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그리스의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가 던진 문제로, 서양 철학의 초창기 관심사를 잘 드러내는 사고 실험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 테세우스가 직접 타고 항해했던 배가 후세까지 보존되고 있다는 가정을 제시한다. 시간이 흘러 배의 여러 부분들이 망가져 하나씩 새것으로 교체된다. 마침내 원래의 부품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그래도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 질문이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배는 재료 면에서 처음과 달라졌을 수 있지만, 그 존재와 형태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남아 있다. 이것은 그 배가 수차례의 수리를 거치는 동안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테세우스의 배는 비록 ‘존재’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역사적인 설명을 곁들여야 할지언정 어쨌든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수리에 그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더욱 직접적인 변형을 거쳤다면, 가령 썩은 판자와 나무 돛이 철제 부품으로 대체되고 노 대신에 엔진과 프로펠러로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
이렇게 결정적인 변형이 계속된다면, 어느 지점에선가는 이 사물의 정체성이 과거와 너무 달라져서 보는 사람들도 더이상 원래의 배와 같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할 시점이 분명히 올 것이다. 잘하면 아주 넓은 의미의 역사적 유물로서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원래 집을 헐고 지은 새집에 예전 그 자리에 있던 집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 이상의 실질적인 연결성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예시 또한 일반적인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논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문제가 조금씩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세포는 특정 시기에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 이러한 교체가 이뤄진 후에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인가? 첫 번째 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당신 자신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느껴진다.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성요소를 점진적으로 교체하는 과정은 정체성의 유지에 대한 일반적인 직관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온몸의 세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교체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까지 달라진다면 당신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까? 이러한 가정은 더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당신은 결국 17세기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주장했던 것처럼 “생각과 기억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핵심은 로크가 《인간지성론》에서 ‘인격의 동일성’이라고 정의했고, 오늘날 우리가 ‘심리적 연속성’이라고 부르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만약 지금 당신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뀔 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점차 소멸되고, 당신을 구성하는 각종 화학적, 생물학적 요소들마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면, 이 경우에도 당신의 정체성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떤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신은 기껏해야 한때 당신이었던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변화의 도착점에 있는 당신은 점진적으로 일어난 심오한 변형의 최종적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이 역시 꽤나 상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인간의 삶을 가장 정확히 묘사한 시나리오가 마지막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완전한 무지의 상태로 세상에 나온다. 성장하고 배우고 사랑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초창기의 기억을 망각하고, 완전히 의존적인 상태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변화한다. 삶의 초기 단계를 경험하는 인간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거의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인다. 끊임없는 성장과 변화, 망각은 인간의 형성에 필연적인 경험이다. 나이를 먹은 다음에야,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자신이 세상에 아이를 데려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다음에야, 우리는 이 현상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 아이의 과거 모습을 그리워하며 느끼는 슬픔에 대해 털어놓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더이상 온전한 만족감을 느끼는 아기를 품에 안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부모의 품이 주는 포근함을 찾아 아장아장 기어오는 아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최초의 게시글에 달린 수백 개의 댓글을 통해, 나는 서로 다른 연령대의 부모들이 자녀를 향한 지속적인 사랑의 한편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은 십 대가 된 아들의 커다란 손이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았을 때, 아이들이 부모의 품을 차지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라도 치르듯 서로 경쟁했을 때, 어린 딸이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가 제대로 도착하지 않는 것을 인생 최대의 걱정거리로 삼았을 때를 그리워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아이들은 각각 만3세와 만6세이다. 나는 소셜 미디어 속 부모들이 겪은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부모로서 매일 같이 새로운 삶을 조금씩 펼쳐내는 아름답고도 파괴적인 시간의 힘을 목격하고 있다. 그 힘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삶과 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는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를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심리학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 자료도 수없이 읽었다. 그러나 직접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을 때에야 나 자신이 이러한 철학적 개념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달았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지난 일은 흔적을 남길지언정 과거가 되어 사라진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묘사하는 가장 진부한 표현이지만, 막상 내 가족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부린 마법으로 생겨나는 사랑과 상실의 울림은 마냥 무심하게 넘기기가 어렵다. 새로운 생명을 돌본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며 빈번하게 변하는 요소인지 깨닫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양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부모가 되면 자신의 부모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두 배 더 늘어난다. 어릴 적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 모습을 지금의 양육 과정에 투사하는 것이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에게 무의미한 연민을 느끼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나를 비롯해서 그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던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가 더이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된 이 순간이 어떤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기존의 정체성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뉴필로소퍼 12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그리스의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가 던진 문제로, 서양 철학의 초창기 관심사를 잘 드러내는 사고 실험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영웅 테세우스가 직접 타고 항해했던 배가 후세까지 보존되고 있다는 가정을 제시한다. 시간이 흘러 배의 여러 부분들이 망가져 하나씩 새것으로 교체된다. 마침내 원래의 부품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다면, 그래도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 질문이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배는 재료 면에서 처음과 달라졌을 수 있지만, 그 존재와 형태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남아 있다. 이것은 그 배가 수차례의 수리를 거치는 동안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테세우스의 배는 비록 ‘존재’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역사적인 설명을 곁들여야 할지언정 어쨌든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한 수리에 그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더욱 직접적인 변형을 거쳤다면, 가령 썩은 판자와 나무 돛이 철제 부품으로 대체되고 노 대신에 엔진과 프로펠러로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까?
이렇게 결정적인 변형이 계속된다면, 어느 지점에선가는 이 사물의 정체성이 과거와 너무 달라져서 보는 사람들도 더이상 원래의 배와 같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할 시점이 분명히 올 것이다. 잘하면 아주 넓은 의미의 역사적 유물로서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원래 집을 헐고 지은 새집에 예전 그 자리에 있던 집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 이상의 실질적인 연결성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예시 또한 일반적인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논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문제가 조금씩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세포는 특정 시기에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 이러한 교체가 이뤄진 후에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인가? 첫 번째 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당신 자신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느껴진다.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성요소를 점진적으로 교체하는 과정은 정체성의 유지에 대한 일반적인 직관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온몸의 세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교체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까지 달라진다면 당신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까? 이러한 가정은 더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당신은 결국 17세기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주장했던 것처럼 “생각과 기억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핵심은 로크가 《인간지성론》에서 ‘인격의 동일성’이라고 정의했고, 오늘날 우리가 ‘심리적 연속성’이라고 부르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만약 지금 당신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뀔 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점차 소멸되고, 당신을 구성하는 각종 화학적, 생물학적 요소들마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면, 이 경우에도 당신의 정체성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떤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신은 기껏해야 한때 당신이었던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변화의 도착점에 있는 당신은 점진적으로 일어난 심오한 변형의 최종적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이 역시 꽤나 상식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인간의 삶을 가장 정확히 묘사한 시나리오가 마지막 이야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완전한 무지의 상태로 세상에 나온다. 성장하고 배우고 사랑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초창기의 기억을 망각하고, 완전히 의존적인 상태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변화한다. 삶의 초기 단계를 경험하는 인간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거의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인다. 끊임없는 성장과 변화, 망각은 인간의 형성에 필연적인 경험이다. 나이를 먹은 다음에야,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자신이 세상에 아이를 데려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다음에야, 우리는 이 현상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 아이의 과거 모습을 그리워하며 느끼는 슬픔에 대해 털어놓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더이상 온전한 만족감을 느끼는 아기를 품에 안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부모의 품이 주는 포근함을 찾아 아장아장 기어오는 아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최초의 게시글에 달린 수백 개의 댓글을 통해, 나는 서로 다른 연령대의 부모들이 자녀를 향한 지속적인 사랑의 한편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은 십 대가 된 아들의 커다란 손이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았을 때, 아이들이 부모의 품을 차지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라도 치르듯 서로 경쟁했을 때, 어린 딸이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가 제대로 도착하지 않는 것을 인생 최대의 걱정거리로 삼았을 때를 그리워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아이들은 각각 만3세와 만6세이다. 나는 소셜 미디어 속 부모들이 겪은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부모로서 매일 같이 새로운 삶을 조금씩 펼쳐내는 아름답고도 파괴적인 시간의 힘을 목격하고 있다. 그 힘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 삶과 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는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를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심리학적 정체성에 대한 연구 자료도 수없이 읽었다. 그러나 직접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한 가족의 일원이 되었을 때에야 나 자신이 이러한 철학적 개념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달았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지난 일은 흔적을 남길지언정 과거가 되어 사라진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묘사하는 가장 진부한 표현이지만, 막상 내 가족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부린 마법으로 생겨나는 사랑과 상실의 울림은 마냥 무심하게 넘기기가 어렵다. 새로운 생명을 돌본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며 빈번하게 변하는 요소인지 깨닫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양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부모가 되면 자신의 부모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두 배 더 늘어난다. 어릴 적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 모습을 지금의 양육 과정에 투사하는 것이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에게 무의미한 연민을 느끼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나를 비롯해서 그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던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가 더이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된 이 순간이 어떤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기존의 정체성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뉴필로소퍼 12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