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인간 불확실성의 근원, 우주



※ 이 글은 생활철학잡지 뉴필로소퍼 15호 '우주를 생각한다' 중 <인간 불확실성의 근원, 우주>를 발췌하여 가공한 것입니다.



1957년 10월 말, 블라디미르 야즈도프스키 박사는 세 살짜리 암컷 강아지 한 마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고 왔다. 그 강아지는 다행히 자녀들과도 잘 어울려 놀았다. 이 떠돌이 개는 모스크바 거리에서 발견된 얌전한 믹스견이었고, 야즈도프스키 박사는 이 개와 다른 암컷 두 마리를 특수 임무에 대비해 훈련시키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떠돌이 개가 선택된 이유는 튼튼하기 때문이고, 암컷이 선택된 이유는 뒷다리를 들지 않기 때문이다. 수컷처럼 뒷다리를 들면 임무를 수행하는 환경에서 불리했을 것이다. 나중에 야즈도프스키 박사는 떠돌이 개를 집에 데려가기로 한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녀석에게 뭐라도 잘해주고 싶었답니다.” 떠돌이 개의 이름은 원래 쿠드랴브카(꼬마 곱슬이)였는데, 러시아의 한 라디오 쇼에 출연해 ‘멍멍’ 짖은 이후로 모두가 라이카(멍멍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라이카는 순하고 애교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1957년 11월 3일, 라이카는 우주선으로 개조된 탄도 미사일, 즉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로 날아갔다. 라이카는 혼자였고,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산소와 젤로 된 먹이를 공급받았다. 좁은 우주선 내부에서 앉고 서고 누울 수 있었지만 돌아설 수는 없었다. 우주선 발사 직전에 어느 여의사가 절차를 무시하고 몰래 라이카에게 먹이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 먹이를 먹었든 안 먹었든, 모스크바의 떠돌이 개 라이카는 우주에 간 최초의 지구 생명체가 되었다. 지구상의 두 종, 즉 인간은 알고 개는 영문도 모른 채, 두근거리는 마음을 우주로 쏘아 올렸다. 당시 사진을 보면, 땅거미가 지는 하늘 높이 우주선이 발사되는 순간 옅은 구름이 끼어 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거북이, 개, 원숭이, 파리, 쥐, 물고기, 마침내 사람까지 우주로 날려 보내며 한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미 8억 년 동안 우리는 변함없는 하늘 아래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했다. 다시 말하면, 헤엄치고 바닥을 기고 네 발로 걷다가 눕고 앉고 마침내 두 발로 걷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밤하늘을 올려다볼수록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진다. 어쩌면 늪지에서 바들대던 까마득한 옛 시절보다 지금이 더 불안할지도 모르겠다.


지적 충동 때문에, 달리 말하면 많이 추구할수록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알수록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아지는 지적 활동 끝에, 우리는 우주라는 커다란 난관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로 30만 년을 살아온 지금,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주에는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고, 설령 지금까지 관측된 모든 행성에 도달하더라도 생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지금쯤이면 하나의 분명한 징표 혹은 보편적 원리나 일관적 개념, 또는 플러그 앤 플레이 장치*처럼 확실한 뭔가를 우주에서 얻을 만하지 않은가? 뭐든 기막히게 실용적인 도구라도 하나 나와야 한다는 소리다. 우주의 비밀을 파헤치는 동안, 우리는 계산 공식이 빼곡히 적힌 칠판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쓸모 있는 그 ‘무엇’을 요구할 자격을 갖췄다. 우주 비행견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 달에서 골프를 치는 것쯤은 이제 겨우 우리가 지구 밖으로 고개를 아주 조금 내밀었다는 사실을 풍자한다.

* 시스템에 연결만 하면 바로 사용 가능한 주변 기기.


그렇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문제가 훨씬 복잡해진다. 지금보다 더 많은 질문을 하는 것부터가 골치 아픈 일인데다, 우주를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구체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과학적인 존재로서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는 계산상 기껏해야 5퍼센트뿐이다. 하지만 관측이 가능한 부분만 어림잡아도 2조 개의 별자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야심만만한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가 지금까지 거둔 성과는,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가 별자리를 단편적으로 연구해서 그 별의 개수만큼 많은 보도자료를 발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주라는 무대는 신화의 세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영역으로 입지가 바뀌었다. 우주는 마치 신기한 경험을 하기 위해 방문객이 몰려드는 박람회장과도 같다. 우리가 우주를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암석과 가스’, ‘파동과 분화구’ 같은 비유적 표현 때문인데, 우주가 대단히 흥미롭고 귀중한 탐구의 대상이기는 해도 지금 당장 실천에 옮길 만한 아이디어를 구상할 정도로 연구 성과가 풍부한 분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만큼 성취한 것만 해도 다행이다. 과학은 또 다른 문제, 즉 우주가 단 하나가 아닐 가능성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라이카가 우주로 날아간 이후로 우리가 다중 우주의 일부분일 가능성이 점차 커졌고, 만약 다중 우주가 실재한다면 나머지 우주에서 우리가 속한 우주의 법칙이 똑같이 적용된다고 기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몇 개의 우주가 존재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티끌만큼 작은 부분을 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 된다. 몇몇 우주 모델은 우주가 무궁무진하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온갖 물리학적 의문을 초월해서 명백히 실존적 차원을 겨냥한 질문을 던져야만 단일 우주와 다중 우주 모델 모두에서 일관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질문은 지극히 단순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만약 이 질문의 대답이 단일 및 다중 우주 모델에서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우리가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우주를 탐사하면서 개를 희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문제가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비교적 가까운 우주라 해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물리적 범위를 넘어설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은하계의 지름에 따라 측정값에 오차가 있겠지만, 은하계 중심부로부터 녹음이 우거진 브루클린을 지나 맨해튼 중심지까지는 2만 7,000광년쯤 떨어져 있다고 한다. 1광년은 9조 4,600백억 킬로미터이고, 시속 70만 킬로미터로 비행하는 최신형 초고속 우주선으로 1광년을 이동한다면 우리 시간으로 1,500년이 조금 넘게 걸리므로, 내 계산대로라면 맨해튼에서 은하계 중간 지대까지 가는 데는 4,200만 년 남짓 걸린다. 광속으로 비행하는 우주선이 있다면 소요 시간을 2만 7,000년까지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수치들은 탁상공론일 뿐이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가까운 미래에도 우주가 우리 생각 속에만 존재하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생각은 바라는 대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한때 점성술로 운세를 점쳤지만, 지금은 이론을 따른다. 모든 게 결국 우리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라는 유아론적 사고도 그중 하나다. 마치 공간이 시간을 거스르듯, 우리가 어떻게 과학을 거슬러 신화의 세계로 되돌아가는지 보라. 우리가 예기치 못한 발견을 감내하면서까지 갈망하는 것은 애초에 우리의 질문이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둔다는 뜻이다. 우주는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도 어느 시점에서는 우주가 자신의 비밀을 감춰버린다고 주장했다.



우주를 향한 인간의 경외심은

태초부터 뼈에 사무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용하는 보호막일지도 모른다.



우주는 인간 불확실성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난관이다. 우리가 우주를 경외시하며 탐구하는 것은 드넓은 우주에 오직 우리뿐이라는 단 하나의 명백한 발견에 대처하는 방어책이다. 우주를 향한 인간의 경외심은 태초부터 뼈에 사무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용하는 보호막일지도 모른다. 수치를 살펴보자. 우리가 관측한 우주의 지름은 약 930억 광년이다. 지금 200억 광년 이상 떨어진 물체에서 방출된 빛은 지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정말 경이로운 사실이지만 메마르고 공허한 사실이기도 하다. 이것은 웃음이나 장작 때는 향과는 전혀 다르고 눈물과도 다르다.


라이카가 출발하던 날 아침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우주선 해치가 봉인되기 직전에, 연구원 한 명이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숙여 라이카의 콧등에 키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장면이야말로 한결 따뜻한 웃음과 온기를 대변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우주와 관련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인간성에서 우러나오는 이런 행동은, 그 어떤 물리학의 관찰법보다 복잡하고 생동감 넘친다.


우주가 넓다지만 우리도 대단한 존재다. 아마도 대기권 안팎을 오가는 우리의 마음이 지구와 우주를 나누는 경계선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구와 우주를 똑같이 열정적으로 관찰한다. 밖으로 시선을 돌릴 때, 우리는 지구에서의 삶을 너무 소홀히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한 까마득한 거리감에 직면한다. 한편 안을 들여다보면, 우주의 별들만큼 선명히 밤하늘에 떠도는 힘의 소용돌이와 맞닥뜨리게 되고, 그 힘은 외계의 삶도 지나치지 말고 높이 올려다보라고 충고한다.


그러므로 해답은 안과 밖이 만나는 지점 어딘가에 있다.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본 끝에 우리는 깨달았다. 진공 상태의 골디락스 존*이 없다면 그리고 완벽한 조건을 갖춘 행성이 그 안에 없다면,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다중 우주 속에 존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고향처럼 포근하고 이상적인 우주였을 것이다.

* 지구상의 생명체가 거주하기에 적합한 우주 영역.


라이카는 우주 궤도에 오른 최초의 지구 생명체였지만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 이 프로젝트를 이끈 과학자 올레그 가젠코는 한때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40년 후에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라이카에게 더 미안해요.”


삶은 내부와 외부가 교차할 때 계속된다. 이 교차점에서 항상 모든 일은 위태롭고 삶 자체는 절박하며 목표 지향적인 행동이 다 그렇듯 우연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뜻하지 않게 칠판을 수식으로 가득 채우는 해답이 도출된다. 인간은 그만큼 억세게 ‘운이 좋다’. 어쩌면 운이 지능을 이기는 모양이다.



뉴필로소퍼 15호 우주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