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 신화》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신들은 시시포스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 바위는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떨어지곤 했다. 신들은 어떤 이유로든 무익하고 절망적인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했다.
호메로스의 말에 따르면,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전통에 따르면, 그는 노상강도가 직업이었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그가 지옥에서 무익한 노동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무엇보다 그는 신들을 대하는 데 경솔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훔쳤던 것이다.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는 제우스에게 납치되었다. 아소포스는 딸의 실종에 충격을 받아 시시포스에게 불평을 했다. 이 납치 사건을 알고 있던 시시포스는 아소포스에게 코린트 성채에 물을 대어주는 조건으로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하늘의 노여움보다 물의 축복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이 일로 지옥에서 형벌을 받게 되었다. 호메로스는 또 시시포스가 사신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후대에 전해준다. 저승의 신 하데스는 황량하고 고요한 그의 왕국의 모습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정복자의 손에서 사신을 해방시켰다.
또 시시포스는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분별없이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보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시신을 묻지 말고 공공 광장 한복판에 내던지라고 명령했다. 시시포스는 지옥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그는 인간적인 사랑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아내의 복종에 화가 난 나머지, 아내를 벌하기 위해 지상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데스에게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다시 이 세상의 모습을 보고 물과 태양, 따듯한 돌들과 바다를 즐기게 되자, 시시포스는 더 이상 지옥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차례의 소환, 분노, 경고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굽어 있는 만과 반짝이는 바다, 대지의 미소를 마주하며 살았다. 결국 신들의 판결이 내려졌다.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가 찾아와 이 발칙한 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의 즐거움을 빼앗은 후에 강제로 그를 지옥으로 돌려보냈다. 그곳에는 그를 위해 바위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시시포스가 부조리한 영웅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그의 고문뿐 아니라 열정 때문에도 부조리한 영웅인 것이다. 그는 신들에 대한 경멸, 죽음에 대한 증오, 삶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일에 온 존재를 바쳐야 하는 형용하기 힘든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지상에 대한 열정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다. 지옥에 있는 시시포스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전해진 바가 없다. 신화란 상상력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만든 것이다. 이 신화에서는 단지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려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 반복하느라 긴장된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엉망이 된 얼굴, 바위에 밀착된 뺨, 진흙으로 덮인 바윗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 바위를 고정시키는 다리, 다시 시작하려고 뻗는 팔, 흙투성이인 두 손의 아주 인간적인 방어 수단 등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그의 기나긴 노력 끝에 마침내 목표가 달성된다. 그리고 시시포스는 바위가 다시 몇 분 만에 저 아래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광경을 본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산 정상을 향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그는 다시 평지로 내려간다.
내가 시시포스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정상에서 돌아오는, 잠시 멈춘 시간 때문이다. 바위에 바싹 대고 힘들어하는 얼굴은 이미 그 자체가 돌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침착한 발걸음으로 결코 끝을 알지 못하는 고통을 향해 다시 내려가는 모습을 본다. 그의 고통만큼이나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 정상을 떠나 점점 신들의 은신처를 향해 내려가는 이 시간, 매 순간 시시포스는 그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만약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영웅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지탱해준다면, 그가 왜 고통스럽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일생 동안 매일 같이 똑같은 일을 하는데, 그의 운명도 시시포스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에만 비극적일 뿐이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시포스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체적 상황을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조건이다. 그의 고통을 이루는 통찰력이 동시에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경멸로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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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떤 날에는 시시포스가 슬퍼하며 산에서 내려온다면, 때로는 기뻐하면서 내려올 수도 있다. 이 말은 과언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나는 바위로 되돌아가는 시시포스를 상상해 본다. 처음에는 슬픔이 있었다. 지상의 모습이 기억 속에 너무 생생하고 행복의 부름이 너무 집요할 때, 시시포스의 마음속에서는 비애가 싹틀 것이다. 이것은 바위의 승리이자 바위 그 자체이다. 한없는 슬픔은 너무 무거워서 견디기가 힘들다. 이것은 우리가 맞이하는 겟세마네의 밤이다. 그러나 참혹한 진실도 인정하고 나면 소멸된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운명에 복종한다. 하지만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래도 그 순간에 눈멀고 절망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세상에 연결시키는 유일한 끈이 한 소녀의 침착한 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자 굉장한 말이 울려 퍼진다.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지긋한 나이와 고귀한 영혼 덕분에 내가 판단하기로 모든 일이 잘되었도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도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와 마찬가지로 부조리가 승리하는 비결을 제시한다. 고대의 지혜가 현대의 영웅주의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누구라도 부조리를 발견하면 행복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뭐라고! 이렇게 좁은 길을 통해서?” 그러나 세상은 오직 하나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에서 나온 두 아들이다. 이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행복이 반드시 부조리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면 잘못일 것이다. 내 발견으로는, 부조리의 감정이 오히려 행복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오이디푸스는 “내가 판단하기로 모든 일이 잘되었다”라고 말했고,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거칠고 유한한 세계 속에서 메아리친다. 이 말은 모든 것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 말은 이 세계에 불만과 헛된 고통의 취미를 끌어들인 신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한다. 이 말은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즉 인간들끼리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든다.
시시포스의 모든 말 없는 기쁨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갑자기 침묵을 되찾은 우주 안에서 경탄하는 수많은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용솟음친다. 무의식적이고 비밀스러운 부름, 모든 얼굴들의 초대인 그것들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자 대가다. 그림자가 없는 태양이란 없으므로, 밤을 아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부조리한 인간은 긍정적으로 대답하고, 그 후로 그의 노력은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더라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고, 또는 적어도 불가피하고 경멸할 만하다고 결론내릴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에 부조리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그 미묘한 순간, 시시포스는 그의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고,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이 창조하고 기억의 시선으로 합쳐진, 머지않아 그의 죽음으로 봉인될 그의 운명을 이루는 일련의 무관한 행동들을 숙고한다. 이렇듯이 인간적인 모든 일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기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밤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열렬히 찾고 싶어 하는 이 눈먼 자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여전히 굴러떨어지고 있다.
나는 시시포스를 산 아래에 남겨둔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쳐준다. 그 역시도 모든 일이 잘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지나 쓸모없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그 어둠 가득한 산의 광물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을 향한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알베르 카뮈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봐야 한다.
─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 신화》(1942년) 중에서
※ 이 글은 뉴필로소퍼 VOL. 13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중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를 부분 발췌하여 재가공한 것입니다.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 신화》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신들은 시시포스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 바위는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떨어지곤 했다. 신들은 어떤 이유로든 무익하고 절망적인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했다.
호메로스의 말에 따르면,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전통에 따르면, 그는 노상강도가 직업이었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그가 지옥에서 무익한 노동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무엇보다 그는 신들을 대하는 데 경솔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훔쳤던 것이다.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는 제우스에게 납치되었다. 아소포스는 딸의 실종에 충격을 받아 시시포스에게 불평을 했다. 이 납치 사건을 알고 있던 시시포스는 아소포스에게 코린트 성채에 물을 대어주는 조건으로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하늘의 노여움보다 물의 축복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이 일로 지옥에서 형벌을 받게 되었다. 호메로스는 또 시시포스가 사신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후대에 전해준다. 저승의 신 하데스는 황량하고 고요한 그의 왕국의 모습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정복자의 손에서 사신을 해방시켰다.
또 시시포스는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분별없이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보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시신을 묻지 말고 공공 광장 한복판에 내던지라고 명령했다. 시시포스는 지옥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그는 인간적인 사랑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아내의 복종에 화가 난 나머지, 아내를 벌하기 위해 지상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데스에게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다시 이 세상의 모습을 보고 물과 태양, 따듯한 돌들과 바다를 즐기게 되자, 시시포스는 더 이상 지옥의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수차례의 소환, 분노, 경고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굽어 있는 만과 반짝이는 바다, 대지의 미소를 마주하며 살았다. 결국 신들의 판결이 내려졌다.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가 찾아와 이 발칙한 자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의 즐거움을 빼앗은 후에 강제로 그를 지옥으로 돌려보냈다. 그곳에는 그를 위해 바위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시시포스가 부조리한 영웅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그의 고문뿐 아니라 열정 때문에도 부조리한 영웅인 것이다. 그는 신들에 대한 경멸, 죽음에 대한 증오, 삶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일에 온 존재를 바쳐야 하는 형용하기 힘든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지상에 대한 열정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다. 지옥에 있는 시시포스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전해진 바가 없다. 신화란 상상력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만든 것이다. 이 신화에서는 단지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려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 반복하느라 긴장된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엉망이 된 얼굴, 바위에 밀착된 뺨, 진흙으로 덮인 바윗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 바위를 고정시키는 다리, 다시 시작하려고 뻗는 팔, 흙투성이인 두 손의 아주 인간적인 방어 수단 등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그의 기나긴 노력 끝에 마침내 목표가 달성된다. 그리고 시시포스는 바위가 다시 몇 분 만에 저 아래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광경을 본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산 정상을 향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그는 다시 평지로 내려간다.
내가 시시포스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정상에서 돌아오는, 잠시 멈춘 시간 때문이다. 바위에 바싹 대고 힘들어하는 얼굴은 이미 그 자체가 돌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침착한 발걸음으로 결코 끝을 알지 못하는 고통을 향해 다시 내려가는 모습을 본다. 그의 고통만큼이나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 정상을 떠나 점점 신들의 은신처를 향해 내려가는 이 시간, 매 순간 시시포스는 그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만약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영웅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지탱해준다면, 그가 왜 고통스럽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일생 동안 매일 같이 똑같은 일을 하는데, 그의 운명도 시시포스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에만 비극적일 뿐이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시포스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체적 상황을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조건이다. 그의 고통을 이루는 통찰력이 동시에 그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경멸로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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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떤 날에는 시시포스가 슬퍼하며 산에서 내려온다면, 때로는 기뻐하면서 내려올 수도 있다. 이 말은 과언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나는 바위로 되돌아가는 시시포스를 상상해 본다. 처음에는 슬픔이 있었다. 지상의 모습이 기억 속에 너무 생생하고 행복의 부름이 너무 집요할 때, 시시포스의 마음속에서는 비애가 싹틀 것이다. 이것은 바위의 승리이자 바위 그 자체이다. 한없는 슬픔은 너무 무거워서 견디기가 힘들다. 이것은 우리가 맞이하는 겟세마네의 밤이다. 그러나 참혹한 진실도 인정하고 나면 소멸된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운명에 복종한다. 하지만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래도 그 순간에 눈멀고 절망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세상에 연결시키는 유일한 끈이 한 소녀의 침착한 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자 굉장한 말이 울려 퍼진다. “그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지긋한 나이와 고귀한 영혼 덕분에 내가 판단하기로 모든 일이 잘되었도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도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와 마찬가지로 부조리가 승리하는 비결을 제시한다. 고대의 지혜가 현대의 영웅주의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누구라도 부조리를 발견하면 행복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뭐라고! 이렇게 좁은 길을 통해서?” 그러나 세상은 오직 하나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에서 나온 두 아들이다. 이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행복이 반드시 부조리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면 잘못일 것이다. 내 발견으로는, 부조리의 감정이 오히려 행복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오이디푸스는 “내가 판단하기로 모든 일이 잘되었다”라고 말했고,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거칠고 유한한 세계 속에서 메아리친다. 이 말은 모든 것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 말은 이 세계에 불만과 헛된 고통의 취미를 끌어들인 신을 이 세계로부터 추방한다. 이 말은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즉 인간들끼리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든다.
시시포스의 모든 말 없는 기쁨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갑자기 침묵을 되찾은 우주 안에서 경탄하는 수많은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용솟음친다. 무의식적이고 비밀스러운 부름, 모든 얼굴들의 초대인 그것들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자 대가다. 그림자가 없는 태양이란 없으므로, 밤을 아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부조리한 인간은 긍정적으로 대답하고, 그 후로 그의 노력은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더라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고, 또는 적어도 불가피하고 경멸할 만하다고 결론내릴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에 부조리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그 미묘한 순간, 시시포스는 그의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고,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이 창조하고 기억의 시선으로 합쳐진, 머지않아 그의 죽음으로 봉인될 그의 운명을 이루는 일련의 무관한 행동들을 숙고한다. 이렇듯이 인간적인 모든 일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기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밤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열렬히 찾고 싶어 하는 이 눈먼 자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여전히 굴러떨어지고 있다.
나는 시시포스를 산 아래에 남겨둔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밀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쳐준다. 그 역시도 모든 일이 잘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지나 쓸모없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그 어둠 가득한 산의 광물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을 향한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알베르 카뮈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봐야 한다.
─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 신화》(1942년) 중에서
※ 이 글은 뉴필로소퍼 VOL. 13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중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를 부분 발췌하여 재가공한 것입니다.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