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 사회학, 뇌과학,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본 인간의 사회적 특성. 네트워크 과학이 제시한 불평등의 법칙을 넘어 공감과 연대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의 초사회성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공감의 반경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악과 신의 문제, 어째서 신은 악을 없애지 않는 것인가? 악의 존재는 신이 없다는 증거일까? 기술 디스토피아 시대, 당신의 사생활이 위협받고 있다. 왜 우리는 자연에서 초자연적 징표를 보는가? 저선량 레이저 치료 효가가 있을까? 기본입자가 빚어내는 우주의 신비. 개체를 넘어 집단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유전학 등 흥미로운 기사로 가득한 스켑틱 19호.
심리학, 컴퓨터 과학, 뇌과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인 한국인지과학회 학술대회가 5월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본 사회적 행위자’로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여러 분야의 시각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 스켑틱이 이런 경험을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학술대회에 참여하여 특집을 마련하였다. 이번 특집을 통해 독자들은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물리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뇌과학의 접근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을 탐구하는 물리학이 인간의 사회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통계물리학자 김범준 교수가 인간을 사회적 원자로 고려해 사회 현상의 특징을 살피는 사회물리학의 관점과 방법론을 이야기한다.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현상과 자석이 자성을 잃는 현상은 전혀 다른 현상처럼 보이지만 두 상전이가 정확히 같은 방정식으로 기술된다. 이와 같은 보편성이 우리 인간관계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다음으로 사회학자 이원재 교수는 ‘불평등의 법칙을 넘어 공감과 연대로’에서 통계물리학이 사회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감과 연대는 오늘날 여러 사회 담론을 지탱하는 실천 원리로 사회적 불평등을 줄여 인간의 보편성을 실현하려는 일체의 노력과 관련되어 있다. 이 관점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 동일한 관계의 양을 가져 동일한 교환의 기회를 갖는 상태다. 하지만 바바라시와 알베르트로 시작된 네트워크 과학은 이런 기대가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네트워크 과학은 자연 현상뿐 아니라 인간관계 역시 정규 분포가 아닌 소수가 다수의 관계를 갖는 멱함수 분포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였다. 즉, 인간관계의 불평등은 법칙성을 갖는 것이다. 과연 이런 불평등의 법칙을 넘어 인류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이원재 교수는 인간관계의 멱함수 분포가 일반적인 멱함수와 달리 두터운 꼬리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진사회성을 보이는 개미나 벌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초사회성을 보이는 인간. 과연 이런 인간의 초사회성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생물문화인류학자 김준홍 교수는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가 이끈 초사회성’에서 인간의 초사회성이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로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인간의 사회성을 ‘이기적 유전자’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진화생물학에서 동물의 이타적 행동은 가장 큰 퍼즐 중 하나였다. 이 문제를 푼 것이 바로 ‘이기적 유전자’ 관점으로 통칭되는 혈연선택과 호혜성 이론이다. 진화생물학자 대부분은 동물의 협동이 물론 인간의 사회성도 유전자 관점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김준홍 교수는 인간이 그 어떤 동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 사회를 갖고, 이 사회 관계가 비혈연 관계의 협동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유전자 관점이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런 대규모 협동의 진화를 위해서는 규범의 탄생이 필요했고, 규범 집단에 작용한 자연선택이 인간의 사회성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진화학자 장대익 교수는 ‘공감의 반경은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에서 인간의 사회성을 가능하게 한 심리적 기제인 공감을 다룬다. 그는 공감에 대한 최근 인지과학 및 뇌과학의 연구 결과를 살피면서 공감을 거울뉴런계에 근거한 정서적 공감과 마음이론에 근거한 인지적 공감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는 정서적 공감에서 인지적 공감으로 확대되면서, 즉 공감의 반경이 넓어지면서 지금과 같은 인간의 초사회성이 가능했다고 분석한다.
▼ 스페셜섹션: 종교와 의식에 대한 스티븐 핑커의 고찰
과연 과학은 종교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까? 도발은 노스이스턴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데이비드 데스티노에서 시작됐다. 그는 과학과 종교에 대한 한 논평에서 과학자도 종교적 율법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율법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 인간이 어떻게 가장 심원한 도덕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아이디어의 보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데스티노는 자신이 종교옹호자는 아니지만 양측이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대한 스티븐 핑커의 비평은 흥미롭다. 그는 종교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 방식에 있어서 ‘종교적 관행’과 ‘문화적 관행’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종교적 관행’의 이점에만 주목하는 것은 그 관행의 이면에 숨은 역기능을 가려 호도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종교의 사회적 통합이라는 순기능을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 기능이 외부 집단을 배제하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었는지를 상기하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일주년이 되는 날, 갑작스럽게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에 가보니 평소 어머니가 싫어하던 액자가 깨져 있었다. 과연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 아니면 자식을 보고 싶어 방문한 어머니의 간절한 신호일까? 이외에도 우리는 종종 자연적인 사건에서 초자연적인 징표를 발견한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타이어에 구멍이 나거나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비둘기 똥이 어깨에 떨어지는 사건은 재난을 피하라고 누군가가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자연적인 사건에서 초자연적인 징표들을 보는 것일까? 종교인지심리학자인 제시 베링은 우리의 이런 성향이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인 우리의 마음이론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과도한 마음이론은 종종 우리를 미혹에 빠뜨린다.
호모 사피엔스로서 인간은 개체를 넘어 집단으로서 하나의 종이다. 따라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인간 DNA의 염기서열을 밝혀냈다는 표현은 엄밀히 따지자면 사실이 아니다. 몇몇 기증자에서 채취된 DNA가 인류 전체의 유전 정보를 대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유전학은 이제 새로운 변곡점에 서 있다. 새로운 시퀀싱 기술이 개발 및 개량되면서 한 명의 DNA를 분석하는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였다. 동시에 같은 비용으로 DNA를 분석할 수 있는 집단의 크기가 수백, 수천, 수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인구 집단의 유전 변이를 분석하는 인간 집단유전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제 인간을 ‘집단’의 수준에서 분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 유전학의 토대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집중연재 시리즈 현대 유전학의 최전선을 가다 3편에서 이대한 박사가 변화하고 있는 집단 유전학의 관점에서 질병 유전자의 추적, 지능의 유전학, 정밀의료의 문제들을 흥미롭게 추적한다.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데카르트 같은 대단한 철학자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마음에 대한 직감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정신세계는 물리적 한계를 갖는 몸과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을 상상하며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분명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몸과 달라 보인다. 이런 느낌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몸과 영혼은 독립적이며 몸은 죽어도 영혼은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가 아무리 깊은 자기 성찰을 한다고 지구가 둥글고 중력으로 인해 물체가 밑으로 떨어진다는 이치를 깨달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자신의 의식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특권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는 마음에 대해 오해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본다.
목차
물리학, 사회학, 뇌과학,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관점에서 본 인간의 사회적 특성. 네트워크 과학이 제시한 불평등의 법칙을 넘어 공감과 연대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의 초사회성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공감의 반경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악과 신의 문제, 어째서 신은 악을 없애지 않는 것인가? 악의 존재는 신이 없다는 증거일까? 기술 디스토피아 시대, 당신의 사생활이 위협받고 있다. 왜 우리는 자연에서 초자연적 징표를 보는가? 저선량 레이저 치료 효가가 있을까? 기본입자가 빚어내는 우주의 신비. 개체를 넘어 집단을 통해 새롭게 거듭난 유전학 등 흥미로운 기사로 가득한 스켑틱 19호.
심리학, 컴퓨터 과학, 뇌과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모인 한국인지과학회 학술대회가 5월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본 사회적 행위자’로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여러 분야의 시각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 스켑틱이 이런 경험을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학술대회에 참여하여 특집을 마련하였다. 이번 특집을 통해 독자들은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물리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뇌과학의 접근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을 탐구하는 물리학이 인간의 사회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통계물리학자 김범준 교수가 인간을 사회적 원자로 고려해 사회 현상의 특징을 살피는 사회물리학의 관점과 방법론을 이야기한다.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현상과 자석이 자성을 잃는 현상은 전혀 다른 현상처럼 보이지만 두 상전이가 정확히 같은 방정식으로 기술된다. 이와 같은 보편성이 우리 인간관계에도 존재하는 것일까?
다음으로 사회학자 이원재 교수는 ‘불평등의 법칙을 넘어 공감과 연대로’에서 통계물리학이 사회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감과 연대는 오늘날 여러 사회 담론을 지탱하는 실천 원리로 사회적 불평등을 줄여 인간의 보편성을 실현하려는 일체의 노력과 관련되어 있다. 이 관점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 동일한 관계의 양을 가져 동일한 교환의 기회를 갖는 상태다. 하지만 바바라시와 알베르트로 시작된 네트워크 과학은 이런 기대가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네트워크 과학은 자연 현상뿐 아니라 인간관계 역시 정규 분포가 아닌 소수가 다수의 관계를 갖는 멱함수 분포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였다. 즉, 인간관계의 불평등은 법칙성을 갖는 것이다. 과연 이런 불평등의 법칙을 넘어 인류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이원재 교수는 인간관계의 멱함수 분포가 일반적인 멱함수와 달리 두터운 꼬리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진사회성을 보이는 개미나 벌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초사회성을 보이는 인간. 과연 이런 인간의 초사회성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생물문화인류학자 김준홍 교수는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가 이끈 초사회성’에서 인간의 초사회성이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로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인간의 사회성을 ‘이기적 유전자’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진화생물학에서 동물의 이타적 행동은 가장 큰 퍼즐 중 하나였다. 이 문제를 푼 것이 바로 ‘이기적 유전자’ 관점으로 통칭되는 혈연선택과 호혜성 이론이다. 진화생물학자 대부분은 동물의 협동이 물론 인간의 사회성도 유전자 관점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김준홍 교수는 인간이 그 어떤 동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 사회를 갖고, 이 사회 관계가 비혈연 관계의 협동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유전자 관점이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런 대규모 협동의 진화를 위해서는 규범의 탄생이 필요했고, 규범 집단에 작용한 자연선택이 인간의 사회성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진화학자 장대익 교수는 ‘공감의 반경은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에서 인간의 사회성을 가능하게 한 심리적 기제인 공감을 다룬다. 그는 공감에 대한 최근 인지과학 및 뇌과학의 연구 결과를 살피면서 공감을 거울뉴런계에 근거한 정서적 공감과 마음이론에 근거한 인지적 공감으로 나눈다. 그리고 그는 정서적 공감에서 인지적 공감으로 확대되면서, 즉 공감의 반경이 넓어지면서 지금과 같은 인간의 초사회성이 가능했다고 분석한다.
▼ 스페셜섹션: 종교와 의식에 대한 스티븐 핑커의 고찰
과연 과학은 종교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까? 도발은 노스이스턴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데이비드 데스티노에서 시작됐다. 그는 과학과 종교에 대한 한 논평에서 과학자도 종교적 율법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율법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 인간이 어떻게 가장 심원한 도덕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아이디어의 보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데스티노는 자신이 종교옹호자는 아니지만 양측이 서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대한 스티븐 핑커의 비평은 흥미롭다. 그는 종교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 방식에 있어서 ‘종교적 관행’과 ‘문화적 관행’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와 더불어 ‘종교적 관행’의 이점에만 주목하는 것은 그 관행의 이면에 숨은 역기능을 가려 호도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종교의 사회적 통합이라는 순기능을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 기능이 외부 집단을 배제하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었는지를 상기하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일주년이 되는 날, 갑작스럽게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에 가보니 평소 어머니가 싫어하던 액자가 깨져 있었다. 과연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 아니면 자식을 보고 싶어 방문한 어머니의 간절한 신호일까? 이외에도 우리는 종종 자연적인 사건에서 초자연적인 징표를 발견한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타이어에 구멍이 나거나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비둘기 똥이 어깨에 떨어지는 사건은 재난을 피하라고 누군가가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자연적인 사건에서 초자연적인 징표들을 보는 것일까? 종교인지심리학자인 제시 베링은 우리의 이런 성향이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인 우리의 마음이론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과도한 마음이론은 종종 우리를 미혹에 빠뜨린다.
호모 사피엔스로서 인간은 개체를 넘어 집단으로서 하나의 종이다. 따라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인간 DNA의 염기서열을 밝혀냈다는 표현은 엄밀히 따지자면 사실이 아니다. 몇몇 기증자에서 채취된 DNA가 인류 전체의 유전 정보를 대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유전학은 이제 새로운 변곡점에 서 있다. 새로운 시퀀싱 기술이 개발 및 개량되면서 한 명의 DNA를 분석하는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였다. 동시에 같은 비용으로 DNA를 분석할 수 있는 집단의 크기가 수백, 수천, 수만 명으로 늘어나면서 인구 집단의 유전 변이를 분석하는 인간 집단유전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제 인간을 ‘집단’의 수준에서 분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 유전학의 토대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집중연재 시리즈 현대 유전학의 최전선을 가다 3편에서 이대한 박사가 변화하고 있는 집단 유전학의 관점에서 질병 유전자의 추적, 지능의 유전학, 정밀의료의 문제들을 흥미롭게 추적한다.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데카르트 같은 대단한 철학자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마음에 대한 직감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정신세계는 물리적 한계를 갖는 몸과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을 상상하며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분명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몸과 달라 보인다. 이런 느낌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몸과 영혼은 독립적이며 몸은 죽어도 영혼은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가 아무리 깊은 자기 성찰을 한다고 지구가 둥글고 중력으로 인해 물체가 밑으로 떨어진다는 이치를 깨달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자신의 의식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특권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마음을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는 마음에 대해 오해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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