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다 보면
그 사람과 어울리는 물건이 된다
삶의 닻이 되고 생활의 누름돌이 되는
물욕 많은 사람의 소소한 행복
* * *
내게 어울리는 물건을 발견하고
내 손으로 길들이며
익숙하게 오래 쓰는 즐거움
히라마쓰 요코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맛과 음식을 탐구하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감각을 풀어내는 맛 칼럼니스트다. 그런 그녀가 음식을 만드는 부엌과 도구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스스로를 ‘물욕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히라마쓰 요코는 《손때 묻은 나의 부엌》에서 욕심내어 고르고 고른 냄비, 이국 도시를 헤매며 손에 넣은 그릇, 오랫동안 부엌의 터줏대감이 된 물건들의 다양한 면면을 소개한다. 스테인리스 채반, 젓가락받침, 냄비와 돌솥, 프레스글라스 컵 등 그녀가 소개하는 물건들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거나 턱없이 비싼 물건이 아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고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것들에 히라마쓰 요코는 평범한 물건에 특별한 소임과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드는 조리도구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어떻게 담아야 먹음직스러운지를 늘 생각하며, 탁월한 감각으로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적절하게 찾아내는 것이다. 물건들을 소개하는 그녀의 글에는 애틋함과 자부심이 가득하다. 《손때 묻은 나의 부엌》을 읽다 보면 익숙한 물건의 새로운 면면을 발견하는 즐거움, 내게 맞는 물건을 길들여 사용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놓이는 정도가 다르다. 진심으로 의지가 된다. 심지어 오래간다. 벌써 10년이나 써 온 리넨 행주는 촉감이 순하고 주름도 스르르 부드럽다. 수분을 마법처럼 흡수한다. 이 정도면 존재 자체가 이미 재산이다. [이런 나, 안 되나요_리넨]
자신만의 센스와 상상력으로 채워진
히라마쓰 요코의 부엌
부엌에 냄비는 3개만 있어도 충분하다고들 하지만 히라마쓰 요코의 부엌에는 열 손가락을 넘어가는 개수의 냄비가 있다. 작은 부엌을 갖고 싶다고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위해서 꼭 필요한 부엌용품이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맛있는 밥을 지을 땐 돌솥, 뭉근하게 오래 끓이는 요리에는 질냄비가 필요하고 대나무 찜통이 있으면 재료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먹어 보고 또 해보았기 때문에 마룻바닥이 주저앉더라도 필요한 물건이라면 갖고 싶다고 그녀는 말한다. 히라마쓰 요코의 물욕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고이꾸온을 사먹다가 그릇에 반하기도 하고, 남의 부엌에서 발견한 국자도 얻어 온다. ‘르크루제’ 냄비를 만드는 곳까지 찾아가는가 하면, 저울 접시를 찾기 위해 베이징을 뒤지기도 한다. 이런 고집과 욕심이 그녀의 요리와 글을 더 맛있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히라마쓰 요코는 별것 아닌 물건도 사용법을 조금 달리 하여 유용한 도구로 만들어낸다. 평범한 소라 껍데기는 노란 고무줄 걸이가 되어 부엌 한편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해변을 굴러다니던 산호는 젓가락받침으로 재탄생한다. 땅속에서 녹슬어가던 수도관은 꽃병이 되어 세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낙엽이나 식물의 잎도 그녀의 손에서는 음식을 데커레이션하는 주방의 일원으로 태어난다. 좋은 물건을 찾아내는 탁월한 눈썰미와 적절한 쓰임새를 부여하는 손길은 평범한 물건도 가지고 싶은 아이템으로 바꿔 놓는다. 그녀의 살림은 자신만의 센스로 채워져 반짝반짝 빛난다.
손때 묻은 물건은
살림의 문진, 인생의 닻이 된다
물욕이 많은 저자지만 무조건 물건을 사 모으는 것은 아니다. ‘살림의 닻’이라고 말하는 양철 쌀통은 자신의 주방을 가진 후 계속 써오고 있는 물건이다. 자신의 손에 맞지 않는 일본의 전통 주방용품인 대나무 소쿠리와 가메노코 수세미는 과감히 버리고 편하게 쓸 수 있는 것을 고른다. 전자레인지를 버리고 찜통으로 음식을 데우고, 전기 주전자 대신 무거운 무쇠 주전자를 들인다. 물때가 잘 끼기까지 길들이는 시간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길이 잘 들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 무쇠 주전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물맛을 선물해준다.
나는 구태여 옛날 주방용품을 고집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구나 반성했다. 지금은 일본인의 살림살이와 주거 형태 전부 꽤 변했기 때문에, 현재 내 살림에 무리 없이 잘 맞는 물건을 천천히 찾아가는 편이 낫다. 옛날 것이라고 뭐든 좋을 리가 없다. [불쾌한 느낌_알루미늄 채반]
히라마쓰 요코는 물건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본인만의 감각으로 그 필요성을 증명해 보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물욕이 나쁜 것이냐고 묻는 듯하다. 미니멀리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아니냐고. 누구에게나 가지고 싶은 것, 내게 잘 어울리는 것, 오래 썼기에 자연스럽게 손에 익은 물건이 있다. 《손때 묻은 나의 부엌》은 내가 길들여 익숙하게 잘 쓰는 물건의 소중함, 갖고 싶은 물건을 알맞게 잘 사용하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책이다.
* * *
책 속에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게, 이 양철 쌀통은 우리 아이가 태어날 즈음 들인 주방용품 중 하나다. 쌀통을 들인다는 것이야말로 내 살림의 토대를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절박한 바람과 각오의 반영이 아닐까. 20대 중반, 물렁하고 못 미더운 살림 솜씨였어도 ‘우리 집 쌀통’이 생기고 나니, 급한 대로 살림 한구석에 믿음직스러운 닻을 내린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양철이 좋았다. 그 이유도 확실히 기억한다. 가볍고 녹슬지 않으며 튼튼하다. 붙임성이나 애교 따위 전혀 없다. 모든 군더더기를 깎아 낸 심플한 통이라는 점이 좋았다.
─만족을 알다_양철 쌀통(8~10쪽)
이론은 이해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완전히 마른 줄 알았는데 아주 약간의 수분만 남아도 녹이 슬기 시작했다. 만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참고 있으면, 녹이 점점 퍼져서 기껏 만들어 놓은 하얀 막까지 무정하게 잠식해 갔다. 이를 갈면서 지켜보지만, 적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른다. 에잇, 될 대로 되라지. 분노에 차 수세미로 쓱쓱 밀어 녹을 퇴치하고 결국 ‘길들이기 시간’은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가기를 꼬박 세 번. 땀과 눈물의 한 달을 보냈을 무렵, 드디어 안쪽이 하얀 물때로 뒤덮였고, 내 무쇠 주전자는 녹이라고는 모르는 강한 아이로 성장했다. 무쇠 주전자와 고락을 함께한 그 새벽의 물맛은 둥글둥글 보들보들한 것이 흡사 감로와도 같았다.
─길들이기 시간_무쇠 주전자(54~55쪽)
일 년 내내 잎사귀 찾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뜻밖의 수확과 맞닥뜨린다. 바로 레몬그라스 잎을 손에 넣었을 때다.
(요리에만 넣으면 재미없지!)
그래서 결국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가 하면.
긴 레몬그라스 잎을 그릇 크기에 맞춰 잘라서 그 위에 과일과 케이크를 얹었다.
시트러스 향과 어울리는 과일이라면 뭐든지 좋다. 케이크 중에서는 심플한 것과 어울린다. 오븐에 구워 바로 내는 심플한 케이크도 좋고, 고급 쇼콜라를 듬뿍 사용해 맛이 매우 진한 케이크도 좋다.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 곁들인다면, 또 어떻게 맛있어질까. 그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케이크라면 뭐든지 좋다. [천재 파티시에_잎사귀 그릇(99쪽)]
대나무 찜통은 강한 수증기의 힘으로 가열 조리하는 주방 도구다. 열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가해지기 때문에 음식이 포실하게 되고 영양소도 파괴되지 않는다. 감칠맛 또한 지킬 수 있다. 신기하게도, 대나무 찜통에 찌면 맛이 더 촉촉하고 깊어진다.
그 이유는 대나무 찜통이 대나무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금속 찜기로 찌면 뚜껑에 수증기가 맺히고 그 물방울이 식어 떨어지면서 음식이 질척해진다. 게다가 바깥 공기에 열을 쉽게 빼앗겨 내부 온도가 일정하지 않아진다. 하지만, 천연소재의 힘은 대단하다. 대나무 찜통은 대나무 껍질을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뚜껑 틈 사이로 수증기가 적절하게 빠진다. 뚜껑 내부에 두꺼운 종이나 무늬목으로 된 심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수분을 흡수하기도 하고 내뿜기도 하면서 습도를 조절해 준다.
─다시, 사랑_대나무 찜통(107~108쪽)
난 이 프레스글라스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앤티크 잡화점에서 우연히 발견할 때마다 하나씩 소중히 사 모은 컵이 예닐곱 개, 귀때 달린 작은 물병이 하나, 납작한 볼도 하나 있다. 물을 꿀꺽꿀꺽 마실 때나 싱글 몰트를 마실 때, 선반 옆 진열해 놓은 수많은 컵들을 뒤로하고 결국 내가 선택하는 건 프레스글라스의 거친 투박함이다. 입술에 닿는 그 묵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두께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앞가슴이 두텁고 키가 큰 대장부한테 안겨 있는 느낌이랄까. 뭐야, 그런 거였어? 헤헤헤.
한편, 프레스글라스를 다룬 그 책의 결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머, 말도 안 돼요. 우리 집 프레스글라스 컵들이 얼마나 행복한데요?
─한 방울의 기포_프레스글라스 컵(186~187쪽)
저자소개
지은이 : 히라마쓰 요코平松洋子
《바쁜 날에도 배는 고프다》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히라마쓰 요코의 부엌》 《맛있는 생활의 발견》 《술은 혼자서 밥은 둘이서》 등 맛에 대한 에세이를 다수 썼고, 그중 《산다는 건 잘 먹는 것》은 소설가 야마다 에이미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제16회 분카무라 되 마고 문학상을 수상했다. 문학성 짙은 글쓰기는 탄탄한 독서 이력이 밑거름되었다. 독서 에세이 《야만적인 독서》로 제28회 고단샤 에세이상을 수상했고, 소설가 오가와 요코와 공동 집필한 《요코 씨의 책장》으로 애서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국내에 나온 책으로 《어른의 맛》 《산다는 건 잘 먹는 것》 《바쁜 날에도 배는 고프다》 《혼자서도 잘 먹었습니다》가 있다.
옮긴이 : 조찬희
책정보 및 내용요약
저자 히라마쓰 요코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맛과 음식을 탐구하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감각을 풀어내는 맛 칼럼니스트다. 스스로를 ‘물욕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히라마쓰 요코는 《손때 묻은 나의 부엌》에서 욕심내어 고르고 고른 냄비, 이국 도시를 헤매며 손에 넣은 그릇, 오랫동안 부엌의 터줏대감이 된 물건들의 다양한 면면을 소개한다.
누구에게나 가지고 싶은 것, 내게 잘 어울리는 것, 오래 썼기에 자연스럽게 손에 익은 물건이 있다. 《손때 묻은 나의 부엌》은 내가 길들여 익숙하게 잘 쓰는 물건의 소중함, 갖고 싶은 물건을 알맞게 잘 사용하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책이다.
목차
012 조림의 시간_조림 접시
016 채소를 꽃꽂이하다_그릇 꽃병
022 살림의 문진_소금 단지
026 나의 큰 자랑거리_노란 고무줄 걸이
029 물욕 많은 사람의_천성 베트남 국자
034 부엌의 소리_절구
040 투박한 녀석이지만_무쇠 꽃병
044 쇼핑 귀신_벽걸이 등잔
049 길들이기 시간_무쇠 주전자
056 이런 나, 안 되나요_리넨
060 불쾌한 느낌_알루미늄 채반
065 그날, 교정에서_은행나무 도마
067 푸른 하늘에 한 자루의_일본의 대나무 주방용품
070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_요리용 젓가락
074 보테보테차의 유혹_차센
079 베이징 대수색망_저울 접시
090 토스카나의 산, 시칠리아의 바다_올리브 오일 병
096 마룻바닥이 주저앉아도_아시아의 질그릇 1
102 이곳 최고의 스프_아시아의 질그릇 2
105 다시, 사랑_대나무 찜통
111 생캉탱의 도가니_‘르크루제’ 냄비
116 맛있는 밥을 위해서라면_돌솥 1
121 델리의 색채_향신료 상자
126 모레의 김치_김치 보존용기
130 전주의 보배_돌솥 2
134 돌고 돌아 만난 길의 끝에서_치즈 강판
138 손님을 고르는 냄비_질냄비
142 파리의 벽에 난 구멍_만두틀
147 산호 젓가락받침의 경우_젓가락받침
151 사람 손에서 태어난 꽃_베트남의 그릇
156 한 술의 묵직함_숟가락
159 나의 밥공기_네고로누리 그릇
164 주방 도구니까요_가타쿠치
173 딸에게 주는 선물_변형의 그릇
177 식탁 위의 각성제_검은색 접시
181 다이어트의 무기_아이 밥공기
184 한 방울의 기포_프레스글라스 컵
188 에도의 모던 디자인_장국 그릇
192 아침의 인생수업_자몽 나이프
197 천재 파티시에_잎사귀 그릇
201 바람을 호흡하는 천_보자기
205 직구 승부의 꽃_숯 침봉
209 삼가고 있습니다_베트남 모기향로
213 차를 마시며 취하다_타원 접시
217 나눔은 즐겁다_나무 도시락
221 고등어초밥과 버터_나무 버터 케이스
226 줍는 신 있으리니_빈 치즈 케이스
230 차, 마시게_이즈모의 찐빵 찜기
235 밤에 쓰는 편지는_편지지와 편지봉투
239 나를 행복하게 하는_백자
248 죽느냐 사느냐_수선
253 접시는 대강 두는 것이_접시 받침대
256 미학은 제쳐 두고_마메자라 상자
260 햇병아리 차통_양철 차통
264 장미 이야기_대나무 꼬치
268 추운 겨울날은_손화로
272 앞으로 이틀 남은 생명_작고 네모난 백자
275 혼자 있고 싶을 때는_양초
278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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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과 어울리는 물건이 된다
삶의 닻이 되고 생활의 누름돌이 되는
물욕 많은 사람의 소소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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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어울리는 물건을 발견하고
내 손으로 길들이며
익숙하게 오래 쓰는 즐거움
히라마쓰 요코는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맛과 음식을 탐구하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감각을 풀어내는 맛 칼럼니스트다. 그런 그녀가 음식을 만드는 부엌과 도구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스스로를 ‘물욕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히라마쓰 요코는 《손때 묻은 나의 부엌》에서 욕심내어 고르고 고른 냄비, 이국 도시를 헤매며 손에 넣은 그릇, 오랫동안 부엌의 터줏대감이 된 물건들의 다양한 면면을 소개한다. 스테인리스 채반, 젓가락받침, 냄비와 돌솥, 프레스글라스 컵 등 그녀가 소개하는 물건들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거나 턱없이 비싼 물건이 아니다.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고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것들에 히라마쓰 요코는 평범한 물건에 특별한 소임과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드는 조리도구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어떻게 담아야 먹음직스러운지를 늘 생각하며, 탁월한 감각으로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적절하게 찾아내는 것이다. 물건들을 소개하는 그녀의 글에는 애틋함과 자부심이 가득하다. 《손때 묻은 나의 부엌》을 읽다 보면 익숙한 물건의 새로운 면면을 발견하는 즐거움, 내게 맞는 물건을 길들여 사용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센스와 상상력으로 채워진
히라마쓰 요코의 부엌
부엌에 냄비는 3개만 있어도 충분하다고들 하지만 히라마쓰 요코의 부엌에는 열 손가락을 넘어가는 개수의 냄비가 있다. 작은 부엌을 갖고 싶다고 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위해서 꼭 필요한 부엌용품이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맛있는 밥을 지을 땐 돌솥, 뭉근하게 오래 끓이는 요리에는 질냄비가 필요하고 대나무 찜통이 있으면 재료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먹어 보고 또 해보았기 때문에 마룻바닥이 주저앉더라도 필요한 물건이라면 갖고 싶다고 그녀는 말한다. 히라마쓰 요코의 물욕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고이꾸온을 사먹다가 그릇에 반하기도 하고, 남의 부엌에서 발견한 국자도 얻어 온다. ‘르크루제’ 냄비를 만드는 곳까지 찾아가는가 하면, 저울 접시를 찾기 위해 베이징을 뒤지기도 한다. 이런 고집과 욕심이 그녀의 요리와 글을 더 맛있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히라마쓰 요코는 별것 아닌 물건도 사용법을 조금 달리 하여 유용한 도구로 만들어낸다. 평범한 소라 껍데기는 노란 고무줄 걸이가 되어 부엌 한편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해변을 굴러다니던 산호는 젓가락받침으로 재탄생한다. 땅속에서 녹슬어가던 수도관은 꽃병이 되어 세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낙엽이나 식물의 잎도 그녀의 손에서는 음식을 데커레이션하는 주방의 일원으로 태어난다. 좋은 물건을 찾아내는 탁월한 눈썰미와 적절한 쓰임새를 부여하는 손길은 평범한 물건도 가지고 싶은 아이템으로 바꿔 놓는다. 그녀의 살림은 자신만의 센스로 채워져 반짝반짝 빛난다.
손때 묻은 물건은
살림의 문진, 인생의 닻이 된다
물욕이 많은 저자지만 무조건 물건을 사 모으는 것은 아니다. ‘살림의 닻’이라고 말하는 양철 쌀통은 자신의 주방을 가진 후 계속 써오고 있는 물건이다. 자신의 손에 맞지 않는 일본의 전통 주방용품인 대나무 소쿠리와 가메노코 수세미는 과감히 버리고 편하게 쓸 수 있는 것을 고른다. 전자레인지를 버리고 찜통으로 음식을 데우고, 전기 주전자 대신 무거운 무쇠 주전자를 들인다. 물때가 잘 끼기까지 길들이는 시간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길이 잘 들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 무쇠 주전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물맛을 선물해준다.
히라마쓰 요코는 물건의 소중함과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본인만의 감각으로 그 필요성을 증명해 보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물욕이 나쁜 것이냐고 묻는 듯하다. 미니멀리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아니냐고. 누구에게나 가지고 싶은 것, 내게 잘 어울리는 것, 오래 썼기에 자연스럽게 손에 익은 물건이 있다. 《손때 묻은 나의 부엌》은 내가 길들여 익숙하게 잘 쓰는 물건의 소중함, 갖고 싶은 물건을 알맞게 잘 사용하는 즐거움을 알려주는 책이다.
* * *
책 속에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게, 이 양철 쌀통은 우리 아이가 태어날 즈음 들인 주방용품 중 하나다. 쌀통을 들인다는 것이야말로 내 살림의 토대를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절박한 바람과 각오의 반영이 아닐까. 20대 중반, 물렁하고 못 미더운 살림 솜씨였어도 ‘우리 집 쌀통’이 생기고 나니, 급한 대로 살림 한구석에 믿음직스러운 닻을 내린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양철이 좋았다. 그 이유도 확실히 기억한다. 가볍고 녹슬지 않으며 튼튼하다. 붙임성이나 애교 따위 전혀 없다. 모든 군더더기를 깎아 낸 심플한 통이라는 점이 좋았다.
─만족을 알다_양철 쌀통(8~10쪽)
이론은 이해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완전히 마른 줄 알았는데 아주 약간의 수분만 남아도 녹이 슬기 시작했다. 만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참고 있으면, 녹이 점점 퍼져서 기껏 만들어 놓은 하얀 막까지 무정하게 잠식해 갔다. 이를 갈면서 지켜보지만, 적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른다. 에잇, 될 대로 되라지. 분노에 차 수세미로 쓱쓱 밀어 녹을 퇴치하고 결국 ‘길들이기 시간’은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가기를 꼬박 세 번. 땀과 눈물의 한 달을 보냈을 무렵, 드디어 안쪽이 하얀 물때로 뒤덮였고, 내 무쇠 주전자는 녹이라고는 모르는 강한 아이로 성장했다. 무쇠 주전자와 고락을 함께한 그 새벽의 물맛은 둥글둥글 보들보들한 것이 흡사 감로와도 같았다.
─길들이기 시간_무쇠 주전자(54~55쪽)
일 년 내내 잎사귀 찾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뜻밖의 수확과 맞닥뜨린다. 바로 레몬그라스 잎을 손에 넣었을 때다.
(요리에만 넣으면 재미없지!)
그래서 결국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가 하면.
긴 레몬그라스 잎을 그릇 크기에 맞춰 잘라서 그 위에 과일과 케이크를 얹었다.
시트러스 향과 어울리는 과일이라면 뭐든지 좋다. 케이크 중에서는 심플한 것과 어울린다. 오븐에 구워 바로 내는 심플한 케이크도 좋고, 고급 쇼콜라를 듬뿍 사용해 맛이 매우 진한 케이크도 좋다.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 곁들인다면, 또 어떻게 맛있어질까. 그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케이크라면 뭐든지 좋다. [천재 파티시에_잎사귀 그릇(99쪽)]
대나무 찜통은 강한 수증기의 힘으로 가열 조리하는 주방 도구다. 열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가해지기 때문에 음식이 포실하게 되고 영양소도 파괴되지 않는다. 감칠맛 또한 지킬 수 있다. 신기하게도, 대나무 찜통에 찌면 맛이 더 촉촉하고 깊어진다.
그 이유는 대나무 찜통이 대나무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금속 찜기로 찌면 뚜껑에 수증기가 맺히고 그 물방울이 식어 떨어지면서 음식이 질척해진다. 게다가 바깥 공기에 열을 쉽게 빼앗겨 내부 온도가 일정하지 않아진다. 하지만, 천연소재의 힘은 대단하다. 대나무 찜통은 대나무 껍질을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뚜껑 틈 사이로 수증기가 적절하게 빠진다. 뚜껑 내부에 두꺼운 종이나 무늬목으로 된 심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수분을 흡수하기도 하고 내뿜기도 하면서 습도를 조절해 준다.
─다시, 사랑_대나무 찜통(107~108쪽)
난 이 프레스글라스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앤티크 잡화점에서 우연히 발견할 때마다 하나씩 소중히 사 모은 컵이 예닐곱 개, 귀때 달린 작은 물병이 하나, 납작한 볼도 하나 있다. 물을 꿀꺽꿀꺽 마실 때나 싱글 몰트를 마실 때, 선반 옆 진열해 놓은 수많은 컵들을 뒤로하고 결국 내가 선택하는 건 프레스글라스의 거친 투박함이다. 입술에 닿는 그 묵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두께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앞가슴이 두텁고 키가 큰 대장부한테 안겨 있는 느낌이랄까. 뭐야, 그런 거였어? 헤헤헤.
한편, 프레스글라스를 다룬 그 책의 결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머, 말도 안 돼요. 우리 집 프레스글라스 컵들이 얼마나 행복한데요?
─한 방울의 기포_프레스글라스 컵(186~1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