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사고를 가로막는 29가지 사고 오류


과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 경Sir Arthur Stanley Eddington이 쓴 《물리과학의 철학The Philosophy of Physical Science》은 가장 중요한 과학철학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책에서 에딩턴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물리과학이 내린 결론의 진위를 판정하는 데 있어, 관찰은 최고 항소 법원과 같다.” 참 간단하다.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가 내린 결론들을 살펴본 다음 법정에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으면 에딩턴이 오로지 이 주제만을 다룬 책까지 써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생명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수함’을 지닌 물리과학에서 과학자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 법정의 판사들이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문화적으로 편협해 있으며, 사회적 환경에 구애되는 관찰자들이라는 점이다. 관찰은 그냥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다. 관찰은 오류를 저지르기 쉬운 우리네 뇌를 거치며 걸러지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생각이 잘못될 수 있으며, 실제로 잘못되는 경우도 많다. 이는 회의주의자들이 종종 몹시 즐거워하며 찌르고 쑤셔대곤 하는 주장을 펼친 사이비 과학자, 초과학주의자, 광신적 믿음 속에 거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다양한 얼굴을 한 사고의 오류들은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 심지어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과학자와 회의주의자들도 피해가지 못한다. 회의주의조차 극단으로 가면 창조적·비판적 사고를 억누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 생각이 잘못 들 수 있는 여러 길들을 다시 짚어보는 게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연습이 될 것이다. 

나는 그 길들을 네 가지 범주로 나누었고, 각 범주마다 특수한 오류와 문제점들을 열거했다.




과학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오류


1. 이론은 관찰에 영향을 미친다


물리 세계를 이해하고자 길을 나섰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탐구 방법에 노출된 자연이다.” 특히 양자역학에서 이 말은 참이다. 양자 작용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은 이렇게 말한다. “확률 함수는 사건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측정 행위로 인해 계의 고립이 간섭을 받고 단일 사건이 현실화될 때까지 가능한 사건들의 연속체를 기술한다.” 코펜하겐 해석은 이론과 실재의 일대일 대응을 제거해 버린다. 이론은 부분적으로 실재를 구성한다. 물론 실재는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우리가 실재를 검토할 때 쓰는 이론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과학을 ‘이론 의존적’이라고 부른다. 에딩턴은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어느 예술가가 울퉁불퉁한 모양을 한 대리석 덩어리 속에 인간 머리의 형상이 존재한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제시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닌 모든 이성적 본능은 그런 식으로 의인화하는 사변에 반발한다. 자연이 그런 형상을 돌덩어리 속에 두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예술가는 더 나아가서 그 이론을 실험으로 입증하고 나선다. 꽤 초보적인 장비까지 갖추고서 말이다. 곧, 우리가 조사할 수 있게 그냥 정 하나로 돌을 쪼아 그 형상을 떼어내어 의기양양하게 자기 이론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물리과학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해 이루어진 모든 관찰에도 해당된다. 신세계에 당도했을 때, 콜럼버스는 자신이 아시아에 있다는 심적 모형을 갖고 있었기에 신세계를 아시아로 지각했다. 계피는 값비싼 아시아 향신료였던 탓에 신세계에서 계피 냄새가 나는 관목을 처음 만나자 계수나무라고 단언했다. 서인도 제도에서 향기로운 검보림보 나무를 만난 콜럼버스는 지중해의 유향나무와 비슷한 아시아 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신세계의 견과는 마르코 폴로가 서술했던 코코넛으로 잘못 알았다. 콜럼버스의 선의船醫는 선원들이 캐낸 몇 가지 카리브해의 식물 뿌리를 살펴보고, 중국의 대황大黃을 발견했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비록 콜럼버스는 아시아에서 지구 반 바퀴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곳이 아시아다.’라는 이론이 아시아라는 관찰을 낳았던 것이다. 잘못된 이론이 우리 감각과 마음을 속이는 위력이 바로 이 정도다.



2. 관찰 행위는 관찰 대상을 변화시킨다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는 우리의 자연 이해에서 양자역학이 일으킨 사고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심지어 전자처럼 지극히 작은 대상을 관찰하려 해도 [물리학자는] 렌즈를 깨트리고, 그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가 선택한 측정 장비를 설치해야 한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것이냐 운동량을 측정할 것이냐는 결정은 그의 몫이다. 한 쪽을 측정할 장비를 설치하면 다른 쪽을 측정할 장비 설치를 방해하면서 설치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측정은 전자의 상태를 바꿔버린다. 그러면 우주는 측정 전의 우주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이는 특히 어떤 문제를 조사하는 행위가 그 문제를 바꿔 버릴 수 있는 인간과 인간 사회 영역에서 볼 수 있는 문제다. 인류학자들은 어떤 부족을 조사할 때 외부인에게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부족민들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심리학자들이 맹검법blind control과 이중맹검법double-blind control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피험자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실험적 조건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경우, 그들은 행동을 바꿀 수 있다. 또는 어느 피험자가 어느 집단에 들어 있는지 심리학자가 아는 경우에는 피험자가 보인 행동이 해당 조건에 적절한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도 있다. 초과학적인 능력을 시험하는 자리에서는 그런 통제가 없는 경우가 자주 있기에, 그쪽 부문에서 생각이 잘못되는 전형적인 방식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3. 실험이 결과를 구성한다


실험을 수행할 때 쓰는 장비 유형과 실험 방식은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결과를 빚어낸다. 망원경의 크기에 따라 우주의 크기에 대한 이론이 결정되곤 한다. 19세기에 두개골측정학은 지능을 뇌 크기로 정의했기에, 뇌 크기로 지능을 쟀다. 반면 오늘날에는 지능을 I.Q. 테스트를 써서 정의한다. 에딩턴은 다음과 같이 뛰어난 유비를 제시해서 이 문제를 그려낸다.


한 어류학자가 해양 생명을 탐사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는 그물을 물속으로 던져 갖가지 물고기들을 끌어올린다. 잡은 물고기를 조사하면서 어류학자는 과학자가 으레 하는 방식대로 그 물고기들의 드러난 바를 체계화한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일반화에 도달한다.


(1) 몸길이가 5센티미터보다 작은 해양 생물은 없다.

(2) 모든 해양 생물에게는 아가미가 있다.


이 유비를 과학에 적용해보면, 잡은 물고기는 물리과학을 이루는 지식 체계를 나타내고, 그물은 우리가 지식을 얻을 때 사용하는 감각 기관과 지능적인 장비를 나타내며, 그물을 던지는 것은 관찰 행위에 해당한다.


한 구경꾼이 첫 번째 일반화가 잘못되었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5센티미터보다 작은 바다 생물이 부지기수입니다. 다만 당신의 그물이 그것들을 잡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이죠.” 그 어류학자는 코웃음을 치며 그 반론을 물리쳐버린다. “내 그물로 잡을 수 없는 것은 사실상 어류학적 지식 범위의 바깥에 있습니다. 따라서 어류학적 지식의 주제로 정의되어 온 어류계의 일부가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서, 내 그물로 잡을 수 없는 것은 어류가 아니란 겁니다.”



4. 일화를 든다고 해서 과학이 되진 않는다


일화anecdote만 드는 것으로는 과학이 되지 못한다. 다른 정보원에서 나온 보강 증거가 없다면, 또는 모종의 물리적 증거가 없다면, 일화를 하나 드나 열 개 드나, 열 개 드나 백 개 드나 나을 것이 없다. 일화는 마음이 기우는 대로 이야기를 고르는 이야기꾼이 자기 경험에 대해 들려주는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캔자스 주 퍼커브러시의 농부 밥은 정직하고, 교회를 다니고, 가정적인 남자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벽 3시에 어느 외딴 시골 도로에 외계인들이 착륙해서 자기를 납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이나 외계인의 몸에 대한 구체적인 물리적 증거다. 수없이 제기되는 의학적 주장들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이모 메리가 마르크스 형제Marx Brothers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또는 거세한 닭에서 빼낸 간 추출물을 먹고 암이 치유되었다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암은 자연적으로 완화될 수도 있고, 실제로 암이 저절로 완화되는 경우도 있다. 또는 잘못 진단했을 수도 있다. 또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일화들이 아니라 통제된 실험들이다. 올바로 진단한 암 환자 100명을 뽑아서 25명에게는 마르크스 형제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게 하고, 25명에게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를 보여 주고, 25명에게는 뉴스를 보게 하고, 25명에게는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서 각 피험자 군에서 나타나는 해당 암 유형의 평균 완화율을 도출한 다음, 그 값들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통계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만일 뜻밖에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면, 기자 회견을 열어 암을 치유하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았다고 공표하기에 앞서, 우리가 한 실험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실험을 수행한 다른 과학자들로부터 확증을 받는 것이 낫다. 



※ SKEPTIC vol.4 "비판적 사고를 가로막는 29가지 사고 오류" 기사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스켑틱 4호 진화하는 진화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