멸의 존재 _ 톰 챗필드
Comic _ 소크라테스 비상사태 _ 코리 몰러
Limit _ 던바의 수
Relationship _ 원거리 타인이 신경 쓰인다면 _ 마리나 벤저민
Consciousness _ 사람 아닌 모든 것들과의 교감 _ 안토니아 케이스
Wisdom _ 독소 관계에서 무모한 인내란? _ 마이샤 체리
Interview _ 사회적 연결, 인간은 왜 유대하는가 _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Philosophy _ 초고속 논쟁의 시대 _ 나이젤 워버튼
Culture _ 디지털 시대, 코스모테크닉스가 필요한 이유 _ 앙드레 다오
Interview _ 달라진 소통 지형에 적응하라 _ 케네스 거겐
Sympathy _ 슬픔은 슬픔을 알아본다 _ 마리아나 알레산드리
Classic _ 연결된 행동 _ 존 듀이
Interview _ 더 이상 수입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다 _ 안광복
앎과 삶 _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가? _ 황진규
공간이랑 _ 1초씩 느리게 가던 그날의 고속버스 _ 임이랑
Thinking in pictures _ 이제는 우주적 공동체의 시간 _ 박보나
Our Library
13 questions
간편결제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