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잡힌 삶이 항상 좋다는 환상




많은 사람들은 균형이 항상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균형을 잃었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일하고 있거나, 삶의 기쁨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지라도) 자명하다. 선택 가능한 것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두루 파악해서 균형을 잡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철학적 관점에서 삶의 균형이라는 주제는 상당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빌려온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이상인 중용을 설명하기 위해 걸작을 만드는 공예가에 비유한다. 그는 회화나 공예에서 탁월함은 작품에 넣거나 뺄 것이 없을 때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더하거나 덜어내는 작업이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범함의 반의어인 위업은 평형 상태에서 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균형과 목적, 미덕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중에서 오늘날 균형을 생활철학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실리콘밸리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21세기 시민은 항상 철저한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식습관과 운동, 소비와 직장생활 등을 수치화해서 균형을 맞추는 사람들이다. 완벽한 삶이란 소득, 즐거움, 여가, 수명 등 모든 영역의 산출물을 정밀하게 설계하고 관리하는 생활이다. 그런데 이런 최상의 도구들을 이용해서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할 때 나쁜 점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부지런한 생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설계한다는 표현engineering metaphor 자체를 문제 삼는다. 모든 기술에는 투입과 산출에 대한 일련의 가정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시스템에 무엇을 집어넣을 것인가, 어떤 결과가 나와야 하는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최상의 프로세스는 무엇인가 등을 고민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계가 철학적이기도 한데, 일련의 가치를 자동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는지에 관해 기본적인 판단을 수반한다.


《하퍼스 매거진》에 실린 ‘와퍼의 나라Home of the Whopper’라는 글에서 에세이스트 토마스 프랭크는 미국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식당 체인점들을 수많은 성분을 고르게 배합해서 균형 잡힌 제품을 생산하는 비인간적이고 안정적인 무결점 기술로 묘사했다. “모듈형 구조, 조립 라인을 이용한 음식 서비스, 바구니 한 쌍이 붙어 있는 튀김기, 대형 조미료통, 끝을 안으로 접으면 흘리지 않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플라스틱 컵 뚜껑까지, 이것들은 모두 인간 독창성의 승리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렇게 극대화된 효율성은 연료, 에어컨, 토지, 쓰레기 매립지 등 다른 부문에서는 엄청난 낭비를 초래했다. 사회통념의 틀 안에서 보면 산업공학의 걸작이지만, 그 틀 밖에서 보면 거기에는 그저 소모되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과 사람이 있었다.”


사회통념의 틀 안에서 시스템은 기계화된 공예 장인처럼 완벽성을 추구하며 움직인다. 모든 성분을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조절한다. 서비스 지연이나 쓰레기 같은 각종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처리되고 개선된다. 하지만 사회통념의 틀 밖에서는 수치로 표현되지 않은 낭비가 보인다. 균형을 잡는 작업에 없어도 되는 재료들이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스템에 균형이 잡혀야 정확하다고 전제하므로, 균형을 당연히 좋은 것으로 여긴다. 즉 수단을 잘 선택하고 과업을 적절히 조절하면 바람직한 결과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완벽하게 조작할수록, 시스템의 가치와 그 시스템이 제공하는 성과가 우리의 기대는 물론 올바른 생각을 가진 모든 시민의 바람과 더욱 비슷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구하는 것이 미덕이 되는 목적(특히 자기 계발과 자율성 향상)과 그렇지 않은 목적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그런데 그의 철학은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라이프 스타일로 제안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현대 사회에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나중에 등장한 한 사상가에게는 그런 문제가 없는데, 그의 업적은 모든 시스템의 한계를 격렬하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특히 과거에는 신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공허감을 채우는 문제에서 과학과 기술이 부적합하다고 지적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평생 실명에 가까운 시력 장애와 편두통에 시달렸고, 한 번 쓰러지면 몇 주 동안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병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심오한 철학은 대부분 여러 날 동안 알프스를 산책하다 충만해진 숭고한 감정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다. 니체 평전 《나는 다이너마이트와 같다!I am Dynamite!》에서 수 프리도는 니체의 불안정한 삶을 파괴와 재생이라고 표현했다. “니체는 병에 걸릴 때마다 하데스에 떨어진 것처럼, 즉 죽음을 느꼈다. 그에게 회복은 반가운 재탄생이자 부활이었다. 이런 존재 방식이 니체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노이슈메켄Neuschmecken('새로운 맛'이라는 독일어)’은 그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잠깐 동안이지만 회복될 때마다 세상은 새롭게 빛났다. 그때마다 니체는 새롭게 태어났을 뿐 아니라 세상도 새로운 세상이 되었고, 그런 세상에는 새로운 답이 필요한 새로운 문제들이 있었다.


니체의 철학은 균형이나 조화가 아닌 창조적 파괴였다. 그는 정답이나 해결책을 거부했기에 그의 글들은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말 줄임표로 끝을 맺었다.《이 사람을 보라》서문에서 니체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해하고 삶의 원리로 삼는 철학은 빙판과 고산에서 자발적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낯설고 미심쩍은 모든 존재를, 지금까지 도덕 체계에 의해 추방되어왔던 모든 것을 찾는 삶이다. 그것은 정말로 고된 삶이었다. 답을 거부하고 확고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니체의 태도는 그를 제대로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을 큰 수혜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니체는 평생 작업했던 글에서 질문을 막는 모든 시스템은 수상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과학적 확실성에 근거해서 질문을 하지 못하게 했던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이 뭐가 문제일까? 균형에 우선순위와 가치가 포함되고, 서로 경쟁할 수 있고, 틀림없이 그러리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실리콘밸리가 삶을 계량화하는 기술을 개발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날 평형 상태가 유지되도록 돕는 최고 수준의 시스템은 중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국가 감시체계는 점점 모든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중국은 알고리즘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승인된 행위로 승인되지 않은 행위를, 애국적 행위로 비애국적 행위를 상쇄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가까운 미래를 예상해 보면, 모든 시민은 통합된 사회 신용시스템으로 늘 평가받게 될 것이다. 이 시스템은 개인의 여행 정보, 구매 이력, 각종 활동 내역 등을 통합해서 관리한다. 사회 신용시스템이 의도한 결과는 균형 잡힌 나라에서 모든 국민이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괜찮은 원칙이다. 단 그 원칙의 정당성을 모든 시민이 전제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각종 시스템과 도덕 원리를 자동화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니체는 적어도 이것 한 가지에는 동의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행위 및 집단행동의 중요성에 관해 토론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사회통념의 틀이 어떤 것이든 결국은 감옥이 되고 만다.



뉴필로소퍼 8호 균형잡힌 삶을 산다는 것




글_톰 챗필드


기술철학자·작가. 영국의 작가이자 방송인으로 옥스퍼드 인터넷연구소 객원 부교수, 글로벌 거버넌스연구소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전 세계의 과학기술을 다루는 사이트 BBC 퓨처의 초기 기고자였으며, 과학기술·예술·미디어 등을 주제로 세계 곳곳에서 강연한다. 저서로는 《인터넷 언어의 유래》 《이 책대로 살아봐》 《인생학교│시간-디지털 시대에 살아남는 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