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보니 고요한 순간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는 정신과 몸이 균형을 이루고 긍정적인 기운이 모든 부정적인 기운에 맞서 조화를 이루기를 바란다. 우리는 (긴장이 사라지는) 평형 상태에 이르면 자신과의 전쟁을 마치고 내면의 평화를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설령 내면의 평화를 찾는다고 해도 그런 아슬아슬한 균형은 단지 일시적이거나 환상에 불과하다. 어차피 세상만사는 끊임없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삶은 계속 흘러가고, 상황은 바뀌고, 사람들 자신도 변하고, 더불어 그들이 원하는 바도 변한다.
나는 스스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표지에서 우리를 강렬하게 응시하는 잘나가는 소수에게 너무 성급하게 찬사를 보내는 데 삐딱한 심정이 든다. 그들은 자기 삶의 모든 면, 즉 일과 가정, 성생활, 심지어 영적인 삶까지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정교하게 조율해간다고 우쭐대니 말이다. 이런 웰빙의 아이콘들이 자유자재로 관리하는 여러 영역, 즉 자녀 문제부터 은행 잔고까지 온갖 반드레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영역들을 보다 보면, 당신은 아마 그들이 날마다 구름에 떠다니듯 만족감 속에 살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상냥한 미소를 짓고, 결코 괴로움이나 부담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밤중에 깨어나 불안감에 시달리는 일도 없고, 절대로 고통, 실망, 우울, 분노에 굴복하는 일도 없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지나친 갈망이나 절박한 욕구를 표현하는 모든 행위와 조금이라도 과도한 기미를 보이는 온갖 성향을 도덕적인 실패로 여기게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들, 또는 폭식을 하거나 끊임없이 섹스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거의 어디에서나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다. 이는 그들에게 적당히 그치지 못하는 데 사과를 요구하는 문화적 압력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균형 잡힌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그들은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원하는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욕망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제멋대로인 욕망을 마치 유전자의 문제나 질병인 것처럼 타고난 기질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 나는 매주 다른 약을 선택하는데, 때로는 일이고, 때로는 음식이다. 어떨 때는 그저 삶의 경험에 굶주려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모든 행위의 공통적인 목표는 단순한 포만감을 넘어서고, 감각적 경험은 적당히 즐겨야 최선이라는 생각도 딛고 일어서서 극단적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수용하는 것이다. 솔직히 일상생활에서 가끔씩 과도한 경험에 휩쓸리기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경험은 분명히 압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균형을 무시하고 모든 비난 어린 금지 명령을 떨쳐버리면, 무모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과감히 방향을 틀어 기존의 삶의 궤도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마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른 경사로를 질주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스릴 넘치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나의 문제는 균형에서 벗어난 삶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예술에 대한 열정적인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헌신을 보여주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테드 휴스에게 열정적으로 헌신했고 사랑에 미친 나머지 그의 뺨을 깨물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빛과 색의 덧없이 스쳐가는 인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에 전념했다. 나는 고흐의 광적인 붓놀림을 볼 때마다 지독한 불만을 엿보게 된다. 내가 여기서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편집광의 노예였다. 그들을 이끌어간 원동력은 균형을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힘이었고, 나는 그 힘이 창조력의 원천이었다고 주장한다. 소설가 아나이스 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것은 항상 과잉에서 태어난다.
위대한 예술은 극도의 공포, 극도의 외로움,
극도의 억제와 불안정성에서 태어났다.
예술을 위해 고통받도록 태어나지 않은 우리들(대다수의 사람들)조차 개인의 사생활에서 균형이 너무 지나치면 따분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늘 판에 박힌 일상을 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삶이란 결국 적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삼는 일이다. 자신만의 개성과 열정을 통제하고 (사실상 부정하고) 외부 세계의 시스템과 부딪혀 어떤 충격도 경험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차단해버리면, 그 사람은 세상과의 접촉이 끊겨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르고 만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 살기 시작한다. 균형을 이룬(안정적인) 가정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십대 자녀들이 자주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르몬에 지배당하는 십대들은 모든 것을 예민하게 느끼기 쉽다. 그들의 생활 리듬은 일과가 정해진 생활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분노하고 울부짖다가 스스로를 심각한 조증에 내맡겨버린다. 십대들은 근본적으로 조화롭지 않고 극도로 불안정하다. 어른들은 십대들이 자라면 결국 진정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 어른들의 기질에 있는 향수 어린 집착이 십대들의 무모한 포기와 극단에의 끌림, 특히 새로운 외모부터 새로운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실험하는 즐거움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럽다.
내가 십대였을 때 어머니는 늘 “모든 것을 시도하되 적당히 하라”고 조언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조언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십대들은 집단의 일원인 동시에 개인이고, 이런 두 가지 존재 양식 모두 균형보다는 강렬하게 표현하는 성향을 요구한다. 십대들은 어떤 집단이든 간에 일단 자신이 속할 집단을 찾으면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곳에만 충성을 맹세한다. 그렇지만 선택된 특정 집단 내에서는 십대들이 저마다의 특수성으로 평가된다. 지루하고 평범한 균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균형에서 벗어난 생활은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활이 그토록 짜릿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열정이나 중독의 노예가 됨으로써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심지어 파괴하기도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행동에는 필연적으로 위험과 대가가 따른다. 사실 그 대가는 주변인들이 치르기 십상이다. 한 사람이 제멋대로 사는 자유를 누리려면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균형에서 얼마나 벗어날지에 대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전략적으로 균형을 벗어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한편으로 이 행성에서의 삶이 빠르고 정신없으며 예측 불가하고 통제하기 힘든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우리는 그 혼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 완벽, 만족 등 다른 모든 불가능한 기준을 추구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어차피 균형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두자. 난장판 속으로 뛰어들어 광기에 굴복하자. 아마 종국에 이르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고, 적어도 당신은 그 과정을 즐기게 될 것이다.
뉴필로소퍼 8호 균형 잡힌 삶을 산다는 것
글_마리나 벤저민
작가·편집자. 《뉴스테이츠맨》과 《이브닝 스탠더드》 예술 부문 편집자를 지냈고, 현재 《이온》 편집차장이다. 영국국립문학기금 자문위원이며, 아번재단의 창의적 글쓰기 강사를 맡고 있다. 회고록 《중년, 잠시 멈춤》과 《불면증》을 썼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보니 고요한 순간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는 정신과 몸이 균형을 이루고 긍정적인 기운이 모든 부정적인 기운에 맞서 조화를 이루기를 바란다. 우리는 (긴장이 사라지는) 평형 상태에 이르면 자신과의 전쟁을 마치고 내면의 평화를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설령 내면의 평화를 찾는다고 해도 그런 아슬아슬한 균형은 단지 일시적이거나 환상에 불과하다. 어차피 세상만사는 끊임없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삶은 계속 흘러가고, 상황은 바뀌고, 사람들 자신도 변하고, 더불어 그들이 원하는 바도 변한다.
나는 스스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표지에서 우리를 강렬하게 응시하는 잘나가는 소수에게 너무 성급하게 찬사를 보내는 데 삐딱한 심정이 든다. 그들은 자기 삶의 모든 면, 즉 일과 가정, 성생활, 심지어 영적인 삶까지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정교하게 조율해간다고 우쭐대니 말이다. 이런 웰빙의 아이콘들이 자유자재로 관리하는 여러 영역, 즉 자녀 문제부터 은행 잔고까지 온갖 반드레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영역들을 보다 보면, 당신은 아마 그들이 날마다 구름에 떠다니듯 만족감 속에 살며,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상냥한 미소를 짓고, 결코 괴로움이나 부담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밤중에 깨어나 불안감에 시달리는 일도 없고, 절대로 고통, 실망, 우울, 분노에 굴복하는 일도 없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지나친 갈망이나 절박한 욕구를 표현하는 모든 행위와 조금이라도 과도한 기미를 보이는 온갖 성향을 도덕적인 실패로 여기게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들, 또는 폭식을 하거나 끊임없이 섹스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거의 어디에서나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다. 이는 그들에게 적당히 그치지 못하는 데 사과를 요구하는 문화적 압력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균형 잡힌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그들은 너무 많이, 너무 자주 원하는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욕망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제멋대로인 욕망을 마치 유전자의 문제나 질병인 것처럼 타고난 기질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전가하려 든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다. 나는 매주 다른 약을 선택하는데, 때로는 일이고, 때로는 음식이다. 어떨 때는 그저 삶의 경험에 굶주려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모든 행위의 공통적인 목표는 단순한 포만감을 넘어서고, 감각적 경험은 적당히 즐겨야 최선이라는 생각도 딛고 일어서서 극단적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수용하는 것이다. 솔직히 일상생활에서 가끔씩 과도한 경험에 휩쓸리기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경험은 분명히 압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균형을 무시하고 모든 비난 어린 금지 명령을 떨쳐버리면, 무모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과감히 방향을 틀어 기존의 삶의 궤도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마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파른 경사로를 질주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스릴 넘치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나의 문제는 균형에서 벗어난 삶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이상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예술에 대한 열정적인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헌신을 보여주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테드 휴스에게 열정적으로 헌신했고 사랑에 미친 나머지 그의 뺨을 깨물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빛과 색의 덧없이 스쳐가는 인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에 전념했다. 나는 고흐의 광적인 붓놀림을 볼 때마다 지독한 불만을 엿보게 된다. 내가 여기서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편집광의 노예였다. 그들을 이끌어간 원동력은 균형을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힘이었고, 나는 그 힘이 창조력의 원천이었다고 주장한다. 소설가 아나이스 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술을 위해 고통받도록 태어나지 않은 우리들(대다수의 사람들)조차 개인의 사생활에서 균형이 너무 지나치면 따분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늘 판에 박힌 일상을 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삶이란 결국 적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삼는 일이다. 자신만의 개성과 열정을 통제하고 (사실상 부정하고) 외부 세계의 시스템과 부딪혀 어떤 충격도 경험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차단해버리면, 그 사람은 세상과의 접촉이 끊겨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르고 만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 살기 시작한다. 균형을 이룬(안정적인) 가정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십대 자녀들이 자주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르몬에 지배당하는 십대들은 모든 것을 예민하게 느끼기 쉽다. 그들의 생활 리듬은 일과가 정해진 생활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분노하고 울부짖다가 스스로를 심각한 조증에 내맡겨버린다. 십대들은 근본적으로 조화롭지 않고 극도로 불안정하다. 어른들은 십대들이 자라면 결국 진정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 어른들의 기질에 있는 향수 어린 집착이 십대들의 무모한 포기와 극단에의 끌림, 특히 새로운 외모부터 새로운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실험하는 즐거움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닐지 의심스럽다.
내가 십대였을 때 어머니는 늘 “모든 것을 시도하되 적당히 하라”고 조언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조언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십대들은 집단의 일원인 동시에 개인이고, 이런 두 가지 존재 양식 모두 균형보다는 강렬하게 표현하는 성향을 요구한다. 십대들은 어떤 집단이든 간에 일단 자신이 속할 집단을 찾으면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고 그곳에만 충성을 맹세한다. 그렇지만 선택된 특정 집단 내에서는 십대들이 저마다의 특수성으로 평가된다. 지루하고 평범한 균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균형에서 벗어난 생활은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활이 그토록 짜릿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열정이나 중독의 노예가 됨으로써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심지어 파괴하기도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행동에는 필연적으로 위험과 대가가 따른다. 사실 그 대가는 주변인들이 치르기 십상이다. 한 사람이 제멋대로 사는 자유를 누리려면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균형에서 얼마나 벗어날지에 대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전략적으로 균형을 벗어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한편으로 이 행성에서의 삶이 빠르고 정신없으며 예측 불가하고 통제하기 힘든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우리는 그 혼란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 완벽, 만족 등 다른 모든 불가능한 기준을 추구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어차피 균형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두자. 난장판 속으로 뛰어들어 광기에 굴복하자. 아마 종국에 이르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고, 적어도 당신은 그 과정을 즐기게 될 것이다.
뉴필로소퍼 8호 균형 잡힌 삶을 산다는 것
글_마리나 벤저민
작가·편집자. 《뉴스테이츠맨》과 《이브닝 스탠더드》 예술 부문 편집자를 지냈고, 현재 《이온》 편집차장이다. 영국국립문학기금 자문위원이며, 아번재단의 창의적 글쓰기 강사를 맡고 있다. 회고록 《중년, 잠시 멈춤》과 《불면증》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