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정보 및 내용요약
우정은 단단하고, 의리는 한결같았다
-고 강금원 회장 소전(小傳)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 강 회장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강 회장은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단 한 건의 이권도 청탁한 일이 없다. 아예 그럴만한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 나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오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 취직이라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봉하에 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봉하에 강 회장은 매주 하루씩 다녀갔다. _2009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쓴 <강금원이라는 사람>에서
1988년 5공 청문회. 5공화국 주역들과 일부 재벌의 잘못을 낱낱이 예리하게 지적하는 노무현 의원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단박에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그날 이후 그를 주목한 이가 있었다. 강금원이란 사람이다.
목차
차례
노무현이 강금원에게 - 강금원이라는 사람 7
1부. 별일 아냐!
종양 15
삭발 22
사투 28
영면 33
마지막 5년 -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사단법인 공공경영연구원 이사장 38
2부. 그 사람, 강금원
어린 가장 63
염색을 시작하다 72
사업의 시작 77
부산으로 가다 87
염색 전문가 93
시행착오들 96
시그너스 컨트리클럽 102
노무현을 만나다 112
사라진 노무현 116
세 개의 보따리 120
대통령이 되십시오 125
YS시계의 낭패 130
제가 이겼습니다! 132
경호원 가방의 비밀 138
호강 대신 감옥 143
청와대 산책 151
봉하마을 비서실장 157
골프장 결혼식 166
비극의 세월들 172
‘강용사’의 탄생 181
미완의 사업들 186
사무실을 닫다 191
대법원 재판부에 드리는 말씀 - 대법원 상고이유서 193
3부. 강금원, 그 사람
사업가의 무기 217
타협 없는 원칙 220
인간에 대한 예의 223
몸 사리지 않는 228
강도를 잡다 232
타고난 배짱 235
취미는 골프? 240
미소와 의리 245
결혼식에 왜 가야 되죠? 250
가족보다 사회 252
진돗개 이론 258
그가 꿈꾼 세상 - 강금원 육성 녹취록 261
“금계국을 보니 그립습니다” -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272
왜 그는 우리를 버리지 않았을까 - 안희정 충남도지사 278
책을 마치며: 강금원 같은 기업인을 기다리며 -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 291
편집자 추천글
1988년 5공 청문회. 5공화국 주역들과 일부 재벌의 잘못을 낱낱이 예리하게 지적하는 노무현 의원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단박에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그날 이후 그를 주목한 이가 있었다. 강금원이란 사람이다.
“검사장 따귀부터 때려야겠다”
정치인 노무현 인생에서 (주)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굳건한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결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덕을 보기보다 오히려 두 차례 검찰 조사를 받고, 두 차례 구속되었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2009년 4월 강금원이 두 번째로 구속되었을 때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라며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괴로워했다.
더욱이 당시 강금원 회장은 뇌종양 환자였다. 대전지검은 그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의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강금원은 회사를 양심적이고 건전하게 운영해 왔고, 노 대통령 재임 기간에 사업을 확장하기는커녕 축소했노라 항변했다. “조금이라도 확장하는 것이 대통령에게 누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롯한 노 대통령 측근들에 대한 수사가 “‘이명박 정부의 노무현 대통령 죽이기’ 음모”라는 일침도 잊지 않았다.
강금원은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어렵게 학업을 마친 후 입사한 회사에서 염색 기술을 배웠고, 오래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 창신섬유를 설립했다. 2000년대에는 골프장 사업에도 진출해 시 그너스 컨트리클럽(CC)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동산 투기나 특혜가 아닌 기술력과 제품 품질로 회사를 성장시켰노라 자부하는 기업인이었다. 이런 사람을, 더욱이 뇌종양을 앓는 환자를 검찰이 다시 구속하자 노무현은 격노했다.
새삼 3년여 전 그의 구속에 격노했던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 모습이 떠올랐다. 눈에 눈물이 가득한 대통령. 화난 목소리가 봉하마을 사저의 천장을 찔렀다. “나쁜 놈들. 성한 사람도 아닌데…… 대전지검으로 가자. 검사장 따귀부터 한 대 때려야겠다. 그러면 누가 답해도 답하겠지. 암환자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누가 시켜 이 따위 짓을 하는지. 가자.” -39쪽에서
의리를 지킨다는 것
이 책은 2012년 8월 2일 작고한 강금원 회장 일생을 돌아본 소전(小傳)이다. 생전 그의 육성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쓰였다. 일대기긴 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노무현과 강금원이 나눈 의리와 우정에 관한 것이다.
강금원이 노무현을 본격적으로 후원한 건 1998년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부터다. 그의 첫인상을 노무현은 이렇게 회상한다.
모르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후원금은 얼마까지 낼 수 있지요?” 전화로 물었다.
“1년에 5000만 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온 사람이 강 회장이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한테 눈곱만큼도 신세질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첫마디를 이렇게 사람 기죽이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눈치 안 보고 생각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9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쓴 <강금원이란 사람>에서
강금원은 노무현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우직함과 일관성을 믿었다. 노무현은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실현하려 했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지역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다. 한국 사회에서 3연(지연, 학연, 혈연)을 극복해서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정치인과 제품과 기술로 시장을 개척해 성취하려고 했던 기업인이 원칙과 상식이라는 공통의 가치로 의기투합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다.
강금원은 특히, 지역주의에 도전하는 노무현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강금원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만석꾼 소리를 듣던 집안이 아버지 사업 실패로 몰락한 후 온 가족이 상경했다. 많은 시간을 서울에서 보낸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부산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호남 출신이란 이유였다. 지역주의에 응어리가 맺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민주당으로서는 정치적 불모지인 부산에서 노무현은 거듭 낙선하면서도 출마했던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호남 사람으로서 부산에 건너와 사업했다. 부산이 나의 제2의 고향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호남에 대한 끝없는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려야 했다. 툭하면 사람들은 말했다. 호남 사람 의리 없다. 신용 없다고. 하지만 나는 보여 줄 것이다. 호남 놈이 얼마나 신용 있고 의리 있는지. 부산 사람 노무현이 보여 주었던 호남에 대한 의리가 있었다면 나 또한 호남 사람으로서 보여 주고 싶다. 권력에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그 많은 사람이 다 떨어져 나가도 내가 대통령 옆에 있음으로써 호남 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고쳐 주고 싶다.” -288쪽에서
노무현만 생각한 사람
강금원은 오직 노무현만 생각한 사람이다. 퇴임 이후 이명박 정부의 서슬 퍼런 위세에 기가 질려 사람들이 점점 발길을 끊어 갈 때도 하루가 멀다 하고 봉하마을을 찾은 이도 그였다. 이명박 정부로부터 노 대통령을 지켜 주기 위해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라 제안할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앞에 그의 얼굴이 가득했다. 그의 제안은 오히려 뒷전이었다. 대통령이 부러웠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옆에 둘 수 있었을까? 대통령을 향한 끝없는 애정. 그야말로 대통령의 안위가 그의 모든 것이었다. -45쪽에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본 모습도 다르지 않다.
힘도 없고 백도 없던 민주당의 영남 정치인의 후원자가 되기로 자청한 사람이 그였다. 대통령을 만들고도 지독하게 당하기만 했던 사람이 그였다. 자기 돈 써 가며 감옥만 갔던 사람, (…) “두고 봐라, 퇴임 후 대통령 옆에 누가 남아 있는지. 아마 나 말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거다”고 했던 그의 장담이 슬픈 현실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영어의 몸이 되어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남게 되었다. -286쪽에서
의리만큼 강금원 회장을 특징짓는 것이 웃음이다. 그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웃음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 서거 이후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2007년 발견된 뇌종양이 악화돼 투병 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존재 이유와도 같았던 노 대통령을 잃은 데서 온 상실감이 더 큰 이유였으리라. 서거 직후에야 보석으로 풀려나온 그는 “내가 있었으면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내가 있었으면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3년 뒤 그도 뒤를 따랐다. 오는 8월 2일이 1주기다.
저자소개
지은이 : 안희정
책정보 및 내용요약
-고 강금원 회장 소전(小傳)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 강 회장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강 회장은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단 한 건의 이권도 청탁한 일이 없다. 아예 그럴만한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 나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오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 취직이라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봉하에 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봉하에 강 회장은 매주 하루씩 다녀갔다. _2009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쓴 <강금원이라는 사람>에서
1988년 5공 청문회. 5공화국 주역들과 일부 재벌의 잘못을 낱낱이 예리하게 지적하는 노무현 의원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단박에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그날 이후 그를 주목한 이가 있었다. 강금원이란 사람이다.
목차
노무현이 강금원에게 - 강금원이라는 사람 7
1부. 별일 아냐!
종양 15
삭발 22
사투 28
영면 33
마지막 5년 -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사단법인 공공경영연구원 이사장 38
2부. 그 사람, 강금원
어린 가장 63
염색을 시작하다 72
사업의 시작 77
부산으로 가다 87
염색 전문가 93
시행착오들 96
시그너스 컨트리클럽 102
노무현을 만나다 112
사라진 노무현 116
세 개의 보따리 120
대통령이 되십시오 125
YS시계의 낭패 130
제가 이겼습니다! 132
경호원 가방의 비밀 138
호강 대신 감옥 143
청와대 산책 151
봉하마을 비서실장 157
골프장 결혼식 166
비극의 세월들 172
‘강용사’의 탄생 181
미완의 사업들 186
사무실을 닫다 191
대법원 재판부에 드리는 말씀 - 대법원 상고이유서 193
3부. 강금원, 그 사람
사업가의 무기 217
타협 없는 원칙 220
인간에 대한 예의 223
몸 사리지 않는 228
강도를 잡다 232
타고난 배짱 235
취미는 골프? 240
미소와 의리 245
결혼식에 왜 가야 되죠? 250
가족보다 사회 252
진돗개 이론 258
그가 꿈꾼 세상 - 강금원 육성 녹취록 261
“금계국을 보니 그립습니다” -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272
왜 그는 우리를 버리지 않았을까 - 안희정 충남도지사 278
책을 마치며: 강금원 같은 기업인을 기다리며 -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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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장 따귀부터 때려야겠다”
정치인 노무현 인생에서 (주)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굳건한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결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덕을 보기보다 오히려 두 차례 검찰 조사를 받고, 두 차례 구속되었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2009년 4월 강금원이 두 번째로 구속되었을 때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라며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괴로워했다.
더욱이 당시 강금원 회장은 뇌종양 환자였다. 대전지검은 그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의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강금원은 회사를 양심적이고 건전하게 운영해 왔고, 노 대통령 재임 기간에 사업을 확장하기는커녕 축소했노라 항변했다. “조금이라도 확장하는 것이 대통령에게 누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롯한 노 대통령 측근들에 대한 수사가 “‘이명박 정부의 노무현 대통령 죽이기’ 음모”라는 일침도 잊지 않았다.
강금원은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어렵게 학업을 마친 후 입사한 회사에서 염색 기술을 배웠고, 오래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 창신섬유를 설립했다. 2000년대에는 골프장 사업에도 진출해 시 그너스 컨트리클럽(CC)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동산 투기나 특혜가 아닌 기술력과 제품 품질로 회사를 성장시켰노라 자부하는 기업인이었다. 이런 사람을, 더욱이 뇌종양을 앓는 환자를 검찰이 다시 구속하자 노무현은 격노했다.
새삼 3년여 전 그의 구속에 격노했던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 모습이 떠올랐다. 눈에 눈물이 가득한 대통령. 화난 목소리가 봉하마을 사저의 천장을 찔렀다. “나쁜 놈들. 성한 사람도 아닌데…… 대전지검으로 가자. 검사장 따귀부터 한 대 때려야겠다. 그러면 누가 답해도 답하겠지. 암환자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누가 시켜 이 따위 짓을 하는지. 가자.” -39쪽에서
의리를 지킨다는 것
이 책은 2012년 8월 2일 작고한 강금원 회장 일생을 돌아본 소전(小傳)이다. 생전 그의 육성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쓰였다. 일대기긴 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노무현과 강금원이 나눈 의리와 우정에 관한 것이다.
강금원이 노무현을 본격적으로 후원한 건 1998년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부터다. 그의 첫인상을 노무현은 이렇게 회상한다.
모르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후원금은 얼마까지 낼 수 있지요?” 전화로 물었다.
“1년에 5000만 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온 사람이 강 회장이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한테 눈곱만큼도 신세질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첫마디를 이렇게 사람 기죽이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눈치 안 보고 생각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9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쓴 <강금원이란 사람>에서
강금원은 노무현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우직함과 일관성을 믿었다. 노무현은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실현하려 했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지역주의를 넘어서고자 했다. 한국 사회에서 3연(지연, 학연, 혈연)을 극복해서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정치인과 제품과 기술로 시장을 개척해 성취하려고 했던 기업인이 원칙과 상식이라는 공통의 가치로 의기투합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다.
강금원은 특히, 지역주의에 도전하는 노무현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강금원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만석꾼 소리를 듣던 집안이 아버지 사업 실패로 몰락한 후 온 가족이 상경했다. 많은 시간을 서울에서 보낸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부산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호남 출신이란 이유였다. 지역주의에 응어리가 맺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민주당으로서는 정치적 불모지인 부산에서 노무현은 거듭 낙선하면서도 출마했던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호남 사람으로서 부산에 건너와 사업했다. 부산이 나의 제2의 고향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호남에 대한 끝없는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려야 했다. 툭하면 사람들은 말했다. 호남 사람 의리 없다. 신용 없다고. 하지만 나는 보여 줄 것이다. 호남 놈이 얼마나 신용 있고 의리 있는지. 부산 사람 노무현이 보여 주었던 호남에 대한 의리가 있었다면 나 또한 호남 사람으로서 보여 주고 싶다. 권력에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그 많은 사람이 다 떨어져 나가도 내가 대통령 옆에 있음으로써 호남 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고쳐 주고 싶다.” -288쪽에서
노무현만 생각한 사람
강금원은 오직 노무현만 생각한 사람이다. 퇴임 이후 이명박 정부의 서슬 퍼런 위세에 기가 질려 사람들이 점점 발길을 끊어 갈 때도 하루가 멀다 하고 봉하마을을 찾은 이도 그였다. 이명박 정부로부터 노 대통령을 지켜 주기 위해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라 제안할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앞에 그의 얼굴이 가득했다. 그의 제안은 오히려 뒷전이었다. 대통령이 부러웠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옆에 둘 수 있었을까? 대통령을 향한 끝없는 애정. 그야말로 대통령의 안위가 그의 모든 것이었다. -45쪽에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본 모습도 다르지 않다.
힘도 없고 백도 없던 민주당의 영남 정치인의 후원자가 되기로 자청한 사람이 그였다. 대통령을 만들고도 지독하게 당하기만 했던 사람이 그였다. 자기 돈 써 가며 감옥만 갔던 사람, (…) “두고 봐라, 퇴임 후 대통령 옆에 누가 남아 있는지. 아마 나 말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거다”고 했던 그의 장담이 슬픈 현실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영어의 몸이 되어 우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남게 되었다. -286쪽에서
의리만큼 강금원 회장을 특징짓는 것이 웃음이다. 그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웃음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노 대통령 서거 이후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2007년 발견된 뇌종양이 악화돼 투병 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존재 이유와도 같았던 노 대통령을 잃은 데서 온 상실감이 더 큰 이유였으리라. 서거 직후에야 보석으로 풀려나온 그는 “내가 있었으면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내가 있었으면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3년 뒤 그도 뒤를 따랐다. 오는 8월 2일이 1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