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정보 및 내용요약
원시 인류의 두개골에서 인간복제까지 인간 지성의 도저한 발달사!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인류가 이룩한 눈부신 문화적 산봉우리의 연속을 타고 오르는 지적인 대장정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석학 브로노우스키가 만사를 제쳐두고 착수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그의 생명을 소진하게 했을 만큼 힘든 작업이었고, 결국 그는 평생의 걸작이 된 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육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책은 원시 인류의 진화에서부터 현대 핵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위대한 정신과 무한한 가능성을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 책의 원제 The Ascent of Man은 다윈의 유명한 저서 The Descent of Man을 떠올리게 한다. 즉, 다윈이 보잘것없는 원시인에서 현대의 인간으로 진화해 내려온 생물학적인 진화의 과정을 ‘The Descent of Man'이라는 용어에 집약하고 있다면 브로노우스키는 인간이 상상력과 이성, 정서적 예민함과 강인성으로 환경을 변화시켜온 문화적 진화의 상승 과정을 ‘The Ascent of Man'이라는 이름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분명 과학사를 다루고 있으나 여기서의 과학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며 자연과학이라는 영역을 뛰어넘어 예술, 문학, 종교, 기술, 건축 등 문화적 진화 일반까지를 아우른다. 부싯돌에서 기하학에 이르고, 건축물의 아치에서 상대성이론에 이르는 발명과 발견은 자연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지적 세계의 방대함보다 우리를 더욱 매혹하는 것은 브로노우스키의 유려한 문학적 비유와 함께 신비로울 만큼 유연하고 유기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관념과 지식들의 ‘체계’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단지 문화적 진화의 ‘역사’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 즉 브로노우스키에 따르면 현대판 ‘자연철학’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과학사 책과 구별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어린아이의 두개골을 통해 인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제는 문화적 화석이 되어버린 스칸디나비아 최북단 랩족의 이동생활을 통해 빙하시대를 이겨온 지혜로운 인간의 특성을 살펴본다. 고대 예리코의 오아시스에서 잡종 밀의 개량이 가져다준 농업혁명의 폭발적인 변화, 말의 가축화가 유목경제에 미친 영향, 안데스 산맥의 고원에서 꽃핀 잉카 문명이 신세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세계에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차이와 연금술로부터 시작된 현대 과학으로의 발전, 아랍인들이 가장 공들였던 천문학과 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 모형과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 갈릴레이의 이단 심문 재판소에서 벌어진 희극적 사건, 대역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은 시기에 유율법(미적분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경이로운 물리학적 상상력, “내가 광선을 타고 가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하여 뉴턴의 절대적 시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아인슈타인, 산업혁명을 이끌고 나간 영국 달협회 기업가들의 실용적인 정신, 다윈과 똑같은 궤적을 따라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얻고도 그 이름이 가리워져 있었던 앨프레드 월리스, 핵물리학의 발전이 대량 살상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던 레오 실라드 그리고 대량 살상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에 이르기까지.
브로노우스키의 시선은 인간이 자신의 지적 지평을 확장해간 역사적인 공간과 그 파괴의 현장에 도달한다. 하나의 봉우리가 또 다른 봉우리를 오르는 발판이 되는 이 유기적인 서사의 방대한 여정 속에서 브로노우스키는 인간에 대한 기꺼운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편집자 추천글
20세기의 르네상스인, 브로노우스키
자연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20세기의 르네상스인 브루노우스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휴머니스트로서 그가 평생을 두고 고민했던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그 독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였다. 브로노우스키는 1908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가족을 따라 독일로 이주했으며, 1920년에 다시 런던으로 이주하여 영국에 귀화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으며 수학을 공부했고, 기하학과 위상수학에 대한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헐(Hull)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문학과 과학을 한 가지 경험의 두 가지 다른 언어로 생각했던 브로노우스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진보적인 문예잡지 <실험Experiment>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특히 시에 조예가 깊어 직접 시작(詩作)을 하는 한편 『시론The Poet's Defence』(1939), 『윌리엄 블레이크:가면을 벗은 인간William Blake:A Man Without a Mask』(1965)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2년 그는 헐 대학교를 떠나 내무부의 군사연구소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시과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브로노우스키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나가사키 공군기지에 내리는 순간 그의 삶은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주적인 한순간이었고 별안간 만나게 된 이 모든 경험은 ‘전 인류의 경험’이었다고 그의 저서『과학과 인간의 가치Science and Human Value』에서 밝히고 있다.
이후 그는 타웅(Taung)에서 발견된 어린이의 두개골이 인류의 조상인지를 밝히는 통계학적 연구에 참여하면서 관심을 생명과학으로 옮겨갔다. 같은 시기 텔레비전 매체의 효력을 인식한 브로노우스키는 종종 텔레비전 과학 프로그램에 나와 어려운 과학적 개념을 쉽게 설명하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주었다. 생명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브로노우스키는 생물학과 인간학을 통합하는 연구를 목적으로 세워진 솔크 생물학연구소의 창단 멤버로 참여하여 1964년에 선임연구원이 되었다.
그의 중요한 마지막 프로젝트는 ‘The Ascent of Man'이라는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쓰고 해설하는 일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1973년 전 세계적으로 절찬을 받으며 방영되었고 그 해 책으로 출간되어 상당 기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 속으로
천사 아래 있는 존재
브로노우스키의 여정은 동아프리카 오모 강에서 시작된다. 그는 적도 부근 타웅에서 발견된 200만여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어린아이의 두개골을 통해 인간의 동물적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로 이르는 인간의 종적 진화의 결과는 사회적 행동과 의사소통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인류는 모든 발명 가운데서도 최대의 걸작품인 불을 발명하여 빙하시대를 이겨냈다. 불은 화로의 상징이며, 3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손자국을 남기기 시작한 이래 그 화로는 동굴이었다. 줄잡아 100만 년 동안 인간은 채집과 수렵으로 살았으며, 동굴벽화와 같은 생생한 예술이 이를 증거한다. 브로노우스키는 그곳에 표현된 마력과 같은 힘을 ‘선견력’이라고 단언한다. 앞을 내다보는 상상력, 즉 사냥꾼은 기공을 통하듯 그 그림을 통해 사냥의 공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적 진화란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끊임없는 성장과 확대이므로, 그들은 인간의 등정을 따라 앞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계절의 수확
인간의 문명은 1만 2,000년 전 ‘농업혁명’이라는 폭발적인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빙하기가 끝날 즈음 새로운 식물이 무성해지면서 중동 지역에 잡종 밀이 나타났다. 그 전형적인 장소가 고대 예리코의 오아시스다. 구세계에서 농업이 확산되는 전환점은 엠머밀과 빵밀이라는 두 가지 잡종 밀이 나타나면서부터다. 밀과 물은 하나가 되었고, 예리코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오래지 않아 이웃 부족들의 선망의 표적이 되었다. 이스라엘 부족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하여 기원전 1400년경에 비옥한 땅 예리코를 정복했다. 『성서』는 유목과 목축을 주업으로 하다가 농경부족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한 민족의 역사다.
정착농업은 기술을 창조하며, 기술로부터 모든 물리학과 과학이 생겨난다. 낫, 쐐기, 바퀴, 관개시설의 설계, 사역동물의 활용 등. 하지만 농업과 더불어 동물의 가축화는 유목경제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무엇보다 말의 가축화는 칭기즈칸의 몽고 대군이 중국과 이슬람 국가들을 정복하고 유럽의 문턱까지 진출하게 한 힘과 조직력의 기본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유목민이요, 강력한 전쟁기계의 발명가였다. 하지만 그의 제5대 왕위 상속자 올제이투 칸은 결국 페르시아에 정착하여 이슬람 교도로, 건설왕으로 명성을 드높이며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몽고 유목민의 몰락으로서는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돌의 결
일찍부터 인간은 돌을 다듬어 연장을 만들었다. 때로는 돌이 천연적인 결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연장을 만드는 사람이 돌을 치는 방법을 배워 벽개면을 만들어냈다. 사물의 건축술은 포면 아래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 구조란 숨겨진 결로서 그것이 드러났을 때는 자연의 형태를 분해하여 새로운 배열 방식으로 재조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론과학이 시작되는 인간 등정의 단계다.
마추픽추는 1500년경 잉카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되었다. 이들의 계단식 농경문화의 핵심에는 관개시설이 있으며 이를 관리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의 권위가 요구된다. 그 권위의 통신망은 도로, 다리, 통신이라는 3개의 고리가 지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 아래에는 아치가 없었으며 통신은 문자로 씌어지지 않았고, 도로에는 바퀴 달린 수레가 없었다.
처음 아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보다 실용적인 문화였던 로마인들이다. 로마의 반원형 아치는 구조적 혁신을 거듭하며 뾰족한 고딕식 아치로 변모하였다.
인류의 기념비들은 군왕들과 종교, 영웅들과 신조를 찬양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생각되어왔으나, 궁극적으로 찬미되는 것은 그것을 건설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명의 위대한 신전 건축은 개인이 곧 인류와 하나가 됨을 표현한다.
숨겨진 구조
우리의 문명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위대한 변형은 인간이 불을 사용하여 전혀 새로운 금속을 발견한 것이다. 불은 돌 속에 숨어 있는 구조를 쪼개어내는 화염의 칼인 셈이다.
금속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체계적인 제련 공정이 발견되고 나서였고, 제련공들은 기원전 3800년경 구리에 주석을 결합한 합금, ‘청동’이라는 경이로운 발견을 이룩한다.
원소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물질세계가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유용한 금속을 만들고 합금하는 기술이며, 또 하나는 연금술이다. 연금술은 일상생활에는 거의 실용성이 없는 황금에 집착하며, 상당 부분 사변적인 이론을 내포한다. 순금을 시금하는 방법을 통해 화학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매독의 치료법에 수은을 도입함으로써 현대 의학으로 가는 길목에 획기적인 이정표가 세워졌다. 이 시기 낡은 연금술을 새로운 연금술로 변화시킨 이가 파라셀수스이다. 화학과 의학 요법에서 우상파괴주의적인 사상을 전파한 파라셀수스가 떠난 지 200년 뒤 1730년에 화학자들은 불의 마지막 구현체로서 ‘플로지스톤’ 이론을 내세워 불의 물질 이론을 뒷받침하려 했다. 하지만 물활의 원리가 없는 바와 마찬가지로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은 없다. 이후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불의 본질이 아닌 공기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탈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반복하여 화학적 분해물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존 돌턴의 원자론이다.
천구의 음악
수학은 가장 세련되고 복잡한 과학이다. 수학은 인간 추론의 일부로서 인류의 지적 향상에 공헌한 합리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사상의 사닥다리였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람들은 말을 하듯 셈을 해왔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화음과 수학 간의 기본적인 관계를 발견했다. 자연과 숫자 사이의 일치론은 너무나 명백해서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은 자연의 음만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특성적 차원도 조화를 나타내는 단순한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이를테면 피타고라스나 그의 신봉자들은 음악적 간격에 연관시켜서 천체의 궤도를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천체의 운동은 천구의 음악이었다.
피타고라스는 그의 위대한 정리를 증명하고 난 다음 영감을 준 뮤즈신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100마리의 황소를 바쳤다. 하지만 피타고라스 수학의 정연한 체계를 만들고 명성을 떨치게 한 인물은 유클리드이다. 그의 저서 『기하학 원론』은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몇 세기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성행했던 또 다른 과학은 천문학이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천체 모형은 경이로울 정도로 복잡하지만 간단한 유추에서 시작한다. 달이 지구 둘레를 선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와 행성들은 지구 주위를 선회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600년경에 등장한 이슬람교가 가장 공들여 퍼뜨린 것은 그리스 발명품의 하나인 아스트롤라베(천문관측의)였다. 아랍 학자들이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단일 발명은 숫자 표기법으로, 우리가 지금도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십진법이다.
이슬람 수학자 알하젠은 원근법의 기본 원리를 발견했으며, 원근법이 자아낸 흥분은 15세기 북부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 미술로 옮겨갔다. 하지만 원근법은 단지 현상을 실물같이 부각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 속에서 대상이 움직이는 감각을 창출하려 했기에 한 사상의 학파를 이룰 만했다.
별의 사자
마야인들은 유럽보다 훨씬 앞선 수체계(그들에게는 ‘0’의 기호가 있었다)를 가지고 있었지만, 간단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의 운동을 작성한 적이 없었다. 왜 못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남반구의 하늘에 북극성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천문학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위대한 상상력, 즉 바퀴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체가 축을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은 콜럼버스가 출항할 때 그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 축은 둥근 지구였다.
천문학의 발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코페르니쿠스는 마흔 살에 처음 태양을 행성계의 중심에 두는 착상을 했으나 일흔 살에 가까운 1543년에 와서야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간, 천체를 태양 주위를 움직이는 하나의 단일 체계로서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후 70여 년이 지난 1610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별의 사자』라는 책을 발간하여,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직접 관찰한 목성 주위의 새로운 행성에 대해 썼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한 일이란 코페르니쿠스가 옮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순진한 생각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들쑤셔놓았다. 갈릴레이는 결국 이단 심문소의 재판을 받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자필 선서문을 쓴 후 아르체트리에 연금되어 일생을 보냈으며 일체의 출판이 금지되었다.
장엄한 시계장치
1642년 뉴턴이 태어날 당시는 천문학뿐만 아니라 과학 전반이 분수령에 서 있었다. 이제 미래의 역동적이고 인과율적인 설명으로 전진할 새로운 정신이 등장하고 있었다. 뉴턴은 1665년과 1666년 대역병이 돌던 시기 가장 창조적인 사상을 고안해냈다. 미적분학을 창안했고, 만유인력의 관념을 구상했으며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의 운동을 계산하여 즉시 시험해보았다. 렌즈 가장자리에 생기는 광선의 주름의 발생 원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빛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분할된 것임을 증명했다.
시간은 뉴턴 체계의 또 다른 절대적 요소다. 시간은 천체 지도를 작성하는 데 결정적이다. 대항해의 시대에 해양계는 완벽한 두 가지 도구, 망원경과 시계를 요구했다. 뉴턴의 이론들은 선상에서 시간을 정확하게 알릴 수 있는 시계가 있어야만 해상에서 실용화될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6주일 항해에 0.5도 이하의 오차를 내는 시계를 만드는 사람에게 2만 파운드의 상금을 걸었다. 이로 말미암아 발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그 이후 시간 관념이 과학과 우리의 일상생할을 지배하게끔 정착되었다.
뉴턴의 우주는 거의 200년 동안 순조롭게 작동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10대에 품었던 생각은 단순하다. “내가 광선을 타고 가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아인슈타인의 세계는 뉴턴과 전혀 다른 세계상이다. 뉴턴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틀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세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고, 장소와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아인슈타인은 지극히 단순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와 연구 활동이 보여준 것은 그 해답이 또한 단순할 경우, 우리는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동력을 찾아서
산업혁명은 1760년경에 시작된 장기적 변화의 연속이다. 산업혁명은 그것이 시골집에서 이루어지는 가내공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서 영국적인 성격을 띤다.
제임스 브린들리는 열일곱 살에 물레방아를 만들며 자수성가의 생애를 시작했다. 또한 공장과 광산의 토목공사를 하러 다니며 운하들을 독자적인 계획에 따라 조사하여 400마일이나 되는 운하를 건설, 영국 전역에 수로망을 형성했다. 운하망을 건설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두드러지는데 이것이 산업혁명 전반의 성격을 규정한다. 하나는 산업혁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실용적이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발명, 발견들이 일상생활에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운하를 통해 잡다한 물건들이 운반되었고, 촌락에서 생산된 물건들은 전국적인 교역이 가능해졌다.
산업혁명을 이룩한 사람들은 청교도 전통을 신봉했다. 존 윌킨슨 같은 제철업자들은 왕족이 아닌 자신의 얼굴을 각인한 주화를 만들어냈다. 윌킨슨은 1779년에 철교를 만들었고, 1787년에 철선을 만들었으며, 그의 시신은 철제관에 넣어 묻혔다.
당시 웨지우드와 같은 기업가들은 달협회를 형성했다. 달협회의 핵심 인물은 매슈 볼턴으로 그가 제임스 와트를 데려와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동력은 과학의 새로운 관심사, 어떤 의미로는 새로운 사상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과학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탐색하는 일에만 전념했지만 이제는 자연을 변형시켜 동력을 얻으며, 한 형태의 동력을 다른 형태의 동력으로 전환한다는 ‘에너지’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과학의 첨단에 나타났다.
창조의 사다리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는 1850년대에 두 사람에 의해 각각 제시되었다. 한 사람은 찰스 다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앨프레드 월리스이다. 다윈은 20대 초반에 비글호라는 측량선에 파견되었다. 거기서 5년을 보낸 후 다윈은 완전히 변했다. 그가 집에 돌아올 때쯤은, 종이 서로 고립되어 있을 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변한다는 것, 종은 변화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아직 종이 어떤 과정으로 분화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2년 후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얻게 되었지만 발표하기를 꺼려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이론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 월리스는 다윈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월리스는 다윈보다 열네 살 아래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토지 측량기사로 일했다.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전업 박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1848년 친구 헨리 베이츠와 함께 남아메리카로 갔다. 아마존 밀림의 수많은 변종들을 보면서 그도 다윈처럼 어떻게 해서 종이 그렇게 달리 발전해왔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858년 월리스는 문득 맬서스의 『인구론』을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서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다윈처럼 그도 맬서스를 통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다. 월리스는 다윈에게 자신이 찾은 해답을 적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다윈은 무척 당황했다. 20년 동안 입을 다물고 그 이론을 뒷받침할 사실들을 모아왔는데 어느날 자신의 논문을 간추려놓은 듯한 논문이 책상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나서서 두 사람의 논문을 린네학회에서 발표함으로써 난처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처음 그 논문들은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다윈이『종의 기원』을 집필해서 1859년에 출간하자 당장 물의를 일으켰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계 속의 세계
자연계에 있는 결정들의 기본 형태는 일곱 가지가 있으며 색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서로 다른 원소들이 유사한 결정체를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를 가장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람은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이다. 멘델레예프는 원자량의 순서에 따라 원소들을 배열하여 세로줄을 만드는데 일곱 개의 계단을 거치고 그 후 다음의 세로줄로 새로 시작한다면 배열되는 가로줄에는 같은 성질의 원소들이 배치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원소를 알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에 '빈칸'과 마주치게 되었다. 하지만 빈칸이 있다는 것, 발견되지 않은 원소가 있다는 착상이야말로 과학적인 영감이었다.
원소주기율표는 1897년 톰슨이 전자를 발견하면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전자를 발견함으로써 원소의 특징은 그 원자의 전자 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자량에서 원자번호로 관심이 옮겨졌다는 말은, 원자의 구조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었음을 뜻하며, 그것이 현대 물리학을 시작하게 한 지적인 돌파구다.
어떠한 인간의 상상력도 20세기의 물리학에 비견할 만한 기념비를 낳은 적이 없다. 원자들의 카드를 섞어놓은 멘델레예프, 원자는 분리될 수 없다는 그리스 시대의 관념을 뒤엎은 톰슨, 원자를 태양계의 구조로 전환시킨 러더퍼드와 그 모델을 활용한 닐스 보어…… 중성자를 발견한 채드윅, 중성자에 의한 핵변환을 시도한 페르미. 그리고 루트비히 볼츠만이 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그는 원자(세계 속의 세계)가 우리 자신의 세계만큼이나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볼츠만은 1906년 예순두 살의 나이에 원자론이 곧 승리하게 될 바로 그 순간에 패배감에 쫓겨 자살했다. 그를 기념해서 그의 무덤에는 ‘S=KlogW’라는 불멸의 공식이 조각되어 남아 있다.
지식과 확실성
물리학의 한 가지 목적은 물질세계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었다. 20세기에 물리학이 이룬 한 가지 업적이 있다면 그런 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천문 관측소는 1807년에 세워졌다. 그는 관찰자가 별을 볼 때 오차를 낳을 수 있는 숱한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별의 위치를 읽었고, 자연히 그 별의 위치에 대한 최상의 평가는 평균치, 즉 흩어진 수치의 중간이라고 생각했다. ‘가우스 곡선’, 우리는 진정한 위치가 그 곡선의 중간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불확실의 영역 내’에 있다는 것이며, 그 영역은 개별 관찰의 산포도로부터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새로운 사상들은 괴팅겐 대학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1921년 막스 보른이 물리학 과장으로 지명되자, 그는 원자물리학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련의 학술대회를 시작했다. 보른과 함께 여기서 전성기를 보낸 이가 하이젠베르크이다. 당시에는 전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두고 한창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27년 초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했다. 그는 전자가 입자이기는 하나 단지 한정된 정보를 주는 입자라고 했다. 이를테면 전자의 속도와 위치는 양자의 허용 한도 내에서 제한되도록 맞춰져 있다. 이는 과학사에 있어서도 위대한 과학적 사상의 하나이며, 그는 이를 ‘불확정성 원리’라고 불렀다.
레오 실라드는 어느날 하나의 중성자로 원자를 때리면 원자가 깨져서 두 개가 방출되어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연쇄 반응’이라는 용어가 들어 있는 특허의 자세한 설명서를 썼고 그 특허는 1934년에 등록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쟁은 점점 험악해져갔고, 핵물리학의 진보는 히틀러의 행군과 보조를 맞추어 나아갔다. 마침내 1939년 실라드는 루스벨트에게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실라드는 실패했다. 그와 함께 과학자 사회도 실패했다.
이어지는 세대
19세기 인간의 진보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 그레고르 멘델이 도착함으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농부의 아들로 수도사가 된 멘델은 교사로서 정식 학위를 받기 위해 빈 대학에 갔다. 하지만 시험관은 그가 ‘지식에 있어서 필수적인 명확성과 통찰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판정하고 그를 낙제시켰다. 1853년 그가 빈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서른한 살의 실패자였다. 멘델은 빈에서 돌아온 지 2~3년 후인 1856년경부터 8년간 완두콩 실험을 시작한다. 그는 실험을 위해 완두콩의 서로 다른 일곱 개의 차이점을 선택했다. 그러나 같은 염색체에 두 개의 유전자를 갖지 않고서는, 그러므로 최소한 부분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일곱 개의 다른 특성을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누구도 유전자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연결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원고는 매 페이지마다 모든 것이 현대 유전학이다.
유전의 정보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방법은 1953년에 발견되었으며 그것은 20세기 과학의 모험담이다. 20대의 청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1951년 케임브리지에 도착하여 팀을 이뤄 DNA의 구조를 해독하려던 참이었다. 앞서 10년간 핵산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의 화학적 정보를 운반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지만 그 화학적 성분과 구조는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1952년 구조화학의 위대한 천재 라이너스 폴링이 캘리포니아에서 삼중 나선형 모델을 제시했다. 당분과 인산이 중앙에서 길게 뼈대를 형성하고 염기는 그 뼈대에 꽂혀서 모든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 논문이 케임브리지에 도착했을 때 왓슨과 크릭은 그 논문이 시작부터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중요한 생물학적 대상은 쌍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으며 뼈대가 바깥에 있는 구조를 찾기 시작했다. 즉 당과 인산이 두 개의 난간처럼 되어 있는 일종의 나선형 계단을 생각해냄으로써 DNA의 분자구조를 밝혀낸 것이다.
긴 유년 시대
인간에게는 두뇌가 행동의 도구이기 전에 준비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한 영역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전엽은 손상을 입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년 시절의 오랜 준비 기간이다. 과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우리는 유태성숙인 것이다. 사실 문명은 가능성을 이해하는 학습을 하느라고 가장 긴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지적 지도력은 과학자에게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과학 역시 정부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정부는 힘의 원천인 과학의 고삐를 쥐고 흔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과학이 길을 잘못 들어선다면 20세기의 믿음들은 냉소 속에서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이 인간의 독특함을 인정하지 않거나 과학적 재능과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에 두지 않는 한 현세기에는 어떤 믿음도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 할 일은 지상의 부가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계승하는 것이다. 도덕적 상상력이 없이는 인간과 믿음과 과학은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소개
지은이 :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옮긴이 : 김은국Richard E. Kim
중국과 소련에 흩어져 사는 한국 이민을 다룬 다큐멘터리 시리즈, <소련의 잃어버린 한국인을 찾아서>(1988) <거대한 시베리아 횡단철도>(1989) 등을 포함해 KBS-TV에서 다수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저서에 『순교자』(1964), 『죄없는 사람』(1968), 『잃어버린 이름』(1970), 포토에세이 『소련과 중국, 그리고 잃어버린 동족들』(1989) 등이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인류가 이룩한 눈부신 문화적 산봉우리의 연속을 타고 오르는 지적인 대장정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인 석학 브로노우스키가 만사를 제쳐두고 착수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그의 생명을 소진하게 했을 만큼 힘든 작업이었고, 결국 그는 평생의 걸작이 된 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육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책은 원시 인류의 진화에서부터 현대 핵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위대한 정신과 무한한 가능성을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 책의 원제 The Ascent of Man은 다윈의 유명한 저서 The Descent of Man을 떠올리게 한다. 즉, 다윈이 보잘것없는 원시인에서 현대의 인간으로 진화해 내려온 생물학적인 진화의 과정을 ‘The Descent of Man'이라는 용어에 집약하고 있다면 브로노우스키는 인간이 상상력과 이성, 정서적 예민함과 강인성으로 환경을 변화시켜온 문화적 진화의 상승 과정을 ‘The Ascent of Man'이라는 이름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분명 과학사를 다루고 있으나 여기서의 과학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며 자연과학이라는 영역을 뛰어넘어 예술, 문학, 종교, 기술, 건축 등 문화적 진화 일반까지를 아우른다. 부싯돌에서 기하학에 이르고, 건축물의 아치에서 상대성이론에 이르는 발명과 발견은 자연을 이해하고 또 그것을 지배하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의 표현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 속에 담겨 있는 지적 세계의 방대함보다 우리를 더욱 매혹하는 것은 브로노우스키의 유려한 문학적 비유와 함께 신비로울 만큼 유연하고 유기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관념과 지식들의 ‘체계’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단지 문화적 진화의 ‘역사’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 즉 브로노우스키에 따르면 현대판 ‘자연철학’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과학사 책과 구별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어린아이의 두개골을 통해 인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제는 문화적 화석이 되어버린 스칸디나비아 최북단 랩족의 이동생활을 통해 빙하시대를 이겨온 지혜로운 인간의 특성을 살펴본다. 고대 예리코의 오아시스에서 잡종 밀의 개량이 가져다준 농업혁명의 폭발적인 변화, 말의 가축화가 유목경제에 미친 영향, 안데스 산맥의 고원에서 꽃핀 잉카 문명이 신세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세계에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차이와 연금술로부터 시작된 현대 과학으로의 발전, 아랍인들이 가장 공들였던 천문학과 수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체 모형과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 갈릴레이의 이단 심문 재판소에서 벌어진 희극적 사건, 대역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은 시기에 유율법(미적분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경이로운 물리학적 상상력, “내가 광선을 타고 가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하여 뉴턴의 절대적 시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아인슈타인, 산업혁명을 이끌고 나간 영국 달협회 기업가들의 실용적인 정신, 다윈과 똑같은 궤적을 따라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얻고도 그 이름이 가리워져 있었던 앨프레드 월리스, 핵물리학의 발전이 대량 살상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던 레오 실라드 그리고 대량 살상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에 이르기까지.
브로노우스키의 시선은 인간이 자신의 지적 지평을 확장해간 역사적인 공간과 그 파괴의 현장에 도달한다. 하나의 봉우리가 또 다른 봉우리를 오르는 발판이 되는 이 유기적인 서사의 방대한 여정 속에서 브로노우스키는 인간에 대한 기꺼운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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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20세기의 르네상스인 브루노우스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휴머니스트로서 그가 평생을 두고 고민했던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그 독특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였다. 브로노우스키는 1908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했을 때 가족을 따라 독일로 이주했으며, 1920년에 다시 런던으로 이주하여 영국에 귀화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으며 수학을 공부했고, 기하학과 위상수학에 대한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헐(Hull)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문학과 과학을 한 가지 경험의 두 가지 다른 언어로 생각했던 브로노우스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진보적인 문예잡지 <실험Experiment>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특히 시에 조예가 깊어 직접 시작(詩作)을 하는 한편 『시론The Poet's Defence』(1939), 『윌리엄 블레이크:가면을 벗은 인간William Blake:A Man Without a Mask』(1965)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2년 그는 헐 대학교를 떠나 내무부의 군사연구소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시과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브로노우스키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나가사키 공군기지에 내리는 순간 그의 삶은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주적인 한순간이었고 별안간 만나게 된 이 모든 경험은 ‘전 인류의 경험’이었다고 그의 저서『과학과 인간의 가치Science and Human Value』에서 밝히고 있다.
이후 그는 타웅(Taung)에서 발견된 어린이의 두개골이 인류의 조상인지를 밝히는 통계학적 연구에 참여하면서 관심을 생명과학으로 옮겨갔다. 같은 시기 텔레비전 매체의 효력을 인식한 브로노우스키는 종종 텔레비전 과학 프로그램에 나와 어려운 과학적 개념을 쉽게 설명하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주었다. 생명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브로노우스키는 생물학과 인간학을 통합하는 연구를 목적으로 세워진 솔크 생물학연구소의 창단 멤버로 참여하여 1964년에 선임연구원이 되었다.
그의 중요한 마지막 프로젝트는 ‘The Ascent of Man'이라는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쓰고 해설하는 일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1973년 전 세계적으로 절찬을 받으며 방영되었고 그 해 책으로 출간되어 상당 기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 속으로
천사 아래 있는 존재
브로노우스키의 여정은 동아프리카 오모 강에서 시작된다. 그는 적도 부근 타웅에서 발견된 200만여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어린아이의 두개골을 통해 인간의 동물적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로 이르는 인간의 종적 진화의 결과는 사회적 행동과 의사소통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인류는 모든 발명 가운데서도 최대의 걸작품인 불을 발명하여 빙하시대를 이겨냈다. 불은 화로의 상징이며, 3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손자국을 남기기 시작한 이래 그 화로는 동굴이었다. 줄잡아 100만 년 동안 인간은 채집과 수렵으로 살았으며, 동굴벽화와 같은 생생한 예술이 이를 증거한다. 브로노우스키는 그곳에 표현된 마력과 같은 힘을 ‘선견력’이라고 단언한다. 앞을 내다보는 상상력, 즉 사냥꾼은 기공을 통하듯 그 그림을 통해 사냥의 공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적 진화란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끊임없는 성장과 확대이므로, 그들은 인간의 등정을 따라 앞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계절의 수확
인간의 문명은 1만 2,000년 전 ‘농업혁명’이라는 폭발적인 사건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빙하기가 끝날 즈음 새로운 식물이 무성해지면서 중동 지역에 잡종 밀이 나타났다. 그 전형적인 장소가 고대 예리코의 오아시스다. 구세계에서 농업이 확산되는 전환점은 엠머밀과 빵밀이라는 두 가지 잡종 밀이 나타나면서부터다. 밀과 물은 하나가 되었고, 예리코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오래지 않아 이웃 부족들의 선망의 표적이 되었다. 이스라엘 부족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하여 기원전 1400년경에 비옥한 땅 예리코를 정복했다. 『성서』는 유목과 목축을 주업으로 하다가 농경부족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한 민족의 역사다.
정착농업은 기술을 창조하며, 기술로부터 모든 물리학과 과학이 생겨난다. 낫, 쐐기, 바퀴, 관개시설의 설계, 사역동물의 활용 등. 하지만 농업과 더불어 동물의 가축화는 유목경제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무엇보다 말의 가축화는 칭기즈칸의 몽고 대군이 중국과 이슬람 국가들을 정복하고 유럽의 문턱까지 진출하게 한 힘과 조직력의 기본이 되었다. 칭기즈칸은 유목민이요, 강력한 전쟁기계의 발명가였다. 하지만 그의 제5대 왕위 상속자 올제이투 칸은 결국 페르시아에 정착하여 이슬람 교도로, 건설왕으로 명성을 드높이며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몽고 유목민의 몰락으로서는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돌의 결
일찍부터 인간은 돌을 다듬어 연장을 만들었다. 때로는 돌이 천연적인 결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연장을 만드는 사람이 돌을 치는 방법을 배워 벽개면을 만들어냈다. 사물의 건축술은 포면 아래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 구조란 숨겨진 결로서 그것이 드러났을 때는 자연의 형태를 분해하여 새로운 배열 방식으로 재조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론과학이 시작되는 인간 등정의 단계다.
마추픽추는 1500년경 잉카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되었다. 이들의 계단식 농경문화의 핵심에는 관개시설이 있으며 이를 관리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의 권위가 요구된다. 그 권위의 통신망은 도로, 다리, 통신이라는 3개의 고리가 지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 아래에는 아치가 없었으며 통신은 문자로 씌어지지 않았고, 도로에는 바퀴 달린 수레가 없었다.
처음 아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보다 실용적인 문화였던 로마인들이다. 로마의 반원형 아치는 구조적 혁신을 거듭하며 뾰족한 고딕식 아치로 변모하였다.
인류의 기념비들은 군왕들과 종교, 영웅들과 신조를 찬양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생각되어왔으나, 궁극적으로 찬미되는 것은 그것을 건설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명의 위대한 신전 건축은 개인이 곧 인류와 하나가 됨을 표현한다.
숨겨진 구조
우리의 문명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위대한 변형은 인간이 불을 사용하여 전혀 새로운 금속을 발견한 것이다. 불은 돌 속에 숨어 있는 구조를 쪼개어내는 화염의 칼인 셈이다.
금속의 사용이 일반화된 것은 체계적인 제련 공정이 발견되고 나서였고, 제련공들은 기원전 3800년경 구리에 주석을 결합한 합금, ‘청동’이라는 경이로운 발견을 이룩한다.
원소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물질세계가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유용한 금속을 만들고 합금하는 기술이며, 또 하나는 연금술이다. 연금술은 일상생활에는 거의 실용성이 없는 황금에 집착하며, 상당 부분 사변적인 이론을 내포한다. 순금을 시금하는 방법을 통해 화학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매독의 치료법에 수은을 도입함으로써 현대 의학으로 가는 길목에 획기적인 이정표가 세워졌다. 이 시기 낡은 연금술을 새로운 연금술로 변화시킨 이가 파라셀수스이다. 화학과 의학 요법에서 우상파괴주의적인 사상을 전파한 파라셀수스가 떠난 지 200년 뒤 1730년에 화학자들은 불의 마지막 구현체로서 ‘플로지스톤’ 이론을 내세워 불의 물질 이론을 뒷받침하려 했다. 하지만 물활의 원리가 없는 바와 마찬가지로 플로지스톤이라는 물질은 없다. 이후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불의 본질이 아닌 공기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탈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반복하여 화학적 분해물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존 돌턴의 원자론이다.
천구의 음악
수학은 가장 세련되고 복잡한 과학이다. 수학은 인간 추론의 일부로서 인류의 지적 향상에 공헌한 합리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사상의 사닥다리였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람들은 말을 하듯 셈을 해왔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화음과 수학 간의 기본적인 관계를 발견했다. 자연과 숫자 사이의 일치론은 너무나 명백해서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은 자연의 음만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특성적 차원도 조화를 나타내는 단순한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다. 이를테면 피타고라스나 그의 신봉자들은 음악적 간격에 연관시켜서 천체의 궤도를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천체의 운동은 천구의 음악이었다.
피타고라스는 그의 위대한 정리를 증명하고 난 다음 영감을 준 뮤즈신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100마리의 황소를 바쳤다. 하지만 피타고라스 수학의 정연한 체계를 만들고 명성을 떨치게 한 인물은 유클리드이다. 그의 저서 『기하학 원론』은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몇 세기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성행했던 또 다른 과학은 천문학이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천체 모형은 경이로울 정도로 복잡하지만 간단한 유추에서 시작한다. 달이 지구 둘레를 선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와 행성들은 지구 주위를 선회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600년경에 등장한 이슬람교가 가장 공들여 퍼뜨린 것은 그리스 발명품의 하나인 아스트롤라베(천문관측의)였다. 아랍 학자들이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단일 발명은 숫자 표기법으로, 우리가 지금도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십진법이다.
이슬람 수학자 알하젠은 원근법의 기본 원리를 발견했으며, 원근법이 자아낸 흥분은 15세기 북부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 미술로 옮겨갔다. 하지만 원근법은 단지 현상을 실물같이 부각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 속에서 대상이 움직이는 감각을 창출하려 했기에 한 사상의 학파를 이룰 만했다.
별의 사자
마야인들은 유럽보다 훨씬 앞선 수체계(그들에게는 ‘0’의 기호가 있었다)를 가지고 있었지만, 간단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의 운동을 작성한 적이 없었다. 왜 못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남반구의 하늘에 북극성이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천문학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위대한 상상력, 즉 바퀴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체가 축을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은 콜럼버스가 출항할 때 그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 축은 둥근 지구였다.
천문학의 발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코페르니쿠스는 마흔 살에 처음 태양을 행성계의 중심에 두는 착상을 했으나 일흔 살에 가까운 1543년에 와서야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간, 천체를 태양 주위를 움직이는 하나의 단일 체계로서 수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후 70여 년이 지난 1610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별의 사자』라는 책을 발간하여,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직접 관찰한 목성 주위의 새로운 행성에 대해 썼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한 일이란 코페르니쿠스가 옮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순진한 생각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들쑤셔놓았다. 갈릴레이는 결국 이단 심문소의 재판을 받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자필 선서문을 쓴 후 아르체트리에 연금되어 일생을 보냈으며 일체의 출판이 금지되었다.
장엄한 시계장치
1642년 뉴턴이 태어날 당시는 천문학뿐만 아니라 과학 전반이 분수령에 서 있었다. 이제 미래의 역동적이고 인과율적인 설명으로 전진할 새로운 정신이 등장하고 있었다. 뉴턴은 1665년과 1666년 대역병이 돌던 시기 가장 창조적인 사상을 고안해냈다. 미적분학을 창안했고, 만유인력의 관념을 구상했으며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의 운동을 계산하여 즉시 시험해보았다. 렌즈 가장자리에 생기는 광선의 주름의 발생 원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빛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분할된 것임을 증명했다.
시간은 뉴턴 체계의 또 다른 절대적 요소다. 시간은 천체 지도를 작성하는 데 결정적이다. 대항해의 시대에 해양계는 완벽한 두 가지 도구, 망원경과 시계를 요구했다. 뉴턴의 이론들은 선상에서 시간을 정확하게 알릴 수 있는 시계가 있어야만 해상에서 실용화될 수 있었다. 영국 정부는 6주일 항해에 0.5도 이하의 오차를 내는 시계를 만드는 사람에게 2만 파운드의 상금을 걸었다. 이로 말미암아 발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그 이후 시간 관념이 과학과 우리의 일상생할을 지배하게끔 정착되었다.
뉴턴의 우주는 거의 200년 동안 순조롭게 작동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10대에 품었던 생각은 단순하다. “내가 광선을 타고 가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아인슈타인의 세계는 뉴턴과 전혀 다른 세계상이다. 뉴턴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틀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인슈타인의 세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고, 장소와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아인슈타인은 지극히 단순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와 연구 활동이 보여준 것은 그 해답이 또한 단순할 경우, 우리는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동력을 찾아서
산업혁명은 1760년경에 시작된 장기적 변화의 연속이다. 산업혁명은 그것이 시골집에서 이루어지는 가내공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서 영국적인 성격을 띤다.
제임스 브린들리는 열일곱 살에 물레방아를 만들며 자수성가의 생애를 시작했다. 또한 공장과 광산의 토목공사를 하러 다니며 운하들을 독자적인 계획에 따라 조사하여 400마일이나 되는 운하를 건설, 영국 전역에 수로망을 형성했다. 운하망을 건설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두드러지는데 이것이 산업혁명 전반의 성격을 규정한다. 하나는 산업혁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실용적이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발명, 발견들이 일상생활에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운하를 통해 잡다한 물건들이 운반되었고, 촌락에서 생산된 물건들은 전국적인 교역이 가능해졌다.
산업혁명을 이룩한 사람들은 청교도 전통을 신봉했다. 존 윌킨슨 같은 제철업자들은 왕족이 아닌 자신의 얼굴을 각인한 주화를 만들어냈다. 윌킨슨은 1779년에 철교를 만들었고, 1787년에 철선을 만들었으며, 그의 시신은 철제관에 넣어 묻혔다.
당시 웨지우드와 같은 기업가들은 달협회를 형성했다. 달협회의 핵심 인물은 매슈 볼턴으로 그가 제임스 와트를 데려와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동력은 과학의 새로운 관심사, 어떤 의미로는 새로운 사상이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과학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탐색하는 일에만 전념했지만 이제는 자연을 변형시켜 동력을 얻으며, 한 형태의 동력을 다른 형태의 동력으로 전환한다는 ‘에너지’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과학의 첨단에 나타났다.
창조의 사다리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는 1850년대에 두 사람에 의해 각각 제시되었다. 한 사람은 찰스 다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앨프레드 월리스이다. 다윈은 20대 초반에 비글호라는 측량선에 파견되었다. 거기서 5년을 보낸 후 다윈은 완전히 변했다. 그가 집에 돌아올 때쯤은, 종이 서로 고립되어 있을 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변한다는 것, 종은 변화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아직 종이 어떤 과정으로 분화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2년 후 종의 진화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얻게 되었지만 발표하기를 꺼려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이론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 월리스는 다윈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월리스는 다윈보다 열네 살 아래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토지 측량기사로 일했다.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전업 박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1848년 친구 헨리 베이츠와 함께 남아메리카로 갔다. 아마존 밀림의 수많은 변종들을 보면서 그도 다윈처럼 어떻게 해서 종이 그렇게 달리 발전해왔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858년 월리스는 문득 맬서스의 『인구론』을 생각하게 되었고 거기서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다윈처럼 그도 맬서스를 통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다. 월리스는 다윈에게 자신이 찾은 해답을 적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다윈은 무척 당황했다. 20년 동안 입을 다물고 그 이론을 뒷받침할 사실들을 모아왔는데 어느날 자신의 논문을 간추려놓은 듯한 논문이 책상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이 나서서 두 사람의 논문을 린네학회에서 발표함으로써 난처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처음 그 논문들은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다윈이『종의 기원』을 집필해서 1859년에 출간하자 당장 물의를 일으켰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계 속의 세계
자연계에 있는 결정들의 기본 형태는 일곱 가지가 있으며 색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서로 다른 원소들이 유사한 결정체를 형성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를 가장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람은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이다. 멘델레예프는 원자량의 순서에 따라 원소들을 배열하여 세로줄을 만드는데 일곱 개의 계단을 거치고 그 후 다음의 세로줄로 새로 시작한다면 배열되는 가로줄에는 같은 성질의 원소들이 배치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모든 원소를 알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에 '빈칸'과 마주치게 되었다. 하지만 빈칸이 있다는 것, 발견되지 않은 원소가 있다는 착상이야말로 과학적인 영감이었다.
원소주기율표는 1897년 톰슨이 전자를 발견하면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전자를 발견함으로써 원소의 특징은 그 원자의 전자 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자량에서 원자번호로 관심이 옮겨졌다는 말은, 원자의 구조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었음을 뜻하며, 그것이 현대 물리학을 시작하게 한 지적인 돌파구다.
어떠한 인간의 상상력도 20세기의 물리학에 비견할 만한 기념비를 낳은 적이 없다. 원자들의 카드를 섞어놓은 멘델레예프, 원자는 분리될 수 없다는 그리스 시대의 관념을 뒤엎은 톰슨, 원자를 태양계의 구조로 전환시킨 러더퍼드와 그 모델을 활용한 닐스 보어…… 중성자를 발견한 채드윅, 중성자에 의한 핵변환을 시도한 페르미. 그리고 루트비히 볼츠만이 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그는 원자(세계 속의 세계)가 우리 자신의 세계만큼이나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볼츠만은 1906년 예순두 살의 나이에 원자론이 곧 승리하게 될 바로 그 순간에 패배감에 쫓겨 자살했다. 그를 기념해서 그의 무덤에는 ‘S=KlogW’라는 불멸의 공식이 조각되어 남아 있다.
지식과 확실성
물리학의 한 가지 목적은 물질세계를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었다. 20세기에 물리학이 이룬 한 가지 업적이 있다면 그런 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천문 관측소는 1807년에 세워졌다. 그는 관찰자가 별을 볼 때 오차를 낳을 수 있는 숱한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별의 위치를 읽었고, 자연히 그 별의 위치에 대한 최상의 평가는 평균치, 즉 흩어진 수치의 중간이라고 생각했다. ‘가우스 곡선’, 우리는 진정한 위치가 그 곡선의 중간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불확실의 영역 내’에 있다는 것이며, 그 영역은 개별 관찰의 산포도로부터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새로운 사상들은 괴팅겐 대학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1921년 막스 보른이 물리학 과장으로 지명되자, 그는 원자물리학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련의 학술대회를 시작했다. 보른과 함께 여기서 전성기를 보낸 이가 하이젠베르크이다. 당시에는 전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두고 한창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927년 초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했다. 그는 전자가 입자이기는 하나 단지 한정된 정보를 주는 입자라고 했다. 이를테면 전자의 속도와 위치는 양자의 허용 한도 내에서 제한되도록 맞춰져 있다. 이는 과학사에 있어서도 위대한 과학적 사상의 하나이며, 그는 이를 ‘불확정성 원리’라고 불렀다.
레오 실라드는 어느날 하나의 중성자로 원자를 때리면 원자가 깨져서 두 개가 방출되어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연쇄 반응’이라는 용어가 들어 있는 특허의 자세한 설명서를 썼고 그 특허는 1934년에 등록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쟁은 점점 험악해져갔고, 핵물리학의 진보는 히틀러의 행군과 보조를 맞추어 나아갔다. 마침내 1939년 실라드는 루스벨트에게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실라드는 실패했다. 그와 함께 과학자 사회도 실패했다.
이어지는 세대
19세기 인간의 진보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 그레고르 멘델이 도착함으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농부의 아들로 수도사가 된 멘델은 교사로서 정식 학위를 받기 위해 빈 대학에 갔다. 하지만 시험관은 그가 ‘지식에 있어서 필수적인 명확성과 통찰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판정하고 그를 낙제시켰다. 1853년 그가 빈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서른한 살의 실패자였다. 멘델은 빈에서 돌아온 지 2~3년 후인 1856년경부터 8년간 완두콩 실험을 시작한다. 그는 실험을 위해 완두콩의 서로 다른 일곱 개의 차이점을 선택했다. 그러나 같은 염색체에 두 개의 유전자를 갖지 않고서는, 그러므로 최소한 부분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일곱 개의 다른 특성을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누구도 유전자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연결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원고는 매 페이지마다 모든 것이 현대 유전학이다.
유전의 정보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방법은 1953년에 발견되었으며 그것은 20세기 과학의 모험담이다. 20대의 청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1951년 케임브리지에 도착하여 팀을 이뤄 DNA의 구조를 해독하려던 참이었다. 앞서 10년간 핵산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유전의 화학적 정보를 운반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지만 그 화학적 성분과 구조는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1952년 구조화학의 위대한 천재 라이너스 폴링이 캘리포니아에서 삼중 나선형 모델을 제시했다. 당분과 인산이 중앙에서 길게 뼈대를 형성하고 염기는 그 뼈대에 꽂혀서 모든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 논문이 케임브리지에 도착했을 때 왓슨과 크릭은 그 논문이 시작부터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중요한 생물학적 대상은 쌍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으며 뼈대가 바깥에 있는 구조를 찾기 시작했다. 즉 당과 인산이 두 개의 난간처럼 되어 있는 일종의 나선형 계단을 생각해냄으로써 DNA의 분자구조를 밝혀낸 것이다.
긴 유년 시대
인간에게는 두뇌가 행동의 도구이기 전에 준비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한 영역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전엽은 손상을 입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년 시절의 오랜 준비 기간이다. 과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우리는 유태성숙인 것이다. 사실 문명은 가능성을 이해하는 학습을 하느라고 가장 긴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의 지적 지도력은 과학자에게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과학 역시 정부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정부는 힘의 원천인 과학의 고삐를 쥐고 흔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과학이 길을 잘못 들어선다면 20세기의 믿음들은 냉소 속에서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이 인간의 독특함을 인정하지 않거나 과학적 재능과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에 두지 않는 한 현세기에는 어떤 믿음도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 할 일은 지상의 부가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계승하는 것이다. 도덕적 상상력이 없이는 인간과 믿음과 과학은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