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것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
톰 챗필드 (기술철학자, 작가)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아, 이 상황이 터무니없다는 걸 나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 상황에 휘말렸고,
이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자 주인공인 의사가 한 말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1947년에 출간된 카뮈의 소설을 읽는 새로운 독자들이 생겨났다. 흑사병이 창궐한 알제리의 한 도시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그 초점이 처음에는 공무원의 기만과 대중의 불신에 맞춰졌다가 나중에는 평범했던 일상으로부터의 추방과 고립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나치 점령기에 대한 우화보다는 억압된 인간 정신에 대한 연구로 더 많이 읽힌다.
소설 속 카뮈의 어조는 침착하지만 등장인물들은 힘겹게 지혜를 얻는다. 이 소설에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단적인 죽음 앞에서 위안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이하게도) 목적, 품위, 희망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부조리는 카뮈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그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인간의 이성과 세상의 불합리한 침묵이 대립할 때” 부조리가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무한하고 무심한 우주에 이성과 의식이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우습다. 인간은 현실이 공급할 능력도, 관심도 없는 것들을 향해, 말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인간은 왜 그런 것들에 마음을 쓸까? 그리고 왜 그래야 할까?
시시포스가 바위를 언덕 위로 올리는 모습. 이미지 출처: 셔터 스톡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가 그 두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시시포스 왕은 살았을 때 신들을 속이고 배반한 대가로, 죽어서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 바위에는 제우스의 마법이 걸려 있어 결코 꼭대기까지 올릴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위는 늘 시시포스의 손에서 빠져나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신들은 자신의 운명을 앞질러 생각하려는 사람에게 벌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헛된 노동의 반복에 대한 비유가 만들어졌다.
알베르 카뮈
카뮈는 신화 속 이야기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지만, 거기에서 도출한 결론은 아주 달랐다. 시시포스가 받은 벌의 특징은 ‘부조리함’이다. 그의 운명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 영원히 수고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투쟁은 고통스럽지만 부정된다.
만약 모든 노동이 궁극적으로 헛되다는 가정으로 시작한다면, 그리고 노동의 대가가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갑자기 시시포스의 노역은 절망의 우화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설명으로 바뀐다. 누구나 죽음을 맞닥뜨린다. 우리가 밀어 올리는 모든 바위는 결국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우리는 부조리하다. 하지만 이런 부조리를 깨달아야 확실히 행복해질 수 있고, 무의미한 실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무언가로 목표를 재설정할 수 있다.
카뮈는 바위가 떨어진 후에 아래로 내려가는 시시포스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끝을 전혀 알 수 없는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침착한 걸음으로 내려가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고통의 순간처럼 어김없이 찾아오는 숨 돌릴 틈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은신처를 향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매 순간, 시시포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훌륭하다. 그는 바위보다 강하다. …… 신들의 프롤레타리아*, 시시포스는 무력하지만 반항적이며, 자신의 비참한 조건을 낱낱이 알고 있다. 바로 그 비참한 조건이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그가 생각한 내용이다.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혜안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이외에는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
이 마지막 문장에서 ‘혜안’은 문자 그대로 하면 ‘확고한 비전’으로 풀이할 수 있는 ‘통찰la clairvoyance’을 가리킨다. ‘통찰’은 시시포스가 거둔 성과다. 그가 자기 운명의 진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페스트》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 중 하나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시민들은 과부하가 걸린 마을 병원들을 돕기 위해 ‘보건대’라는 자원봉사 단체를 조직하는 문제를 의논한다.
카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반적으로 인간은 악하기보다 선하다. …… 하지만 인간은 좀 더 알거나 좀 더 모를 수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미덕 혹은 악덕이라 부른다. 가장 고치기 어려운 악덕은 자기가 전부 안다고 믿고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라는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다. 통찰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사랑도 있을 수 없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삶의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은 명료한 정신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이 끝없는 한계 속에서 투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카뮈는 이렇게 묻는다. 보건대원들은 칭찬받아 마땅할까? 이들을 칭찬하는 일은 2 더하기 2는 4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칭찬하는 경우와 같을까? 보건대원들의 행동이 영웅적이지는 않다. 그들은 그저 불가피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2 더하기 2는 4라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때가 온다.” 이따금 그저 눈앞에 있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이 마지막 감상을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차용했는데, 1949년에 출간된 그의 소설 《1984》는 카뮈의 비유를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그가 살고 있는 전체주의 국가에 저항한 죄로 고문을 받는다. 그의 고문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2 더하기 2는 5라는 주장을 인정하도록 강요받을 때였다.
“내가 손가락 몇 개를 들고 있지?” 고문자가 전기 충격기의 강도를 높이면서 그렇게 묻는다. 윈스턴이 고문을 멈추게 하려면 거짓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거짓말을 정말로 믿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마음대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 복종해야 한다. 이런 일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윈스턴은 사랑하라고 들은 것을 사랑하고, 증오하라고 들은 것을 증오하게 된다.
오웰과 카뮈의 소설은 둘 다 쓰라리게 경험한 억압을 경고한다(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즘에 대항해 싸웠고, 카뮈는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오웰이 두려움과 고통으로 무너진 인간의 정신을 보여줬다면, 카뮈는 공포 앞에서 침착한 인간의 생존 의지를 보여줬다.
《페스트》에서 의사는 봉쇄된 마을을 탈출하려고 노력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이 말 하나만 하고 싶군요. 이 모든 상황에 영웅적 행위는 나올 수 없어요. 이것은 품위의 문제예요. 이 말을 들으면 몇몇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페스트와 싸워 이길 유일한 방법은 품위를 잃지 않는 겁니다.”
삶에 궁극적 의미란 없다. 하지만 삶을 목적으로 채울 수는 있다.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살아야 한다면,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카뮈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던 1942년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높은 곳을 향한 투쟁 그 자체로 인간의 마음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 한다.
-알베르 카뮈
* 이 글은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중
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을 발췌하여 재가공한 것입니다.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글 톰 챗필드 Tom Chatfield
기술철학자·작가. 영국의 작가이자 방송인으로 옥스퍼드 인터넷연구소 객원 부교수,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전 세계의 과학기술을 다루는 사이트 <BBC 퓨처>의 초기 기고자였으며, 과학기술·예술·미디어 등을 주제로 세계 곳곳에서 강연한다. 저서로 《인터넷 언어의 유래》 《이 책대로 살아봐》 《인생학교 | 시간 —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 등이 있다.
번역 최이현
연세대학교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독서와 글쓰기에 마음을 뺏겨 십 년 가까이 다니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글밥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여자들에게, 문제는 돈이다》《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자본주의가 대체 뭔가요?》《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정치는 어떻게 시간을 통제하는가?》 등이 있으며, 계간지 《뉴필로소퍼》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한국어판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
톰 챗필드 (기술철학자, 작가)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아, 이 상황이 터무니없다는 걸 나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 상황에 휘말렸고,
이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알베르 카뮈, 《페스트》 중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자 주인공인 의사가 한 말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1947년에 출간된 카뮈의 소설을 읽는 새로운 독자들이 생겨났다. 흑사병이 창궐한 알제리의 한 도시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그 초점이 처음에는 공무원의 기만과 대중의 불신에 맞춰졌다가 나중에는 평범했던 일상으로부터의 추방과 고립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나치 점령기에 대한 우화보다는 억압된 인간 정신에 대한 연구로 더 많이 읽힌다.
소설 속 카뮈의 어조는 침착하지만 등장인물들은 힘겹게 지혜를 얻는다. 이 소설에는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단적인 죽음 앞에서 위안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이하게도) 목적, 품위, 희망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부조리는 카뮈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그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인간의 이성과 세상의 불합리한 침묵이 대립할 때” 부조리가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무한하고 무심한 우주에 이성과 의식이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우습다. 인간은 현실이 공급할 능력도, 관심도 없는 것들을 향해, 말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인간은 왜 그런 것들에 마음을 쓸까? 그리고 왜 그래야 할까?
시시포스가 바위를 언덕 위로 올리는 모습. 이미지 출처: 셔터 스톡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가 그 두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시시포스 왕은 살았을 때 신들을 속이고 배반한 대가로, 죽어서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 바위에는 제우스의 마법이 걸려 있어 결코 꼭대기까지 올릴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위는 늘 시시포스의 손에서 빠져나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신들은 자신의 운명을 앞질러 생각하려는 사람에게 벌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헛된 노동의 반복에 대한 비유가 만들어졌다.
알베르 카뮈
카뮈는 신화 속 이야기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지만, 거기에서 도출한 결론은 아주 달랐다. 시시포스가 받은 벌의 특징은 ‘부조리함’이다. 그의 운명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 영원히 수고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투쟁은 고통스럽지만 부정된다.
만약 모든 노동이 궁극적으로 헛되다는 가정으로 시작한다면, 그리고 노동의 대가가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갑자기 시시포스의 노역은 절망의 우화가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대한 설명으로 바뀐다. 누구나 죽음을 맞닥뜨린다. 우리가 밀어 올리는 모든 바위는 결국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우리는 부조리하다. 하지만 이런 부조리를 깨달아야 확실히 행복해질 수 있고, 무의미한 실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무언가로 목표를 재설정할 수 있다.
카뮈는 바위가 떨어진 후에 아래로 내려가는 시시포스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끝을 전혀 알 수 없는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침착한 걸음으로 내려가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고통의 순간처럼 어김없이 찾아오는 숨 돌릴 틈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은신처를 향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매 순간, 시시포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훌륭하다. 그는 바위보다 강하다. …… 신들의 프롤레타리아*, 시시포스는 무력하지만 반항적이며, 자신의 비참한 조건을 낱낱이 알고 있다. 바로 그 비참한 조건이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그가 생각한 내용이다.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혜안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이외에는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
이 마지막 문장에서 ‘혜안’은 문자 그대로 하면 ‘확고한 비전’으로 풀이할 수 있는 ‘통찰la clairvoyance’을 가리킨다. ‘통찰’은 시시포스가 거둔 성과다. 그가 자기 운명의 진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페스트》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 중 하나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시민들은 과부하가 걸린 마을 병원들을 돕기 위해 ‘보건대’라는 자원봉사 단체를 조직하는 문제를 의논한다.
카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반적으로 인간은 악하기보다 선하다. …… 하지만 인간은 좀 더 알거나 좀 더 모를 수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미덕 혹은 악덕이라 부른다. 가장 고치기 어려운 악덕은 자기가 전부 안다고 믿고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라는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다. 통찰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사랑도 있을 수 없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삶의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은 명료한 정신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인간이 끝없는 한계 속에서 투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카뮈는 이렇게 묻는다. 보건대원들은 칭찬받아 마땅할까? 이들을 칭찬하는 일은 2 더하기 2는 4라고 가르치는 교사를 칭찬하는 경우와 같을까? 보건대원들의 행동이 영웅적이지는 않다. 그들은 그저 불가피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2 더하기 2는 4라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때가 온다.” 이따금 그저 눈앞에 있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이 마지막 감상을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차용했는데, 1949년에 출간된 그의 소설 《1984》는 카뮈의 비유를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그가 살고 있는 전체주의 국가에 저항한 죄로 고문을 받는다. 그의 고문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2 더하기 2는 5라는 주장을 인정하도록 강요받을 때였다.
“내가 손가락 몇 개를 들고 있지?” 고문자가 전기 충격기의 강도를 높이면서 그렇게 묻는다. 윈스턴이 고문을 멈추게 하려면 거짓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하고 있는 거짓말을 정말로 믿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마음대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 복종해야 한다. 이런 일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윈스턴은 사랑하라고 들은 것을 사랑하고, 증오하라고 들은 것을 증오하게 된다.
오웰과 카뮈의 소설은 둘 다 쓰라리게 경험한 억압을 경고한다(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즘에 대항해 싸웠고, 카뮈는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오웰이 두려움과 고통으로 무너진 인간의 정신을 보여줬다면, 카뮈는 공포 앞에서 침착한 인간의 생존 의지를 보여줬다.
《페스트》에서 의사는 봉쇄된 마을을 탈출하려고 노력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이 말 하나만 하고 싶군요. 이 모든 상황에 영웅적 행위는 나올 수 없어요. 이것은 품위의 문제예요. 이 말을 들으면 몇몇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페스트와 싸워 이길 유일한 방법은 품위를 잃지 않는 겁니다.”
삶에 궁극적 의미란 없다. 하지만 삶을 목적으로 채울 수는 있다.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살아야 한다면,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카뮈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던 1942년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
높은 곳을 향한 투쟁 그 자체로 인간의 마음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 한다.
-알베르 카뮈
* 이 글은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중
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위해 투쟁하는 인간>을 발췌하여 재가공한 것입니다.
뉴필로소퍼 13호 부조리한 삶 속에서 목표를 갖는다는 것
글 톰 챗필드 Tom Chatfield
기술철학자·작가. 영국의 작가이자 방송인으로 옥스퍼드 인터넷연구소 객원 부교수,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전 세계의 과학기술을 다루는 사이트 <BBC 퓨처>의 초기 기고자였으며, 과학기술·예술·미디어 등을 주제로 세계 곳곳에서 강연한다. 저서로 《인터넷 언어의 유래》 《이 책대로 살아봐》 《인생학교 | 시간 —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 등이 있다.
번역 최이현
연세대학교에서 행정학을 공부했다. 독서와 글쓰기에 마음을 뺏겨 십 년 가까이 다니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글밥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여자들에게, 문제는 돈이다》《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자본주의가 대체 뭔가요?》《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정치는 어떻게 시간을 통제하는가?》 등이 있으며, 계간지 《뉴필로소퍼》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한국어판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