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켑틱 SKEPTIC 14호
최근 뉴스에서도 심심하지 않게 과학 기사를 접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 언론의 발달과 함께 과학 기사를 접할 기회는 점차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기사가 과학적 사실들을 부분적으로 다루거나 편파적으로 다룬다. 심지어 왜곡된 기사를 전하는 일도 있고, 틀린 기사를 전하는 일도 있다. 이번 스켑틱 포커스에서는 과학과 언론의 관계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고찰한다.
과학자와 언론인 모두 교육 수준이 높고, 호기심이 많으며, 불완전하고 때로는 부정확한 정보들로 이루어진 조각들을 맞추곤 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런 과학 언론의 상황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언론계는 이슈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장편영화와 같은 과학을 담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리고 과학의 대중화에 본질적 책임이 있는 과학자들은 그들이 속한 한계의 보상시스템이 대중과학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의 대중화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동기가 부족하다. 과학 언론의 한계에는 언론계와 과학계의 시스템적인 문제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 언론을 위한 새로운 대안은 없는 것인가?
미시건대학교 지질학과 석좌교수 헨리 폴락은 이런 질문에 부정적이다. 언론계과 과학계의 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서로 화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에서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을 8년간 운영한 오철우 기자는 변화하는 미디어 시대에 ‘좋은 과학저널리즘을 위한 협업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긍정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새로운 미디어 시대에 따라 학자들이 보상 체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를 필요로 하고 그 과정에 기자와의 협업 가능성이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슈만을 쫓는 언론의 속성은 어느 정도 극복되고 독자들은 양질의 과학 컨텐츠를 공급받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낙관한다.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자극적이고 주의를 끄는 주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사이비과학을 무분별하게 다룰 수 있고, 독자들은 이러한 부분을 걸러낼 수 있는 비판적인 과학적 소양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샤리 왁스먼은 경고한다.
1865년 4월 14일,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부군 스파이 존 윌크스 부스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놀랍게도 암살 2주 전 링컨은 꿈속에서 암살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꿈속에서 죽은 듯한 고요함을 느낀 링컨은 아래층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울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누가 죽었냐고 묻자, 그들은 대통령이 암살되었다고 답했다. 이 이야기는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책 대부분에서 다루는 유명한 링컨의 예지몽이다. 예지몽을 믿는 사람이 뜻밖에 많다. 최근 실시된 조사에서 응답자 중 3분의 1이 이제까지 살면서 꿈에서 미래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과연 예지몽은 인간의 인간의 초자연적 능력일까, 아니면 인간의 헛된 믿음일까? 리처드 와이즈먼이 실증적 연구를 통해 이 물음에 대답한다.
외계인의 이미지 중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원반 모양의 비행접시일 것이다. 외계인의 우주선으로 추정되는 비행접시는 최초로 1947년 6월 아마추어 파일럿 케네스 아널드에 의해 최초로 목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널드의 이야기가 언론을 탄 이후, 비행접시 모양의 외계인 우주선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아널드의 이야기에 대한 보도가 오보임이 드러났다. 그는 외계인의 우주선이 비행접시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초승달 모양의 비행선이 접시처럼 비행했다고 인터뷰했다고 말했다. 비행접시란 언론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널드 보도 이후 이어진 외계인 목격담들이 외계인의 우주선을 비행접시로 묘사한 일화들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1952년 11월 조지 아담스키가 조우했다고 말한 화성에서 온 오손이라는 외계인이 1951년 개봉작인 <지구 최후의 날>의 상냥한 외계인 클라투와 닮았다는 사실은 우연에 불과한 일일까? 안타깝게도 현대 UFO 시화의 주요 특징들은 모두 과거 미디어 속 이미지나 주제에서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팀 캘러핸은 이를 통해 현대의 외계인들이란 대중매체가 우리의 심리에 각인시킨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상호작용하지 않는 물리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를 인정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현대 과학의 부흥과 함께 막을 내렸다. 현대 과학은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물질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물리주의의 태도를 보이며 많은 성취를 거뒀다. 이제 현대 과학에서 정신이란 뇌 활동의 산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 그 자체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단지 의식이란 뇌의 활동에 부산물로 발생하는 환영에 불과하더라도 여전히 그 환영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1950년대 컴퓨터과학과 인공지능의 발전은 물리적 세계와 독립된 새로운 이원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컴퓨터는 특정 물리적 기반과 상관없이 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가 다루는 프로그램과 정보는 물리적 세계와 독립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 역시 정보처리에 불과하다면, 뇌의 특정한 활동과 무관하게 어떠한 기질로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사이버네틱스의 영역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과연 인공지능에 기반한 새로운 이원론은 얼마나 타당한가?
목차
한국 스켑틱 SKEPTIC 14호
최근 뉴스에서도 심심하지 않게 과학 기사를 접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 언론의 발달과 함께 과학 기사를 접할 기회는 점차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기사가 과학적 사실들을 부분적으로 다루거나 편파적으로 다룬다. 심지어 왜곡된 기사를 전하는 일도 있고, 틀린 기사를 전하는 일도 있다. 이번 스켑틱 포커스에서는 과학과 언론의 관계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고찰한다.
과학자와 언론인 모두 교육 수준이 높고, 호기심이 많으며, 불완전하고 때로는 부정확한 정보들로 이루어진 조각들을 맞추곤 한다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런 과학 언론의 상황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언론계는 이슈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장편영화와 같은 과학을 담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리고 과학의 대중화에 본질적 책임이 있는 과학자들은 그들이 속한 한계의 보상시스템이 대중과학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의 대중화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동기가 부족하다. 과학 언론의 한계에는 언론계와 과학계의 시스템적인 문제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과학 언론을 위한 새로운 대안은 없는 것인가?
미시건대학교 지질학과 석좌교수 헨리 폴락은 이런 질문에 부정적이다. 언론계과 과학계의 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서로 화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에서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을 8년간 운영한 오철우 기자는 변화하는 미디어 시대에 ‘좋은 과학저널리즘을 위한 협업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긍정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새로운 미디어 시대에 따라 학자들이 보상 체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를 필요로 하고 그 과정에 기자와의 협업 가능성이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슈만을 쫓는 언론의 속성은 어느 정도 극복되고 독자들은 양질의 과학 컨텐츠를 공급받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낙관한다.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자극적이고 주의를 끄는 주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사이비과학을 무분별하게 다룰 수 있고, 독자들은 이러한 부분을 걸러낼 수 있는 비판적인 과학적 소양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샤리 왁스먼은 경고한다.
1865년 4월 14일,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부군 스파이 존 윌크스 부스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놀랍게도 암살 2주 전 링컨은 꿈속에서 암살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꿈속에서 죽은 듯한 고요함을 느낀 링컨은 아래층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울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누가 죽었냐고 묻자, 그들은 대통령이 암살되었다고 답했다. 이 이야기는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책 대부분에서 다루는 유명한 링컨의 예지몽이다. 예지몽을 믿는 사람이 뜻밖에 많다. 최근 실시된 조사에서 응답자 중 3분의 1이 이제까지 살면서 꿈에서 미래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과연 예지몽은 인간의 인간의 초자연적 능력일까, 아니면 인간의 헛된 믿음일까? 리처드 와이즈먼이 실증적 연구를 통해 이 물음에 대답한다.
외계인의 이미지 중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원반 모양의 비행접시일 것이다. 외계인의 우주선으로 추정되는 비행접시는 최초로 1947년 6월 아마추어 파일럿 케네스 아널드에 의해 최초로 목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널드의 이야기가 언론을 탄 이후, 비행접시 모양의 외계인 우주선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결국 아널드의 이야기에 대한 보도가 오보임이 드러났다. 그는 외계인의 우주선이 비행접시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초승달 모양의 비행선이 접시처럼 비행했다고 인터뷰했다고 말했다. 비행접시란 언론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널드 보도 이후 이어진 외계인 목격담들이 외계인의 우주선을 비행접시로 묘사한 일화들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1952년 11월 조지 아담스키가 조우했다고 말한 화성에서 온 오손이라는 외계인이 1951년 개봉작인 <지구 최후의 날>의 상냥한 외계인 클라투와 닮았다는 사실은 우연에 불과한 일일까? 안타깝게도 현대 UFO 시화의 주요 특징들은 모두 과거 미디어 속 이미지나 주제에서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팀 캘러핸은 이를 통해 현대의 외계인들이란 대중매체가 우리의 심리에 각인시킨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상호작용하지 않는 물리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를 인정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현대 과학의 부흥과 함께 막을 내렸다. 현대 과학은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물질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물리주의의 태도를 보이며 많은 성취를 거뒀다. 이제 현대 과학에서 정신이란 뇌 활동의 산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 그 자체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단지 의식이란 뇌의 활동에 부산물로 발생하는 환영에 불과하더라도 여전히 그 환영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1950년대 컴퓨터과학과 인공지능의 발전은 물리적 세계와 독립된 새로운 이원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컴퓨터는 특정 물리적 기반과 상관없이 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컴퓨터가 다루는 프로그램과 정보는 물리적 세계와 독립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신 역시 정보처리에 불과하다면, 뇌의 특정한 활동과 무관하게 어떠한 기질로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사이버네틱스의 영역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과연 인공지능에 기반한 새로운 이원론은 얼마나 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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