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인문학의 부흥과 함께 사주명리학이 큰 인기를 누렸다. 《명리, 운명을 읽다》의 저자 강헌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여기에 학문적인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수십 개의 트렌드의 탄생과 소멸이 횡행하는,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명리학이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사주명리학은 트렌드를 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의 저자 고미숙의 말처럼, 과연 사주명리학은 “자신의 존재를 우주적 인과 속에서 보는 삶의 기술”일까?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사주명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재인 강사는 사주명리학에 합리적 근거가 존재하는지 물으며 사주명리학 형성의 역사를 추적한다.
사주명리학, 근거는 있는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사주명리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운명이란 인생의 우주적 변곡선”1과 다르지 않다면서 사주 “팔자를 본다는 건 내 안의 우주적 흐름을 보는 것”2이라는 주장, 사주명리학이 “인간과 우주의 관계, 인간 그 자체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혜안을 던져주는 합리적인 학문”3이라는 주장, 사주는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장소, 그 시각의 우주의 에너지를 표현한 것”4이라는 주장 등을 서슴지 않는다.
이때 우주는 꼭 천문학적 의미가 아니라 하늘, 천지, 자연 등을 포괄하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주명리학은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된다. 그러한 전제는 전한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론이나 후한의 사상가 왕충王充의 자연정명론 등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사주 풀이는 출생 연월일시를 나타내는 연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 즉 사주四柱를 구성하는 여덟 글자의 간지干支를 해석함으로써 타고난 우주의 기운을 파악하여 운명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을 일종의 공리로 받아들이더라도, 사주명리학이 합리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주 여덟 글자의 간지가 우주의 기운을 나타낸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사주 풀이가 실제 삶에 적용되는 원리, 즉 간지 상호 간의 논리와 삶의 연관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가장 기본적인 증명을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다. 입증은커녕 논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인문학적 상상력과 지식을 동원하여 무리한 주장을 진지하게 펼친다. 사주명리학의 정교한 논리 체계에 매료되어 이성이 마비된 것일까? 아니면 사주명리학에는 증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한 근거가 존재하는 것일까?
사주명리학의 생명력은 합리성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
사주명리학의 핵심 이론은 음양론, 오행론, 간지론, 십성론十星論, 용신론用神論 등이다. 음양론과 오행론 그리고 간지론은 춘추 전국 시대부터 진한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주명리학과 무관하게 형성된 고대 중국인의 자연철학이며 사유 방식이다. 사주명리학은 그런 요소들을 차용하고 변용하면서 운명을 추론하는 정교한 술수로 발전한 것이다.
사주명리학 고유의 이론은 음양오행과 생극生剋에 따른 간지의 관계를 논하는 십성론과 길흉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용신론이다. 그런데 관계와 중화中和에 관한 철학적 의미의 깊이는 있지만, 십성론과 용신론 역시 글자들 사이의 이론이다. 그것이 실제 삶에서 작용한다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바둑이 아무리 인생의 축소판이어도 바둑판 위의 돌이 바둑 두는 사람의 인생에서 무슨 작용을 하겠는가.
결국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사주명리학의 전제를 인정하더라도, 간지가 우주의 기운을 나타낸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또 그것을 증명하더라도 사주를 풀이하는 글자들 사이의 이론과 실제 삶의 연관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사주명리학의 모든 논리는 아무리 정교해도 공중누각일 수밖에 없다. 사주명리학 신봉자들이 선현들의 지혜, 직관, 도, 동양의 신비, “동양의 성격학”18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이 공중에 떠 있는 누각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주 풀이가 실제 삶에 부합된다면 그 이론은 실증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아전인수 격인 간명 사례들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반례 앞에서 효력을 잃어 어떤 이론도 입증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이나 관점에 좌우되지 않는 사주 풀이의 논리적 정합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주에 각인각색의 풀이가 있을 뿐이다. 용신의 경우 역술가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으며 아예 용신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심지어 세수歲首 및 야자시夜子時 입장에 따라 사주 명식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사주명리학은 합리성을 토대로 성립된 학문이 아니다. 고미숙이 말하는 “자신의 존재를 우주적 인과 속에서 보는 삶의 기술”19은 인문학 과잉이 빚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강헌은 “만약 여기에 학문적인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수십 개의 트렌드의 탄생과 소멸이 횡행하는,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명리학이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20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주명리학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아 있는 것은 합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운명을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합리성 여부를 떠나서 사주명리학이 다양한 통변으로 운명에 대한 궁금증과 답답함을 잠시나마 해소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주명리학의 생명력은 우주적 인과나 합리성 따위의 분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습卑濕한 기토己土가 되어 고단한 삶에 조금이라도 위로와 희망을 주는 데 있다. 간신히 미신의 오명을 벗고 양지로 나온 사주명리학에 분칠한 가면을 씌울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배우고 즐기는 문화 자산으로 전승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스켑틱 27호에서 만나보세요
-간지: 우주의 기운인가, 인간의 발상인가
-우주의 기운을 포기한 간지기년법
-일간은 왜 ‘존재의 축’인가
-월간과 시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오행 배속의 임의성
스켑틱 27호 노화에 도전하는 과학
글 이재인
전남대학교 독문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공대(TU Berlin) 인 문학부에서 독일어 교육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남대학교 독문과 강사로 재직 하면서 틈틈이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사주명리학을 강의하고 있다.
몇 해 전 인문학의 부흥과 함께 사주명리학이 큰 인기를 누렸다. 《명리, 운명을 읽다》의 저자 강헌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여기에 학문적인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수십 개의 트렌드의 탄생과 소멸이 횡행하는,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명리학이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사주명리학은 트렌드를 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의 저자 고미숙의 말처럼, 과연 사주명리학은 “자신의 존재를 우주적 인과 속에서 보는 삶의 기술”일까?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사주명리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재인 강사는 사주명리학에 합리적 근거가 존재하는지 물으며 사주명리학 형성의 역사를 추적한다.
사주명리학, 근거는 있는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이 사주명리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운명이란 인생의 우주적 변곡선”1과 다르지 않다면서 사주 “팔자를 본다는 건 내 안의 우주적 흐름을 보는 것”2이라는 주장, 사주명리학이 “인간과 우주의 관계, 인간 그 자체의 본질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혜안을 던져주는 합리적인 학문”3이라는 주장, 사주는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장소, 그 시각의 우주의 에너지를 표현한 것”4이라는 주장 등을 서슴지 않는다.
이때 우주는 꼭 천문학적 의미가 아니라 하늘, 천지, 자연 등을 포괄하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주명리학은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된다. 그러한 전제는 전한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의 천인감응론이나 후한의 사상가 왕충王充의 자연정명론 등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사주 풀이는 출생 연월일시를 나타내는 연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 즉 사주四柱를 구성하는 여덟 글자의 간지干支를 해석함으로써 타고난 우주의 기운을 파악하여 운명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을 일종의 공리로 받아들이더라도, 사주명리학이 합리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주 여덟 글자의 간지가 우주의 기운을 나타낸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사주 풀이가 실제 삶에 적용되는 원리, 즉 간지 상호 간의 논리와 삶의 연관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가장 기본적인 증명을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다. 입증은커녕 논증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인문학적 상상력과 지식을 동원하여 무리한 주장을 진지하게 펼친다. 사주명리학의 정교한 논리 체계에 매료되어 이성이 마비된 것일까? 아니면 사주명리학에는 증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한 근거가 존재하는 것일까?
사주명리학의 생명력은 합리성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
사주명리학의 핵심 이론은 음양론, 오행론, 간지론, 십성론十星論, 용신론用神論 등이다. 음양론과 오행론 그리고 간지론은 춘추 전국 시대부터 진한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주명리학과 무관하게 형성된 고대 중국인의 자연철학이며 사유 방식이다. 사주명리학은 그런 요소들을 차용하고 변용하면서 운명을 추론하는 정교한 술수로 발전한 것이다.
사주명리학 고유의 이론은 음양오행과 생극生剋에 따른 간지의 관계를 논하는 십성론과 길흉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용신론이다. 그런데 관계와 중화中和에 관한 철학적 의미의 깊이는 있지만, 십성론과 용신론 역시 글자들 사이의 이론이다. 그것이 실제 삶에서 작용한다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바둑이 아무리 인생의 축소판이어도 바둑판 위의 돌이 바둑 두는 사람의 인생에서 무슨 작용을 하겠는가.
결국 인간이 태어날 때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는 사주명리학의 전제를 인정하더라도, 간지가 우주의 기운을 나타낸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고, 또 그것을 증명하더라도 사주를 풀이하는 글자들 사이의 이론과 실제 삶의 연관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사주명리학의 모든 논리는 아무리 정교해도 공중누각일 수밖에 없다. 사주명리학 신봉자들이 선현들의 지혜, 직관, 도, 동양의 신비, “동양의 성격학”18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이 공중에 떠 있는 누각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주 풀이가 실제 삶에 부합된다면 그 이론은 실증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아전인수 격인 간명 사례들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반례 앞에서 효력을 잃어 어떤 이론도 입증하지 못한다. 개인의 경험이나 관점에 좌우되지 않는 사주 풀이의 논리적 정합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주에 각인각색의 풀이가 있을 뿐이다. 용신의 경우 역술가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으며 아예 용신 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심지어 세수歲首 및 야자시夜子時 입장에 따라 사주 명식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사주명리학은 합리성을 토대로 성립된 학문이 아니다. 고미숙이 말하는 “자신의 존재를 우주적 인과 속에서 보는 삶의 기술”19은 인문학 과잉이 빚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강헌은 “만약 여기에 학문적인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수십 개의 트렌드의 탄생과 소멸이 횡행하는,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명리학이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20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주명리학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아 있는 것은 합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운명을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다. 합리성 여부를 떠나서 사주명리학이 다양한 통변으로 운명에 대한 궁금증과 답답함을 잠시나마 해소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주명리학의 생명력은 우주적 인과나 합리성 따위의 분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습卑濕한 기토己土가 되어 고단한 삶에 조금이라도 위로와 희망을 주는 데 있다. 간신히 미신의 오명을 벗고 양지로 나온 사주명리학에 분칠한 가면을 씌울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배우고 즐기는 문화 자산으로 전승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스켑틱 27호에서 만나보세요
-간지: 우주의 기운인가, 인간의 발상인가
-우주의 기운을 포기한 간지기년법
-일간은 왜 ‘존재의 축’인가
-월간과 시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오행 배속의 임의성
스켑틱 27호 노화에 도전하는 과학
글 이재인
전남대학교 독문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공대(TU Berlin) 인 문학부에서 독일어 교육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남대학교 독문과 강사로 재직 하면서 틈틈이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사주명리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