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추천글
우리는 이 문명의 관객이 될 수 있는가?
과학기술과 미디어가 벌이는 혼란스러운 연극에서 우리는 관객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의 연희에 휩쓸려 환호하고 열광하는 조연이 아니라
낯설게 바라보는, 조망하는, 그리고 성찰하는 관객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의 기술문명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상상 속의 세계였던 우주는 서서히 그 비밀의 베일을 벗고 있으며, 유전공학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이종 생물의 교합을 가능하게 했다. 사체의 언저리를 맴돌던 벌레로 살인자를 알 수도 있고, 극복 가능한 질병의 목록도 쌓이고 있다. 이렇듯 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질주하고 있다. 언론은 과학 전문가 그룹이 내놓는 장밋빛 전망과 과학의 ‘황금시대’를 선전하기 바쁘고, 드라마와 영화 등의 영상 미디어는 기술문명의 흔적을 재빨리 좇아가며, 더러는 한 발 앞서 가며 전파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문명의 질주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저자는 이 책의 독자이자 기술문명과 미디어의 수용자인 우리에게, 과학기술과 미디어가 벌이는 연극 속에 끼어들어 환호하고 열광하는 조연이 아니라 조망하고 성찰하는 관객이 될 것을 주문한다. 때로는 드라마와 영화 속에, 때로는 전시회와 국가적 이벤트 속에, 때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 질병의 창궐과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비롯된 문제들 속에 숨어 있는 현대 기술문명이 만들어 낸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파헤치고 과학 발전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경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 시대 “문명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과학담론에 있어 한국적 상황에 천착한 독특한 시도
과학사, 과학철학을 비롯해 사회의 과학담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은 적지 않게 나와 있다. 그러나 모두 외국의 사례이거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허무한 이야기들이다. 또한 ‘과학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책들은 결국 ‘과학과 생활의 편리함’ ‘생명윤리 논쟁’ ‘과학과 원자폭탄’ 등과 같은 단선적인 이야기 내지는 과학계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쉽게’ 풀어 주는 데 그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과학기술 담론의 성격’과 관련하여 철저하게 한국적 상황에 천착해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철저히 ‘일상’에 기초하여, 미디어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소화된 이론과 사유 그리고 유려한 필체로 전개되는 이 책은 한국 사회 과학담론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대상이 되는 미디어는 단지 언론 매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 주변의 많은 현상들을 미디어로 파악하고 이들이 ‘보여 주는’ 모습에서 맥락을 찾는다. 특히 영상 매체, 즉 볼거리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 이를 통해 뭔가 ‘보여 주기’ 위해 애쓰는 온갖 영상 미디어와 뭔가 보기 위해 모여드는 ‘구경꾼’으로서의 우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풍부한 의미 작용들을 그려 내고 있다. 영상 미디어를 포함한 시각적 자극과 그와 관련된 담론은 과학기술과 관련한 대중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런 미디어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로 채워진다. 따라서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뉴스 보도 화면, 보도 사진, 전시회, 성형수술, 블로그, UCC 등 모든 것들이 이 책의 대상이 된다.
과학기술에 드러난 왜곡된 욕망
과학의 발전은 결국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 강해지고 싶고, 더 아름다워지고 싶고, 더 편해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인간은 기술을 발전시켰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타고난 것으로 간주되던 아름다움은 그 기준이 변하고 외모에 따른 사회적 차별이 강화되면서 이제 하나의 선택사항이 되었다. 인체에 대한 지식이 늘고 의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자신의 신체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게 되었으며(엄청난 위험성을 무릅쓰고라도), 단순히 얼굴의 생김새뿐 아니라 ‘날씬’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다이어트 역시 ‘산업’의 범주에 들게 되었다. 몸과 몸의 무게를 둘러싼 이야기는 이제 의학계의 입을 빌어 개인의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미적 만족감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다이어트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신체, 생명의 소중함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플라스티나이제이션이라는 시체 가공술을 개발한 군터 폰 하겐스는 실제 인간의 시체를 전시하며 세계를 순회하고 있고(우리나라는 이 그로테스크한 전시회에 ‘과학’과 ‘교육’, ‘체험’이라는 이름을 붙여 ‘국립서울과학관’에서 전시했다), 더 많은 고기를 더 싼 값에 얻고자 한 욕망은 돌이킬 수 없는 질병의 형태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과 똑같이 움직이는 기계를 개발하려는 노력 역시 결국 인간과 생명에 대한 기계적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무엇이 은폐되었는가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작년 초여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을 거부하는 데만 몸을 맡겼다. 공포에 의지하는 행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공포감이 무뎌짐에 따라 결속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광우병에 대한 거부감만 남은 채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는 효과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지나친 육류 소비와 그로 인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반 년 전,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유출되었다. 두 대형 선박의 명백한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이 분명함에도 결국 수습은 거주민과 ‘국민’의 자원봉사의 의지하게 되었다. 미디어는 연일 ‘감동의 물결’을 상찬하기에 바빴고, 자원봉사의 손길이 모자라다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 ‘태안의 기적’을 이야기하고 ‘한국민의 저력’을 과시하는 동안 지역 주민들에 대한 보상, 무분별한 유처리제 사용, 방제 작업자의 건강 이상에 대한 의료적 판단은 전면에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다. 아울러 현대인의 생활 방식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석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우리 문명에 대한 성찰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본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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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성형 _ 아름다움에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
인터넷과 신문, 방송, 여기저기서 성형외과 의사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10년 전에는 “자녀에게 성형수술을 선물”하라더니, 5년 전에는 “아내와 남편에게”, 요즘엔 “부모님께 실버 성형을 선물하라”는 칼럼을 쓴다. (중략) 위험에 대한 사람의 감각은 대단히 불완전하다. 사람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이, 위험에 대한 감각에서 만큼은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욕망’이 작동하는 특유의 방식이, 하나의 국면에서, 이성과 비이성이 혼재해 나타나도록 이끄는 건지도 모른다. 음식물에 있어서는 수백만 분의 일의 위험성도 받아들일 수 없으면서,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그 수천 배의 위험성일지라도 무릅쓸 만하다는 태도는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그 ‘아름다움’이 어떤 아름다움이냐는 질문도 필요하겠지만, “목숨 걸고 성형수술하세요”라고 유혹하지는 않는다. 위험성은 대개 은폐되거나 과소평가된다.
<인체의 신비> _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스펙터클
시체를 가지고 만들어 낸 〈인체의 신비〉 전에서의 ‘에코르셰’들에 아이들의 시선이 어디에 가 머물지 상상하기는 어렵다. 지나치게 복잡한 그 구조의 어디에 시선을 집중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어른들의 그것과 닮았는지, 어떤 목표의식을 가지고 관찰은 하고 있는지, 그 관람이 인체에 대한 시각에, 아이의 정서와 생명에 대한 관념에 장차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중략) “미취학 아동 3000원”이라는 안내문에서 K가 느꼈던 구토는, 미취학 아동이 그것을 보면 해로울 것이라는 확신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을 관람시키는 무지막지한 상업성과 학부모와 교사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것이 소위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공연이나 영화보다 덜 해롭다거나, ‘교육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시체들과, 갖가지 모양으로 저며 놓은 조각들 사이에서 아이들의 눈망울이 보이는 듯하다. 그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이미 어른이 돼 버린 K로서는 알 수가 없다. 시체 처리 방식만 기술적으로 뚜렷한 것일 뿐, 전시회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지극히 불분명하다. 그 불확실함 속에서, 그나마 견고하게 뭉쳐있는 건 어른들의 ‘욕망’이라고, 느낀다.
<닥터 하우스> _ 메디컬 드라마의 환자, 그 기계적 신체와 동화적 치료
거의 모든 ‘의학 드라마’라는 것에서 일관성 있게 보이는 원칙이 있다. 환자의 몸은 고장 난 기계가 솜씨 좋은 기술자에 의해 수리되듯 그렇게 치료된다. 거기서 ‘첨단 의학’이라는 기술적 개입은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 하우스의 환자들이 감정 없는 로봇처럼 묘사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질환에 사회적이거나 심리적인 요인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닥터 하우스는 철저히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한다. 그에게 생의학biomedicine이 아닌 다른 모든 ‘대안적’ 의료는 “사기꾼들의 수작”일 뿐이다. 환자는 의학 발전을 위한 ‘교재’이기도 하며, 한 사람을 실수로 죽이더라도 그것이 나중에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지식을 남겨 주는 경우라면 용인할 만하다는, 고전적인 의학 발전의 신화를 믿는다.
한국 최초의‘우주인’_ 이미 진부해진 스펙터클 이벤트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의 기존 우주 관광 프로그램과 다를 게 없는 일정인 탓에, 가능한 한 최소한의 동작으로 빠른 시간 안에 해치울 수 있는 간단한 실험 18가지 항목을 삽입했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교육용 CD를 제작하기 위한 것이거나, 학술적 가치를 가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그런데 실험 제목은 그럴듯하게 붙는 것들로 채워졌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주 공간에서의 초파리를 이용한 중력 반응 및 노화 유전자의 탐색”이라는 제목이 붙은 실험은, 초파리를 우주선에 태우고 갔다가 올 때 그냥 다시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 한 번의 실험으로는 어떤 결론도 말하기 힘든 것들이다.) 아무튼 그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인들은 “라면과 김치가 가장 인기가 있어요!”라는 따위의 시시콜콜한 소식을 듣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우주 과학’이 보여 준 것은 ‘자긍심’과도 무관한, 이미 진부해져 버린 ‘스펙터클’이었다.
스너피와 미씨 _ 집단적 열광의 추억
“황우석 사단”의 연구 성과물 가운데 ‘개 복제’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할구 분할이나 근친 교배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체세포 복제에 의한 개가 맞다는 판정을 받은 이후로, ‘재기’를 위한 공식적인 출구가 ‘복제 개 사업’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손쉬운 것이기도 했다. 2006년 이후로, 그 사업은 두 개로 갈라진 각기 다른 연구팀에 의해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무슨 무슨 개를 복제했다”는 보도자료를 돌린다. 2008년 6월에도 거의 같은 날(한쪽이 발표하는 걸 듣고 서둘러 다른 한쪽이 발표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에 “중국의 사자견 티벳마스티프”(수암생명공학연구원)와 “암탐지견”(서울대학교)을 복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러한 ‘개 전쟁’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중략) 개 복제 상업화는 희망이 없지 않은 사업 아이템이다.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개를 복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까닭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동물을 복제해야겠다는 생각은 집착과 욕망에 기인한 것이지 ‘이성’에 따른 것은 아니다.
조류독감 _ 만들어진 공포는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한 해에 유행성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25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라고 하지. 미국 질병통제센터(CDC)가 미국에서 한 해에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의 수가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는 걸 고려한다면, 전 세계 인구 가운데 그 정도의 수치가 특별히 잘못된 것으로 보이진 않아. 조류독감이 10년 간 240여 명을 죽이는 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그냥 독감’은 500만 명 가까이 죽였던 셈이네. 한편에서는 희대의 살인마가 연쇄 살인을 벌이고 있고 모든 사람이 거기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었던 게지. (중략) 장래에 바이러스에서 어떤 변이가 일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염이 수월한 형태가 되고, 그것이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사로잡혀 공포에 떨고 있을 이유를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네. “위험성이 부풀려졌다”는 농민들의 판단은 위험성을 강조하는 입장 못지않게 ‘과학적’인 것이라네.
광우병 공포 _ 불안과 공포에 의지하는 행동은 뿌리가 얕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강변하는 측이 내세울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언술이라고는 그나마 ‘확률’의 문제였다. “떡 먹는 것보다도 훨씬 안전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 건수를 생각한다면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해와 요구에 따른 협상의 성격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비이성적인 공포감 조성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국민의 비이성적인 열광으로부터 힘을 얻으려 했던 한국 정부의 노력에 비춰 본다면, 국민이 좀 더 이성적이기를 요구하는 현 정부의 태도야말로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다. (중략)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의 위험성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거나, 끝도 모를 공포심에 사로잡힐 이유는 더더욱 없다. 식품의 안전성에 관한 한 지금까지보다는 더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할 따름이다.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듦으로써 잘못된 협상에 대한 저항의식마저 줄어들 우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포와 함께 전진해서는 안 된다. 불안과 공포가 자신의 생명을 좀 더 안전하게 지켜 줄지는 모를 일이지만, 삶의 질을 위협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수많은 위험성들에 대해 지금보단 균형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불안과 공포에 의지하는 행동은 뿌리가 얕다. 그것은 쉽게 쓰러진다. 현재로선 광우병과 관련해서, ‘동물성 사료 금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당연히 그것은 대규모 공장식 축산의 전반적인 문제로 가 닿을 것이다.
다치코마와 집단지성 _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지성이 필요하다
음식 문제였기 때문에 특별한 ‘지도부’의 필요성을 느낄 이유가 초기에는 없었고, 촛불집회 형식 자체가 2002년(‘미선이․효순이 사건’) 이후부터는 확실히 정착해 온 까닭에 시위의 조직과 과정에 대한 고민도 덜 필요했다. 어떤 놀라운 ‘지성’이 발휘된 게 아니라, 있을 만한 시위가 하나의 촉발 요인에 의해 새로운 통신기술의 도움과 이미 정착해 있는 시위 형식에 힘입어 빠르게 조직되고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침묵과 무관심 속에 잦아들었던 ‘중요한 것들’은 늘 있어 왔다. 인터넷 문화는 여전히 지적으로 ‘예민’하지는 않다. ‘촛불’ 자체가 인터넷 문화에 대한 새삼스러운 신뢰와 찬사를 보낼 이유가 될 수 없다. 2008년의 촛불과 같은 것이 또다시 켜질 수 있음과 동시에 ‘황우석 신드롬’과 같은 현상도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겐 찬양하고 영합하는 지성(그것을 지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지성이 훨씬 가치가 있다.
인터넷 시대 _ 그리고 ‘본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단 5초 만에 핸드폰으로 책 한권 분량의 ‘정보량’을 가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2분 만에 책 네 권 분량의 ‘정보량’을 지닌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책 500권 분량의 ‘정보량’을 지닌 동영상을 10여 초 만에 받아서 1시간 이내에 감상할 수 있다. 머리 싸매고 며칠 동안 읽은 책은 1메가바이트의 ‘정보량’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 ‘정보량’이라는 것은 현대인이 컴퓨터와 디지털카메라와 MP3 따위를 얼마나 이용하느냐, 병원에 가서 고용량의 사진을 얼마나 찍어 대느냐 등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다. (중략) 특정인에 대한 500메가바이트짜리 다큐멘터리보다 제대로 작성된 20킬로바이트짜리 인터뷰 원고가 그 사람에 대해 보다 많은 ‘진실’을 얘기해 줄 때가 있다. 영상은 영상 자체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내레이션이나 자막에 의해 특정 의미로 고정되거나 강화된다. 영상은 특정인에 대해 양적으로는 많은 정보―그의 얼굴 생김새와 피부, 말할 때의 표정과 손짓, 그의 목소리 톤, 살찐 정도 등도 ‘정보’이긴 하므로―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특정인의 평소 태도와는 많이 다른 이미지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여지 역시 거기서 생겨난다. 영상이 사실감을 높여 주는 탓에, ‘사실적인 것’ 안에 ‘거짓된 것’이 적당히 끼어들기 쉬운 까닭이다. 영상은 감정(감정과 감성을 구분하는 게 유용하다)을 쉽게 자극한다. 감정이 시끄러울 때 이성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소개
지은이 : 이충웅
책정보 및 내용요약
한국 사회를 지배한 기술문명에 대한 치열한 담론과
과학, 기술문명, 미디어, 그리고 수용자의 관계에 대한 성찰
음식물에 있어서는 수백만 분의 1의 위험성도 거부하면서,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그 수천 배의 위험성도 무릅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태안의 기적’을 일군 ‘감동의 물결’은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가?
지난 10년간 조류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246명인 반면
우리가 아는 그냥 독감으로는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과연 공포는 어디에서 생산되는 것인가?
전통적으로 국민의 비이성적 열광에 힘을 얻은 정부는
왜 광우병 앞에서는 국민에게 ‘이성적’이기를 요구했는가?
목차
문명의 관객 - 미디어 속의 기술문명과 우리의 시선
이충웅 (지은이) | 바다출판사 | 200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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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양장본 | 223쪽 | 215*138mm | 290g | ISBN : 978895561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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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몸을 향한 욕망의 시선
비만과 다이어트 - 몸을 관리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계급적' 성격
미용성형 - 아름다움에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
<인체의 신비> -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스펙터클
<닥터 하우스> - 메디컬 드라마의 환자, 그 기계적 신체와 동화적 치료
2.편견과 열등감과 열광의 추억
예술과 과학의 시선 - 하나의 편견과 두 개의 열등감
한국 최초의 '우주인' - 이미 진부해진 스펙터클 이벤트
스너피와 미씨 - 집단적 열광의 추억
인간형로봇 - 아이들은 장난감의 영혼을 보고 싶어 한다
3.위기와 공포의 재생산
기름 유출 - '감동의 물결'에 은폐된 성찰의 기회
조류독감 - 만들어진 공포는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광우병 공포 - 불안과 공포에 의지하는 행동은 뿌리가 얕다
4.불완전한 연희에서 희망을 찾다
다치코마와 집단지성 -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지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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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의 독자이자 기술문명과 미디어의 수용자인 우리에게, 과학기술과 미디어가 벌이는 연극 속에 끼어들어 환호하고 열광하는 조연이 아니라 조망하고 성찰하는 관객이 될 것을 주문한다. 때로는 드라마와 영화 속에, 때로는 전시회와 국가적 이벤트 속에, 때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 질병의 창궐과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비롯된 문제들 속에 숨어 있는 현대 기술문명이 만들어 낸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파헤치고 과학 발전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경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 시대 “문명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과학담론에 있어 한국적 상황에 천착한 독특한 시도
과학사, 과학철학을 비롯해 사회의 과학담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은 적지 않게 나와 있다. 그러나 모두 외국의 사례이거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허무한 이야기들이다. 또한 ‘과학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책들은 결국 ‘과학과 생활의 편리함’ ‘생명윤리 논쟁’ ‘과학과 원자폭탄’ 등과 같은 단선적인 이야기 내지는 과학계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쉽게’ 풀어 주는 데 그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과학기술 담론의 성격’과 관련하여 철저하게 한국적 상황에 천착해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철저히 ‘일상’에 기초하여, 미디어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소화된 이론과 사유 그리고 유려한 필체로 전개되는 이 책은 한국 사회 과학담론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대상이 되는 미디어는 단지 언론 매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 주변의 많은 현상들을 미디어로 파악하고 이들이 ‘보여 주는’ 모습에서 맥락을 찾는다. 특히 영상 매체, 즉 볼거리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 이를 통해 뭔가 ‘보여 주기’ 위해 애쓰는 온갖 영상 미디어와 뭔가 보기 위해 모여드는 ‘구경꾼’으로서의 우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풍부한 의미 작용들을 그려 내고 있다. 영상 미디어를 포함한 시각적 자극과 그와 관련된 담론은 과학기술과 관련한 대중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런 미디어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로 채워진다. 따라서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뉴스 보도 화면, 보도 사진, 전시회, 성형수술, 블로그, UCC 등 모든 것들이 이 책의 대상이 된다.
과학기술에 드러난 왜곡된 욕망
과학의 발전은 결국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 강해지고 싶고, 더 아름다워지고 싶고, 더 편해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인간은 기술을 발전시켰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타고난 것으로 간주되던 아름다움은 그 기준이 변하고 외모에 따른 사회적 차별이 강화되면서 이제 하나의 선택사항이 되었다. 인체에 대한 지식이 늘고 의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자신의 신체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게 되었으며(엄청난 위험성을 무릅쓰고라도), 단순히 얼굴의 생김새뿐 아니라 ‘날씬’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다이어트 역시 ‘산업’의 범주에 들게 되었다. 몸과 몸의 무게를 둘러싼 이야기는 이제 의학계의 입을 빌어 개인의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미적 만족감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다이어트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신체, 생명의 소중함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플라스티나이제이션이라는 시체 가공술을 개발한 군터 폰 하겐스는 실제 인간의 시체를 전시하며 세계를 순회하고 있고(우리나라는 이 그로테스크한 전시회에 ‘과학’과 ‘교육’, ‘체험’이라는 이름을 붙여 ‘국립서울과학관’에서 전시했다), 더 많은 고기를 더 싼 값에 얻고자 한 욕망은 돌이킬 수 없는 질병의 형태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과 똑같이 움직이는 기계를 개발하려는 노력 역시 결국 인간과 생명에 대한 기계적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무엇이 은폐되었는가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한 작년 초여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을 거부하는 데만 몸을 맡겼다. 공포에 의지하는 행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고 공포감이 무뎌짐에 따라 결속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광우병에 대한 거부감만 남은 채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는 효과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지나친 육류 소비와 그로 인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반 년 전,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유출되었다. 두 대형 선박의 명백한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이 분명함에도 결국 수습은 거주민과 ‘국민’의 자원봉사의 의지하게 되었다. 미디어는 연일 ‘감동의 물결’을 상찬하기에 바빴고, 자원봉사의 손길이 모자라다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 ‘태안의 기적’을 이야기하고 ‘한국민의 저력’을 과시하는 동안 지역 주민들에 대한 보상, 무분별한 유처리제 사용, 방제 작업자의 건강 이상에 대한 의료적 판단은 전면에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다. 아울러 현대인의 생활 방식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석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우리 문명에 대한 성찰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본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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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성형 _ 아름다움에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
인터넷과 신문, 방송, 여기저기서 성형외과 의사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10년 전에는 “자녀에게 성형수술을 선물”하라더니, 5년 전에는 “아내와 남편에게”, 요즘엔 “부모님께 실버 성형을 선물하라”는 칼럼을 쓴다. (중략) 위험에 대한 사람의 감각은 대단히 불완전하다. 사람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이, 위험에 대한 감각에서 만큼은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욕망’이 작동하는 특유의 방식이, 하나의 국면에서, 이성과 비이성이 혼재해 나타나도록 이끄는 건지도 모른다. 음식물에 있어서는 수백만 분의 일의 위험성도 받아들일 수 없으면서,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그 수천 배의 위험성일지라도 무릅쓸 만하다는 태도는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그 ‘아름다움’이 어떤 아름다움이냐는 질문도 필요하겠지만, “목숨 걸고 성형수술하세요”라고 유혹하지는 않는다. 위험성은 대개 은폐되거나 과소평가된다.
<인체의 신비> _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스펙터클
시체를 가지고 만들어 낸 〈인체의 신비〉 전에서의 ‘에코르셰’들에 아이들의 시선이 어디에 가 머물지 상상하기는 어렵다. 지나치게 복잡한 그 구조의 어디에 시선을 집중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어른들의 그것과 닮았는지, 어떤 목표의식을 가지고 관찰은 하고 있는지, 그 관람이 인체에 대한 시각에, 아이의 정서와 생명에 대한 관념에 장차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중략) “미취학 아동 3000원”이라는 안내문에서 K가 느꼈던 구토는, 미취학 아동이 그것을 보면 해로울 것이라는 확신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을 관람시키는 무지막지한 상업성과 학부모와 교사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것이 소위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공연이나 영화보다 덜 해롭다거나, ‘교육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시체들과, 갖가지 모양으로 저며 놓은 조각들 사이에서 아이들의 눈망울이 보이는 듯하다. 그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이미 어른이 돼 버린 K로서는 알 수가 없다. 시체 처리 방식만 기술적으로 뚜렷한 것일 뿐, 전시회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지극히 불분명하다. 그 불확실함 속에서, 그나마 견고하게 뭉쳐있는 건 어른들의 ‘욕망’이라고, 느낀다.
<닥터 하우스> _ 메디컬 드라마의 환자, 그 기계적 신체와 동화적 치료
거의 모든 ‘의학 드라마’라는 것에서 일관성 있게 보이는 원칙이 있다. 환자의 몸은 고장 난 기계가 솜씨 좋은 기술자에 의해 수리되듯 그렇게 치료된다. 거기서 ‘첨단 의학’이라는 기술적 개입은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 하우스의 환자들이 감정 없는 로봇처럼 묘사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질환에 사회적이거나 심리적인 요인이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닥터 하우스는 철저히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한다. 그에게 생의학biomedicine이 아닌 다른 모든 ‘대안적’ 의료는 “사기꾼들의 수작”일 뿐이다. 환자는 의학 발전을 위한 ‘교재’이기도 하며, 한 사람을 실수로 죽이더라도 그것이 나중에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지식을 남겨 주는 경우라면 용인할 만하다는, 고전적인 의학 발전의 신화를 믿는다.
한국 최초의‘우주인’_ 이미 진부해진 스펙터클 이벤트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의 기존 우주 관광 프로그램과 다를 게 없는 일정인 탓에, 가능한 한 최소한의 동작으로 빠른 시간 안에 해치울 수 있는 간단한 실험 18가지 항목을 삽입했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교육용 CD를 제작하기 위한 것이거나, 학술적 가치를 가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그런데 실험 제목은 그럴듯하게 붙는 것들로 채워졌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주 공간에서의 초파리를 이용한 중력 반응 및 노화 유전자의 탐색”이라는 제목이 붙은 실험은, 초파리를 우주선에 태우고 갔다가 올 때 그냥 다시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대부분 한 번의 실험으로는 어떤 결론도 말하기 힘든 것들이다.) 아무튼 그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인들은 “라면과 김치가 가장 인기가 있어요!”라는 따위의 시시콜콜한 소식을 듣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우주 과학’이 보여 준 것은 ‘자긍심’과도 무관한, 이미 진부해져 버린 ‘스펙터클’이었다.
스너피와 미씨 _ 집단적 열광의 추억
“황우석 사단”의 연구 성과물 가운데 ‘개 복제’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할구 분할이나 근친 교배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체세포 복제에 의한 개가 맞다는 판정을 받은 이후로, ‘재기’를 위한 공식적인 출구가 ‘복제 개 사업’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손쉬운 것이기도 했다. 2006년 이후로, 그 사업은 두 개로 갈라진 각기 다른 연구팀에 의해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무슨 무슨 개를 복제했다”는 보도자료를 돌린다. 2008년 6월에도 거의 같은 날(한쪽이 발표하는 걸 듣고 서둘러 다른 한쪽이 발표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에 “중국의 사자견 티벳마스티프”(수암생명공학연구원)와 “암탐지견”(서울대학교)을 복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러한 ‘개 전쟁’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중략) 개 복제 상업화는 희망이 없지 않은 사업 아이템이다.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개를 복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까닭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동물을 복제해야겠다는 생각은 집착과 욕망에 기인한 것이지 ‘이성’에 따른 것은 아니다.
조류독감 _ 만들어진 공포는 누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한 해에 유행성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25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라고 하지. 미국 질병통제센터(CDC)가 미국에서 한 해에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의 수가 2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는 걸 고려한다면, 전 세계 인구 가운데 그 정도의 수치가 특별히 잘못된 것으로 보이진 않아. 조류독감이 10년 간 240여 명을 죽이는 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그냥 독감’은 500만 명 가까이 죽였던 셈이네. 한편에서는 희대의 살인마가 연쇄 살인을 벌이고 있고 모든 사람이 거기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었던 게지. (중략) 장래에 바이러스에서 어떤 변이가 일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염이 수월한 형태가 되고, 그것이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사로잡혀 공포에 떨고 있을 이유를 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없다네. “위험성이 부풀려졌다”는 농민들의 판단은 위험성을 강조하는 입장 못지않게 ‘과학적’인 것이라네.
광우병 공포 _ 불안과 공포에 의지하는 행동은 뿌리가 얕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강변하는 측이 내세울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언술이라고는 그나마 ‘확률’의 문제였다. “떡 먹는 것보다도 훨씬 안전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적어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 건수를 생각한다면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해와 요구에 따른 협상의 성격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비이성적인 공포감 조성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국민의 비이성적인 열광으로부터 힘을 얻으려 했던 한국 정부의 노력에 비춰 본다면, 국민이 좀 더 이성적이기를 요구하는 현 정부의 태도야말로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다. (중략)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의 위험성을 있는 대로 끌어올리거나, 끝도 모를 공포심에 사로잡힐 이유는 더더욱 없다. 식품의 안전성에 관한 한 지금까지보다는 더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할 따름이다.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듦으로써 잘못된 협상에 대한 저항의식마저 줄어들 우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포와 함께 전진해서는 안 된다. 불안과 공포가 자신의 생명을 좀 더 안전하게 지켜 줄지는 모를 일이지만, 삶의 질을 위협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수많은 위험성들에 대해 지금보단 균형 있는 감각이 필요하다. 불안과 공포에 의지하는 행동은 뿌리가 얕다. 그것은 쉽게 쓰러진다. 현재로선 광우병과 관련해서, ‘동물성 사료 금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당연히 그것은 대규모 공장식 축산의 전반적인 문제로 가 닿을 것이다.
다치코마와 집단지성 _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지성이 필요하다
음식 문제였기 때문에 특별한 ‘지도부’의 필요성을 느낄 이유가 초기에는 없었고, 촛불집회 형식 자체가 2002년(‘미선이․효순이 사건’) 이후부터는 확실히 정착해 온 까닭에 시위의 조직과 과정에 대한 고민도 덜 필요했다. 어떤 놀라운 ‘지성’이 발휘된 게 아니라, 있을 만한 시위가 하나의 촉발 요인에 의해 새로운 통신기술의 도움과 이미 정착해 있는 시위 형식에 힘입어 빠르게 조직되고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침묵과 무관심 속에 잦아들었던 ‘중요한 것들’은 늘 있어 왔다. 인터넷 문화는 여전히 지적으로 ‘예민’하지는 않다. ‘촛불’ 자체가 인터넷 문화에 대한 새삼스러운 신뢰와 찬사를 보낼 이유가 될 수 없다. 2008년의 촛불과 같은 것이 또다시 켜질 수 있음과 동시에 ‘황우석 신드롬’과 같은 현상도 언제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겐 찬양하고 영합하는 지성(그것을 지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지성이 훨씬 가치가 있다.
인터넷 시대 _ 그리고 ‘본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단 5초 만에 핸드폰으로 책 한권 분량의 ‘정보량’을 가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2분 만에 책 네 권 분량의 ‘정보량’을 지닌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책 500권 분량의 ‘정보량’을 지닌 동영상을 10여 초 만에 받아서 1시간 이내에 감상할 수 있다. 머리 싸매고 며칠 동안 읽은 책은 1메가바이트의 ‘정보량’을 지닌 것에 불과하다. ‘정보량’이라는 것은 현대인이 컴퓨터와 디지털카메라와 MP3 따위를 얼마나 이용하느냐, 병원에 가서 고용량의 사진을 얼마나 찍어 대느냐 등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다. (중략) 특정인에 대한 500메가바이트짜리 다큐멘터리보다 제대로 작성된 20킬로바이트짜리 인터뷰 원고가 그 사람에 대해 보다 많은 ‘진실’을 얘기해 줄 때가 있다. 영상은 영상 자체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내레이션이나 자막에 의해 특정 의미로 고정되거나 강화된다. 영상은 특정인에 대해 양적으로는 많은 정보―그의 얼굴 생김새와 피부, 말할 때의 표정과 손짓, 그의 목소리 톤, 살찐 정도 등도 ‘정보’이긴 하므로―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특정인의 평소 태도와는 많이 다른 이미지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여지 역시 거기서 생겨난다. 영상이 사실감을 높여 주는 탓에, ‘사실적인 것’ 안에 ‘거짓된 것’이 적당히 끼어들기 쉬운 까닭이다. 영상은 감정(감정과 감성을 구분하는 게 유용하다)을 쉽게 자극한다. 감정이 시끄러울 때 이성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