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지은이 : 이언 해킹Ian Hacking
이언 해킹은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이자 분석철학자이다.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푸코의 사회과학에 접목시켜 그 둘을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언 해킹은 초기에 토머스 쿤, 임레 라카토스, 파울 파이어아벤트 등의 영향을 받아 과학철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으로 유명해졌으나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과학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겼다. 특히 학 자들이 인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인간 유형의 개념을 고안해 내면, 역으로 그러한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고리 효과looping effect’를 제시하여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 ‘아 동학대’와 ‘다중인격장애’에 대한 개념의 발전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학대받는 아동’나 ‘아동학대자’ ‘다중인격 환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해킹은 과학의 군사화가 한참일 때 이를 비판하는 철학 논문을 썼고, 극단적 사회구성주의를 비판하는 《대체 무엇이 사회적으 로 구성되었다는 말인가》(1999)라는 책을 펴내 사회구성주의자들의 격렬한 비난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포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토론토 대학교의 철학 분야 대학직속 석좌교수로 있었다. 이후 콜레 주 드 프랑스의 ‘과학적 개념의 철학과 역사’ 교수이자 학과장을 거쳐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 《통계적 영향의 논리》, 《확률의 출현》, 《철학에 왜 언어가 문제가 되는가》, 《표상하기와 개입하기》, 《과학적 혁명》, 《영혼을 다시 쓰다》, 《미치광이 여행자》, 《대체 무엇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말인가》, 《확률과 귀납 논리 입문》, 《역사적 존재론》 등이 있다.
옮긴이 : 정혜경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컨신 대학교(매디슨) 과학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양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저작으로는 《왓슨 & 크릭: DNA 이중나선의 두 영웅》(2006), 《내가 유전자 쇼핑으로 태어난 아이라면》(2008)과 연구논문 다수가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100대 논픽션
근대적 사고를 형성한 통계와 우연의 관계를 파헤친 역작
이언 해킹의 《우연을 길들이다》 출간!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이자 분석철학자인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가 출간되었다. 통계와 통계학의 등장에 따라 근대적 결정론이 성립된 과정, 그리고 비결정론적 세계관의 주요 개념인 ‘우연’이 권위를 회복하는 철학적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모던 라이브러리가 20세기 100대 논픽션의 하나로 꼽은 명저이자 이언 해킹의 대표작이다.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실천적 철학자이자 과학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틀로 ‘추론 스타일’ 개념을 주창한 이언 해킹의 대표작인 이 책은 근대를 규정하는 개념인 ‘통계’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개념인 ‘우연’을 둘러싼 철학적 연대기를 선보인다.
통계로 대표되는 결정론의 세계에서 우연으로 대표되는 비결정론의 세계로 넘어가는 이 여정은 사실상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개념적 전환이다. 즉 우연을 길들일 수 있다는 세계에서 우연을 길들일 수 없으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계로의 전환, 세상은 인과법칙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의 조합에 따라 임의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고의 전환인 것이다.
위스컨신 대학교 과학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혜경 교수의 번역은 이 책의 품격을 더 높인다. 책의 제목 The Taming of Chance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해킹은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각종 통계 자료와 철학서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작품의 문장을 활용하여 글을 전개했다. 따라서 번역에 있어서도 해킹의 의도와 그 문장이 담은 함의를 찾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4년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번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목차
옮긴이 서문
01 우연을 길들인다는 것
02 숙명론의 시대
03 공적인 아마추어, 비밀스런 관료
04 통계 전담 기관의 등장
05 이성의 감미로운 지배
06 질병의 양을 재다
07 과학의 곡창
08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09 입법철학의 경험적 근거
10 확실함도, 상세함도, 통제도, 가치도 없는 사실들
11 어느 다수결 규칙을 따를 것인가?
12 대수의 법칙 13 표준적인 가슴둘레
14 사회가 범죄를 예비한다
15 사회에 대한 천문학적 시각
16 사회에 대한 광물학적 시각
17 우연, 가장 유서 깊은 고귀함
18 카시러의 명제
19 ‘정상 상태’의 탄생
20 우주의 힘만큼이나 실재하는
21 통계적 법칙의 자율성
22 프로이센 통계학의 한 장면
23 우연이 지배하는 우주
주석
찾아보기
편집자 추천글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100대 논픽션
근대적 사고를 형성한 통계와 우연의 관계를 파헤친 역작
이언 해킹의 《우연을 길들이다》 출간!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이자 분석철학자인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가 출간되었다. 통계와 통계학의 등장에 따라 근대적 결정론이 성립된 과정, 그리고 비결정론적 세계관의 주요 개념인 ‘우연’이 권위를 회복하는 철학적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모던 라이브러리가 20세기 100대 논픽션의 하나로 꼽은 명저이자 이언 해킹의 대표작이다.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실천적 철학자이자 과학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틀로 ‘추론 스타일’ 개념을 주창한 이언 해킹의 대표작인 이 책은 근대를 규정하는 개념인 ‘통계’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개념인 ‘우연’을 둘러싼 철학적 연대기를 선보인다.
통계로 대표되는 결정론의 세계에서 우연으로 대표되는 비결정론의 세계로 넘어가는 이 여정은 사실상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개념적 전환이다. 즉 우연을 길들일 수 있다는 세계에서 우연을 길들일 수 없으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계로의 전환, 세상은 인과법칙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의 조합에 따라 임의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고의 전환인 것이다.
위스컨신 대학교 과학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혜경 교수의 번역은 이 책의 품격을 더 높인다. 책의 제목 The Taming of Chance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해킹은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각종 통계 자료와 철학서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작품의 문장을 활용하여 글을 전개했다. 따라서 번역에 있어서도 해킹의 의도와 그 문장이 담은 함의를 찾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4년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번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통계는 사회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인간과 사회의 변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사회 변화와 인간 행동은 결정론적인가? 정답은 ‘그렇다’이다. 18세기까지의 기준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뉴턴과학이 등장함으로써 18세기의 과학자들은 자연세계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결정론을 따르게 되었다. 그에 맞춰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인간과 사회 역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론의 시대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통계와 통계학이었다.
제국주의 시대, 조세와 징병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통계 작업과 그에 따른 확률론은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법칙이 존재함을 뒷받침했다. 통계는 본래 “국민이 향유하는 행복의 양과 그 수단을 확인하여 미래의 진보에 활용할 목적”으로 처음 등장했다. 1798년 영국의 싱클레어 경이 남긴 이 한마디가 통계와 통계학이 등장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다만, 그 의도는 상당히 윤색되었다. 17-18세기 봉건제가 무너지고 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국가는 조세와 징병이라는 새로운 업무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통계였다. 즉 1에이커의 땅에서는 곡물을 얼마나 수확할 수 있는지, 한 사람의 남자가 얼마나 하루 종일 나무를 얼마나 벨 수 있는지, 한 지역에서 군대에 징집될 수 있는 남자는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국가적 규모의 통계 작업이 진행되었고, 통계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통계학이 탄생했다. 이러한 통계 잡업의 바탕 위에서 멜서스의 《인구론》이 등장했고, 우생학의 학술적(통계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통계 조사의 범위가 확대되고 그 결과를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세계가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느냐, 아니면 세계의 움직임에 우연이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통계학이 가져다준 결과는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이나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인과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근대적 결정론으로 체계화되었다. 이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은 인간이 세계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으며, 우연의 존재는 그저 아직 세계의 밑바탕에 작용하는 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정상적 인간’이란 존재하는가?
통계의 탄생과 더불어 등장한 개념이 바로 ‘정상성normality’과 표준norm으로부터의 일탈deviation이라는 개념이다. 즉 일정한 규모의 통계치가 보여 주는 범위 안에 있는 사람(현상)과 그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군대에서 병사들의 신체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1817년 스코틀랜드 군대의 11개 연대에 소속된 5000명 이상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신장과 가슴둘레를 측정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 평균적인(정상적인) 수치의 군인들이 제시되었고, 이후 관련 연구가 쇄도했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계와 식물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오차법칙에 따라 이들 특성들의 분포 그래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상과 평균이라는 개념에 대한 초기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평균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어떤 남자가 이혼을 0.17번 하고 2.2명의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평균인’이란 편의상의 약칭일 뿐이고, 이는 사실상 인간 종 전체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특정한 민족 또는 국가의 특징에만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즉 다른 집단과 비교하여 한 집단의 특성을 재는 데 유용한 방식으로 ‘정상’과 ‘평균’, ‘비정상’과 ‘일탈’의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범죄는 사회적 할당량이 있는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는 주인공 그래드그린드의 아들이 도둑으로 발각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많다 보니 그중에는 정직하지 않은 이들도 많구요. 이는 법칙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저는 백 번이나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 법칙을 막을 수 있겠어요?” 디킨스는 통계학을 깊이 불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통계와 통계학이 차지하는 위상이었다. 당시 통계의 법칙은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벨기에의 통계학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였던 아돌프 케틀레는 1832년에 이렇게 말한다. “범죄를 예비하는 것은 바로 사회이다. 다시 말해, 범죄인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도구일 뿐이다. 범죄는 그가 처한 환경의 산물이다.” 해마다 일정 수의 사람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해마다 일정 수의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다. 이것은 통계학이 알려준 결과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 역시 개인의 일탈이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바로 사회가 그만큼의 범죄를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영국의 통계 관료 윌리엄 파는 1860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재, 파멸, 죽음은 중력과 같은 불변의 법칙에 지배 받으며, 확률의 계산을 통해 사전에 가늠할 수 있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변동한다. … 일부 인종은 다른 인종에 비해 높은 비율로 범죄를 자행한다. 일부 계층은 다른 계층들보다 위험하다. 인간은 통계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현재의 행동을 변화시킬 힘을 가진다.” 즉 범죄, 자살, 음주, 광인, 폭력 등 모든 ‘일탈적’ 행동은 인종별, 국가별로 일정한 수치를 보이며, 이는 개인이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상을 벗어난 모든 행동은 어느 단위에서든 일정한 양이 정해져 있고, 개인은 그 정해진 양 안에서만 행동을 변화할 뿐이라는 것이다.
통계학은 ‘범죄에 미리 할당된 총량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란 존재하는 것일까? 통계가 가르쳐주는 법칙이 이렇다면 도덕에는 과연 어떤 미래가 있을 것인가? 통계학은 이처럼 강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일종의 “통계적 숙명론”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결정되어 있는가, 우연의 연속인가?
‘우연’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틈은 없었다. 흄은 “우연은 그저 쓸모없는 단어일 뿐 세상에 실재하는 어떤 힘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이 떠난 자리에 숙명론은 통계의 힘을 빌려 다시금 자리를 잡았고, 과학으로 진화한 사회와 역사 연구는 인간과 사회 발전에 규칙성과 정해진 과정이 있다고 주장했다. 세상은 결정되어 있다는 이러한 사조 아래서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우연이라는 개념은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우연을 긍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것은 에밀 뒤르켐이었다. 그는 전체로서의 사회가 단순한 개인의 총합이 아니며, 전체에서는 개인 단위에서는 없었던 특성이 자체적으로 나타난다는 창발주의적 입장을 내세웠다. 그의 주장은 결정론을 거부할 토대를 마련했다. 그 후에 유전학자였던 프랜시스 골턴이 나타나 결정론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는 구슬 낙하 기계인 큉컹크스를 통해 정규분포가 보여 주는 오차의 법칙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함으로써, 우연과 규칙성이 지니는 불가분성의 관계를 파악했다. 즉 규칙에는 항상 우연의 요소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우연을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유형의 법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물리학 최대의 업적이라는 양자물리학은 물리세계에서의 결정론에 치명타를 안겼다. 즉 물리세계 역시 결정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정확히 이에 응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과학에서도 결정론의 자리는 쇠퇴했고, 그 중심에는 미국의 찰스 샌더스 퍼스가 있었다. 퍼스가 활동했던 19세기 말의 세계는 도처에 확률과 통계가 침투해 있었다. 즉 확률에 의해 세계를 규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퍼스는 절대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를 믿었다. 그는 실험 설계에서 임의화randominization의 방법을 사용했고, 인위적으로 생성된 우연이 지니는, 법칙과도 같은 특징을 활용했다. 그는 확률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연속에 적용된다고 확신했다. 즉 개별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우연이고, 확률은 그 일련의 사건에서 특정 사건이 차지하는 상대빈도일 뿐인 것이다.
주사위를 던져 6이 나온다고 했을 때는 이 현상에는 ‘지향성’이 없다. 그저 6이 나오는 상대빈도만 있을 뿐인 것이다. 그는 우연은 길들일 수 없다고 했다. 확률과 통계는 우연적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적용 가능한 개념이다. 통계적 법칙에 의해 우연이 소멸될 수는 없었다. 세상은 비결정론적이고, 우연은 감각의 모든 경로에 쏟아져 내린다.
푸코를 실천하는 ‘추론 스타일’의 철학자 이언 해킹
최근에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50주년 기념판에 입문적 에세이를 써서 다시금 주목을 받은 이언 해킹은 초기에 토머스 쿤, 임레 라카토스, 파울 파이어아벤트 등의 영향을 받아 과학철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으로 유명해졌으나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과학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미셸 푸코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푸코와 관련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조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해킹은 푸코에 흠뻑 빠진 뒤에 푸코에 대한 두툼한 책을 한 권 저술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고를 마무리한 뒤 돌연 원고 더미를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의아해한 학생들이 그 이유를 묻자 해킹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푸코를 연구하지 말고 행하라Don't study Foucault, Do Foucault!”
물론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당시 해킹이 〈미셀 푸코의 덜 성숙한 과학immature science〉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철학자인 토머스 쿤과 미셀 푸코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분명하다.
쿤의 패러다임과 푸코의 인간과학을 결합한 해킹은 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인간 유형의 개념을 고안해 내면, 역으로 그러한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고리 효과looping effect’를 제시하여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 ‘아동학대’와 ‘다중인격장애’에 대한 개념의 발전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학대받는 아동’나 ‘아동학대자’ ‘다중인격 환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해킹은 또 과학의 단절과 연속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추론의 스타일style of reason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간단히 말해 과학에는 수학적·실험적·확률적·분류적·통계적 스타일과 같은 다양한 스타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중 수학적 스타일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등장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고, 실험적 스타일과 확률적 스타일은 17세기 과학혁명기에 등장했다. 분류적 스타일은 18세기 이후 생물학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며, 통계적 스타일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
해킹에 따르면 스타일은 한 번 만들어지면 잘 사라지지 않는다. 수학적 스타일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었고, 실험적 스타일은 17세기 이래 과학의 지배적 스타일이 되었다. 이렇게 해킹의 스타일은 쿤의 패러다임과 달리 과학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설명한다. 그런데 새로운 과학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시기에는 이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과 소통의 어려움이 야기된다. “X라는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3분의 1이다”는 명제는 확률적 스타일을 수용한 사람에게는 과학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원칙도 실험적 스타일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참인 것이다. 17세기 과학혁명기에 등장한 많은 논쟁은 새로운 스타일의 부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는 것이 해킹의 해석이다.
저자소개
지은이 : 이언 해킹Ian Hacking
이언 해킹은 초기에 토머스 쿤, 임레 라카토스, 파울 파이어아벤트 등의 영향을 받아 과학철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으로 유명해졌으나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과학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겼다. 특히 학 자들이 인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인간 유형의 개념을 고안해 내면, 역으로 그러한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고리 효과looping effect’를 제시하여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 ‘아 동학대’와 ‘다중인격장애’에 대한 개념의 발전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학대받는 아동’나 ‘아동학대자’ ‘다중인격 환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해킹은 과학의 군사화가 한참일 때 이를 비판하는 철학 논문을 썼고, 극단적 사회구성주의를 비판하는 《대체 무엇이 사회적으 로 구성되었다는 말인가》(1999)라는 책을 펴내 사회구성주의자들의 격렬한 비난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포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토론토 대학교의 철학 분야 대학직속 석좌교수로 있었다. 이후 콜레 주 드 프랑스의 ‘과학적 개념의 철학과 역사’ 교수이자 학과장을 거쳐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 《통계적 영향의 논리》, 《확률의 출현》, 《철학에 왜 언어가 문제가 되는가》, 《표상하기와 개입하기》, 《과학적 혁명》, 《영혼을 다시 쓰다》, 《미치광이 여행자》, 《대체 무엇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말인가》, 《확률과 귀납 논리 입문》, 《역사적 존재론》 등이 있다.
옮긴이 : 정혜경
책정보 및 내용요약
근대적 사고를 형성한 통계와 우연의 관계를 파헤친 역작
이언 해킹의 《우연을 길들이다》 출간!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이자 분석철학자인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가 출간되었다. 통계와 통계학의 등장에 따라 근대적 결정론이 성립된 과정, 그리고 비결정론적 세계관의 주요 개념인 ‘우연’이 권위를 회복하는 철학적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모던 라이브러리가 20세기 100대 논픽션의 하나로 꼽은 명저이자 이언 해킹의 대표작이다.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실천적 철학자이자 과학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틀로 ‘추론 스타일’ 개념을 주창한 이언 해킹의 대표작인 이 책은 근대를 규정하는 개념인 ‘통계’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개념인 ‘우연’을 둘러싼 철학적 연대기를 선보인다.
통계로 대표되는 결정론의 세계에서 우연으로 대표되는 비결정론의 세계로 넘어가는 이 여정은 사실상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개념적 전환이다. 즉 우연을 길들일 수 있다는 세계에서 우연을 길들일 수 없으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계로의 전환, 세상은 인과법칙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의 조합에 따라 임의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고의 전환인 것이다.
위스컨신 대학교 과학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혜경 교수의 번역은 이 책의 품격을 더 높인다. 책의 제목 The Taming of Chance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해킹은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각종 통계 자료와 철학서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작품의 문장을 활용하여 글을 전개했다. 따라서 번역에 있어서도 해킹의 의도와 그 문장이 담은 함의를 찾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4년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번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목차
01 우연을 길들인다는 것
02 숙명론의 시대
03 공적인 아마추어, 비밀스런 관료
04 통계 전담 기관의 등장
05 이성의 감미로운 지배
06 질병의 양을 재다
07 과학의 곡창
08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09 입법철학의 경험적 근거
10 확실함도, 상세함도, 통제도, 가치도 없는 사실들
11 어느 다수결 규칙을 따를 것인가?
12 대수의 법칙 13 표준적인 가슴둘레
14 사회가 범죄를 예비한다
15 사회에 대한 천문학적 시각
16 사회에 대한 광물학적 시각
17 우연, 가장 유서 깊은 고귀함
18 카시러의 명제
19 ‘정상 상태’의 탄생
20 우주의 힘만큼이나 실재하는
21 통계적 법칙의 자율성
22 프로이센 통계학의 한 장면
23 우연이 지배하는 우주
주석
찾아보기
편집자 추천글
근대적 사고를 형성한 통계와 우연의 관계를 파헤친 역작
이언 해킹의 《우연을 길들이다》 출간!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이자 분석철학자인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가 출간되었다. 통계와 통계학의 등장에 따라 근대적 결정론이 성립된 과정, 그리고 비결정론적 세계관의 주요 개념인 ‘우연’이 권위를 회복하는 철학적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모던 라이브러리가 20세기 100대 논픽션의 하나로 꼽은 명저이자 이언 해킹의 대표작이다.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실천적 철학자이자 과학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틀로 ‘추론 스타일’ 개념을 주창한 이언 해킹의 대표작인 이 책은 근대를 규정하는 개념인 ‘통계’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개념인 ‘우연’을 둘러싼 철학적 연대기를 선보인다.
통계로 대표되는 결정론의 세계에서 우연으로 대표되는 비결정론의 세계로 넘어가는 이 여정은 사실상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의 가장 중요한 개념적 전환이다. 즉 우연을 길들일 수 있다는 세계에서 우연을 길들일 수 없으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계로의 전환, 세상은 인과법칙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의 조합에 따라 임의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고의 전환인 것이다.
위스컨신 대학교 과학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혜경 교수의 번역은 이 책의 품격을 더 높인다. 책의 제목 The Taming of Chance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해킹은 제목뿐 아니라 책 곳곳에서 각종 통계 자료와 철학서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작품의 문장을 활용하여 글을 전개했다. 따라서 번역에 있어서도 해킹의 의도와 그 문장이 담은 함의를 찾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4년여에 가까운 기간 동안 번역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통계는 사회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가?
인간과 사회의 변동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사회 변화와 인간 행동은 결정론적인가? 정답은 ‘그렇다’이다. 18세기까지의 기준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뉴턴과학이 등장함으로써 18세기의 과학자들은 자연세계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결정론을 따르게 되었다. 그에 맞춰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인간과 사회 역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론의 시대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통계와 통계학이었다.
제국주의 시대, 조세와 징병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통계 작업과 그에 따른 확률론은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법칙이 존재함을 뒷받침했다. 통계는 본래 “국민이 향유하는 행복의 양과 그 수단을 확인하여 미래의 진보에 활용할 목적”으로 처음 등장했다. 1798년 영국의 싱클레어 경이 남긴 이 한마디가 통계와 통계학이 등장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다만, 그 의도는 상당히 윤색되었다. 17-18세기 봉건제가 무너지고 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국가는 조세와 징병이라는 새로운 업무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통계였다. 즉 1에이커의 땅에서는 곡물을 얼마나 수확할 수 있는지, 한 사람의 남자가 얼마나 하루 종일 나무를 얼마나 벨 수 있는지, 한 지역에서 군대에 징집될 수 있는 남자는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국가적 규모의 통계 작업이 진행되었고, 통계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통계학이 탄생했다. 이러한 통계 잡업의 바탕 위에서 멜서스의 《인구론》이 등장했고, 우생학의 학술적(통계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통계 조사의 범위가 확대되고 그 결과를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세계가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느냐, 아니면 세계의 움직임에 우연이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통계학이 가져다준 결과는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이나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인과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근대적 결정론으로 체계화되었다. 이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은 인간이 세계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으며, 우연의 존재는 그저 아직 세계의 밑바탕에 작용하는 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정상적 인간’이란 존재하는가?
통계의 탄생과 더불어 등장한 개념이 바로 ‘정상성normality’과 표준norm으로부터의 일탈deviation이라는 개념이다. 즉 일정한 규모의 통계치가 보여 주는 범위 안에 있는 사람(현상)과 그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군대에서 병사들의 신체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1817년 스코틀랜드 군대의 11개 연대에 소속된 5000명 이상의 군인들을 대상으로 신장과 가슴둘레를 측정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 평균적인(정상적인) 수치의 군인들이 제시되었고, 이후 관련 연구가 쇄도했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계와 식물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오차법칙에 따라 이들 특성들의 분포 그래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상과 평균이라는 개념에 대한 초기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평균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어떤 남자가 이혼을 0.17번 하고 2.2명의 아이를 낳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평균인’이란 편의상의 약칭일 뿐이고, 이는 사실상 인간 종 전체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특정한 민족 또는 국가의 특징에만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즉 다른 집단과 비교하여 한 집단의 특성을 재는 데 유용한 방식으로 ‘정상’과 ‘평균’, ‘비정상’과 ‘일탈’의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범죄는 사회적 할당량이 있는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Hard Times》에는 주인공 그래드그린드의 아들이 도둑으로 발각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많다 보니 그중에는 정직하지 않은 이들도 많구요. 이는 법칙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저는 백 번이나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 법칙을 막을 수 있겠어요?” 디킨스는 통계학을 깊이 불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통계와 통계학이 차지하는 위상이었다. 당시 통계의 법칙은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벨기에의 통계학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였던 아돌프 케틀레는 1832년에 이렇게 말한다. “범죄를 예비하는 것은 바로 사회이다. 다시 말해, 범죄인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도구일 뿐이다. 범죄는 그가 처한 환경의 산물이다.” 해마다 일정 수의 사람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해마다 일정 수의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다. 이것은 통계학이 알려준 결과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저지른 범죄 역시 개인의 일탈이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바로 사회가 그만큼의 범죄를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영국의 통계 관료 윌리엄 파는 1860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재, 파멸, 죽음은 중력과 같은 불변의 법칙에 지배 받으며, 확률의 계산을 통해 사전에 가늠할 수 있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변동한다. … 일부 인종은 다른 인종에 비해 높은 비율로 범죄를 자행한다. 일부 계층은 다른 계층들보다 위험하다. 인간은 통계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현재의 행동을 변화시킬 힘을 가진다.” 즉 범죄, 자살, 음주, 광인, 폭력 등 모든 ‘일탈적’ 행동은 인종별, 국가별로 일정한 수치를 보이며, 이는 개인이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상을 벗어난 모든 행동은 어느 단위에서든 일정한 양이 정해져 있고, 개인은 그 정해진 양 안에서만 행동을 변화할 뿐이라는 것이다.
통계학은 ‘범죄에 미리 할당된 총량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란 존재하는 것일까? 통계가 가르쳐주는 법칙이 이렇다면 도덕에는 과연 어떤 미래가 있을 것인가? 통계학은 이처럼 강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일종의 “통계적 숙명론”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결정되어 있는가, 우연의 연속인가?
‘우연’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틈은 없었다. 흄은 “우연은 그저 쓸모없는 단어일 뿐 세상에 실재하는 어떤 힘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이 떠난 자리에 숙명론은 통계의 힘을 빌려 다시금 자리를 잡았고, 과학으로 진화한 사회와 역사 연구는 인간과 사회 발전에 규칙성과 정해진 과정이 있다고 주장했다. 세상은 결정되어 있다는 이러한 사조 아래서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우연이라는 개념은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우연을 긍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한 것은 에밀 뒤르켐이었다. 그는 전체로서의 사회가 단순한 개인의 총합이 아니며, 전체에서는 개인 단위에서는 없었던 특성이 자체적으로 나타난다는 창발주의적 입장을 내세웠다. 그의 주장은 결정론을 거부할 토대를 마련했다. 그 후에 유전학자였던 프랜시스 골턴이 나타나 결정론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는 구슬 낙하 기계인 큉컹크스를 통해 정규분포가 보여 주는 오차의 법칙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함으로써, 우연과 규칙성이 지니는 불가분성의 관계를 파악했다. 즉 규칙에는 항상 우연의 요소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우연을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유형의 법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물리학 최대의 업적이라는 양자물리학은 물리세계에서의 결정론에 치명타를 안겼다. 즉 물리세계 역시 결정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정확히 이에 응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과학에서도 결정론의 자리는 쇠퇴했고, 그 중심에는 미국의 찰스 샌더스 퍼스가 있었다. 퍼스가 활동했던 19세기 말의 세계는 도처에 확률과 통계가 침투해 있었다. 즉 확률에 의해 세계를 규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퍼스는 절대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우연의 세계를 믿었다. 그는 실험 설계에서 임의화randominization의 방법을 사용했고, 인위적으로 생성된 우연이 지니는, 법칙과도 같은 특징을 활용했다. 그는 확률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사건의 연속에 적용된다고 확신했다. 즉 개별 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우연이고, 확률은 그 일련의 사건에서 특정 사건이 차지하는 상대빈도일 뿐인 것이다.
주사위를 던져 6이 나온다고 했을 때는 이 현상에는 ‘지향성’이 없다. 그저 6이 나오는 상대빈도만 있을 뿐인 것이다. 그는 우연은 길들일 수 없다고 했다. 확률과 통계는 우연적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적용 가능한 개념이다. 통계적 법칙에 의해 우연이 소멸될 수는 없었다. 세상은 비결정론적이고, 우연은 감각의 모든 경로에 쏟아져 내린다.
푸코를 실천하는 ‘추론 스타일’의 철학자 이언 해킹
최근에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50주년 기념판에 입문적 에세이를 써서 다시금 주목을 받은 이언 해킹은 초기에 토머스 쿤, 임레 라카토스, 파울 파이어아벤트 등의 영향을 받아 과학철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으로 유명해졌으나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과학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미셸 푸코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푸코와 관련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조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해킹은 푸코에 흠뻑 빠진 뒤에 푸코에 대한 두툼한 책을 한 권 저술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고를 마무리한 뒤 돌연 원고 더미를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의아해한 학생들이 그 이유를 묻자 해킹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푸코를 연구하지 말고 행하라Don't study Foucault, Do Foucault!”
물론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지만 당시 해킹이 〈미셀 푸코의 덜 성숙한 과학immature science〉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철학자인 토머스 쿤과 미셀 푸코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분명하다.
쿤의 패러다임과 푸코의 인간과학을 결합한 해킹은 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인간 유형의 개념을 고안해 내면, 역으로 그러한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고리 효과looping effect’를 제시하여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 ‘아동학대’와 ‘다중인격장애’에 대한 개념의 발전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을 ‘학대받는 아동’나 ‘아동학대자’ ‘다중인격 환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해킹은 또 과학의 단절과 연속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추론의 스타일style of reason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간단히 말해 과학에는 수학적·실험적·확률적·분류적·통계적 스타일과 같은 다양한 스타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중 수학적 스타일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등장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고, 실험적 스타일과 확률적 스타일은 17세기 과학혁명기에 등장했다. 분류적 스타일은 18세기 이후 생물학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며, 통계적 스타일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
해킹에 따르면 스타일은 한 번 만들어지면 잘 사라지지 않는다. 수학적 스타일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었고, 실험적 스타일은 17세기 이래 과학의 지배적 스타일이 되었다. 이렇게 해킹의 스타일은 쿤의 패러다임과 달리 과학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설명한다. 그런데 새로운 과학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시기에는 이 스타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과 소통의 어려움이 야기된다. “X라는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3분의 1이다”는 명제는 확률적 스타일을 수용한 사람에게는 과학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원칙도 실험적 스타일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참인 것이다. 17세기 과학혁명기에 등장한 많은 논쟁은 새로운 스타일의 부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는 것이 해킹의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