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지은이 : 쟝샤오위앤江曉原
중국의 저명한 과학사학자이자 천문학자이다. 상하이 교통대학교 교수로, 과학사학과 주임과 인문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난징대학교 천문학과에서 천체물리학을 전공한 뒤 과학사 연구에 전념하여, 1988년에 중국과학원에서 과학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4년 중국과학원 교수로 승진한 뒤 1999년 상하이 교통대학교에 과학사학과가 설립되면서 교수로 임용되어 재직 중이다.
전공인 과학사 연구 외에도 과학 문화의 확산에도 매진하고 있으며, 저서와 역서, 문집 등 약 30여 종의 책을 출간했고, 100편이 넘는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간행되는 많은 잡지에도 기고하고 있다. 과학․역사․문화 분야의 전문 인터넷 사이트 http://www.shc2000. com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주요 저작으로는 《천학진원天學眞原》, 《천학외사天學外史》, 《회천-천문 역사 연대학으로 보는 무왕의 주나라 정벌回天-武王伐紂于天文歷史年代學》, 《쯔진산 천문대의 역사紫錦山天文臺史》 등이 있으며, 《케임브리지 천문학사》, 《중국과학문명사》 등의 책을 중국어로 옮겼다.
옮긴이 : 홍상훈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 고전문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제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한시 읽기의 즐거움》, 《전통시기 중국의 서사론》, 《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 등이 있으며, 《시귀의 노래》, 《중국소설비평사략》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인간, 하늘에 길을 묻다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불확실한 삶에 대한 답을 얻고자 자연의 변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원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종종 종교라는 형식 안에 축적되었다. 고대의 점성학은 그런 종교적 기반 위에, 하늘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 인간은 나름의 방식으로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무늬를 보며 개인의 삶, 나아가 군주와 국가의 운명을 점쳐 왔다.
이 책 <별과 우주의 문화사>는 이처럼 밤하늘 별자리를 바라보는 인간 시선의 역사를 문화사적 시각에서 조명한 책이다. 미신이나 사이비 과학으로 치부되어 온 점성학에 대한 이 같은 통시적 접근은 현대 천문학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는 것뿐 아니라 고대 사회의 과학사와 문화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공하며, 숨 가쁘게 질주하고 있는 인류와 현대 과학에 고대 인류의 지혜를 되새길 기회, 나아가 현대의 과학이 지향해야 할 길을 제시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
밤하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서양의 점성학
1. 점성학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점성학에 관한 바빌로니아의 역사적 배경
바빌로니아의 점성학
점성학의 전파
2. 신들의 밤하늘, 이집트
고대 이집트의 별과 신
이집트 점성학의 전성기
서양의 점성학에 담긴 이집트 색채
3. 점성학에 빠진 고대 그리스
'별점병'에 걸린 그리스인들
점성학의 '제 1차 황금시대'
점성학의 대가 프톨레마이오스
4. 로마 제국, 황제를 위한 점성학
점성학에 반영된 로마인의 색채
황제 주위의 점성가들
상류사회를 풍미한 점성학
점성학에 대한 회의주의
점성학 서적을 남긴 사람들
5. 기독교와 점성학
6. 중세를 벗어나
점성학의 전파와 발전
점성학과 천문학, 그리고 기상학
점성 의학
학자와 문학가의 눈에 비친 점성학
7. 중세 아랍의 점성학과 천문학
8. 르네상스, 점성학의 전서과 쇠퇴
점성학 '제 2의 황금기'
직업이 된 점성학
점성가가 하는 일
나랏일을 예측하는 점성가
별점 예언은 옳은 것인가?
공격과 반대, 그리고 쇠락
동양의 점성학
9. 중국 점성학의 특수성
2,000 년 군국 점성학 체계
중국 점성학의 사상적 기초
10. 분야 이론
하늘의 구역 구분
하늘과 땅의 대응
몇 가지 비주류 체계들
몇 가지 일화: 분야 이론의 의의
11. 항성 점성학
중국인의 항성 체계
항성의 점상과 점사
북두칠성
나그네별, 상서로운 별, 그리고 요사한 별
12. 태양과 달, 행성에 관한 점성학
태양과 달에 대한 점
행성에 대한 점
13. 혜성과 유성에 관한 점
중국의 혜성 점성학
유성과 운석에 대한 점
개정판 후기
옮긴이의 글
옮긴이 주석
옮긴이 주석
편집자 추천글
우러러 하늘의 무늬를 살피다 _ 점성학이란 무엇인가
점성학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처음 기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변화 원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그 순간부터 인간은 밤하늘 별자리를 관찰하고 거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최초의 점성학 관련 기록은 바빌로니아 왕조 시대(기원전 1830~기원전 1531 무렵)의 문헌에서 보이는데, 이는 천문 현상을 토대로 풍년 여부를 미리 점친 것이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금성의 출몰표에도 별점 예언이 들어 있고, 아수르 제국 시기(기원전 1530~기원전 612)에는 《징조 모음집》이라는 대형 별점 문헌이 만들어졌다.
오늘날의 점성학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astrology는 고대 그리스어 άστρολοϒια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자적 의미는 “별자리의 모양에 대한 학문”라는 뜻이다. 또한 동양에서는 “천문天文[하늘의 무늬]”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천문 현상, 즉 각종 천체들이 뒤섞여 운행하면서 하늘에 나타내는 풍경을 가리키며, 이런 풍경을 무늬[文]라고 한 것이다.
별자리의 형태나 특이한 움직임 등 천문 현상을 관찰하여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학은 점사의 대상에 따라 크게 “군국 점성학”과 “생신 점성학”으로 나뉜다. 군국 점성학은 별자리의 모양을 근거로 전쟁의 승부나 풍년 여부, 수해나 가뭄 같은 재해, 제왕의 안위 등 국가와 군사 분야의 큰일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제왕의 경우는 예외이다. 제왕의 운명이 그대로 국가적인 대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생신 점성학은 개인의 출생 시각의 천문 현상을 근거로 개인의 평생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질이나 운명을 태어날 때부터 예정된 것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서양식 생신 점성학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점성학이 모두 발견되는 반면 동양에서는 거의 군국 점성학만이 존재했다. 특히 동양에서는 하늘과 인간이 끊임없이 소통한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념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점성학을 통해 나온 점사가 여의치 않을 경우 제왕의 덕을 탓하거나 몸가짐을 바로 하여 “하늘의 뜻”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늘의 뜻을 읽다 _ 점성가는 누구이며, 점성가는 무엇을 하였나
고대 서양에서 점성학은 기본적으로 모든 학자들의 필수 과목이었다. 철학, 과학, 수학, 의학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학자들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였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론》과 《천문 현상학》을, 프톨레마이오스는 《사원의 수》를 저술하면서 점성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 역시 “점성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사가 아니라 바보이다”라고 말하는 등 제자들에게 점성학을 전수하여 ‘환자에게 흉한 날’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심지어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마련한 케플러 역시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실 수학자”로 있는 동안 황제인 루돌프 2세를 비롯해서 황제의 반대파들에게도 별점을 쳐주기도 했다.
이중 히포크라테스의 전통 아래 서양에서는 “점성 의학”이라는 것이 발전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생로병사와 건강 여부 등 모든 것이 하늘에 있는 별자리들의 신묘한 역량에 좌우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점성 의학에 따르면 환자의 출생 시각의 별자리가 그에게 찾아올 질병들을 미리 보여 주거나 치료 방법, 치료 시기를 정하는 것 역시 별자리가 일러준 대로 따라야 한다. 또한 개인의 출생 시각의 별자리를 중시하는 생신 점성학의 영향 아래, 의사이기도 했던 서양의 점성가는 일종의 조산사로도 활동하며 임부의 출산 시각을 조절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영국의 어느 유명 점성가가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의 점성가가 했던 일들을 대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당시의 점성가들은 “별점 달력”이라는 책을 제작하여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하였고, 개인의 직업 선택에서부터, 경제 상황 전망, “현자의 돌” 찾기, 항해 운수, 소송의 승패, 결혼과 가정사, 심지어는 잃어버린 물건이나 도망친 하인을 찾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과학자의 눈에 비친 점성학의 역사 _ 천문학의 어머니, 점성학은 최초의 정밀과학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점성학Astrology과 천문학Astronomy는 그 근본이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즉 전자는 미신이고, 후자는 과학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결코 그렇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 및 그보다 조금 후의 몇 년까지 점성가와 천문학자는 구별할 도리가 없었다. 자연과 세계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데 주력한 프톨레마이오스, 트라실로스 등의 고대 자연철학자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점성가였으며, 코페르니쿠스, 티코 브라헤, 케플러 등 현대 과학, 특히 현대 천문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이들 역시 한편으로는 점성학으로 생계를 유지한 점성가였다.
점성학은 분명 비과학적인 전제와 원리에서 출발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점성학 연구 혹은 별점을 치는 데는 다분히 “과학적”인 접근법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점성학에서는 어떤 천체가 임의의 시각에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관측과 계산, 천문 관측기구와 지표천문학, 기하학, 그리고 그 밖의 수학적 도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능과 성질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점성학은 당연히 과학이 아니지만, 거기에 사용된 도구를 가지고 말하자면 점성학은 최초의 ‘과학화된’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점성학은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 이외에도 중요한 과학 유산을 안겨주었다. 점성가들은 다량의 천문 관측 기록을 남겼는데, 하늘에 어떤 혜성이 지나갔다거나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는 등의 기록은 현재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된다. 일례로 1940년대 초기에 황소자리에 있는 게성운은 서기 1054년에 발생한 초신성 폭발의 흔적임이 입증되었으며, 또 1950년대에는 1572년의 초신성인 티코 초신성과 1604년의 초신성인 케플러 초신성의 흔적 속에서 발산되는 전파가 발견되었다. 초신성 폭발은 극히 드문 현상이기 때문에 이런 기록들은 신성과 초신성 폭발 빈도에 대한 통계를 낼 수 있게 해주고, 이에 따라 항성의 변천에 관한 이론에서 항성이 백색왜성으로 변하기 전에 이런 식의 폭발 단계를 거친다는 가설을 실증적으로 검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대의 운명을 말해 보시오 _ 점성가들의 운명에 얽힌 에피소드
서양 고대의 점성가는 대부분 철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 왕실의 재상이었다.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들은 국왕의 통치에 조언을 해주는가 하면, 점성학을 통해 국사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였다. 하지만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자신의 친아버지이자 스승이며, 옛 이집트의 파라오인 점성가 넥타네보를 절벽으로 떨어뜨렸다. 이유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그대는 언제 죽는가”라고 물어 “지금”이라고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지금”이라고 대답을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죽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후세에 제왕과 점성가들 사이에서 지혜와 용기를 다툴 때 자주 등장하는데, 로마의 황제 네로 역시 오랜 세월 자신의 스승이었던 트라실로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이 자신에게 치명적일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린 트라실로스는 별점표를 그리다가 갑자기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결과를 아직 확정할 수는 없지만, 거의 치명적인 위기가 제게 다가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에는 어느 날 프랑스 루이 11세의 궁정 점성가가 루이 11세가 사랑하는 귀부인의 죽음을 예언했는데, 정말로 그날 그 귀부인이 죽었다. 이에 왕은 그 점성가를 죽여 귀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에게 자신의 앞날을 예언해 보라고 하였다. 이 점성가는 트라실로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하늘의 별자리를 보아하니, 저는 폐하보다 사흘 먼저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루이 11세는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접은 것은 물론이고, 이후로도 점성가의 건강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동양의 하늘과 서양의 하늘 _ 이 책의 구성에 관하여
천문학과 과학사를 전공한 “과학자”인 저자가 이처럼 점성학의 역사를 다룬 이유는 그저 점성학이 천문학의 모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과거 점성가의 예측이 들어맞는 경우를 “소 뒷걸음에 쥐잡기”라거나 “사회학적 예측을 점성학으로 위장”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점성학에 대한 저자의 기본적인 관점은 점성학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일종의 “점술”일 뿐 그 자체로 과학은 아니라는 것이며, 이 책은 점성술의 비법이나 점성학의 과학적 의의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본 시각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인류학적․문화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점성학과 관련해서는, 점성학에 얽힌 특정 역사적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 점성학과 역사라는 테마의 책이 몇 권 있을 뿐, 이처럼 점성학 자체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는 세계적으로 매운 드문 경우이다.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원사료를 직접 참고하면서 고대 점성학의 모습과 그 문화사적 의의를 성공적으로 복원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대 점성학의 역사를 크게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 개괄하는데, 제1부인 “서양의 점성학”에서는 점성학이 탄생한 바빌로니아에서부터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와 아랍,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까지, 서양 점성학의 탄생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개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른바 ‘황도黃道 12궁’의 발견이 종교적 의례의 차원에서 처음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다른 문화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각 문화 고유의 신화적 우주관과 결합하게 되는 모습을 정치와 사회, 문화적 배경 위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현대 천문학의 모태가 되는 각종 천문 관측 기술과 그것을 토대로 한 우주 모형에 대한 이론들이 점성술이라는 종합적이고 미신적이며 종교적인 행위의 부산물이었음을 강조했다.
제2부 “동양의 점성학”에서는 특히 ‘3원垣 28수’와 ‘12차次’ 체계로 대표되는 중국의 점성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관과 도교를 비롯한 중국 고유의 민간 신앙을 토대로 형성되어서 서양의 점성학과는 형성 배경과 주안점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서양의 별자리 개념인 ‘궁宮’이 실제 천문 관측을 토대로 신화적 상상을 덧입혀 만든 것인 데에 비해, 중국의 별자리 개념인 ‘수宿’는 일종의 개념적 상상에 의해 안배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이를 토대로 한 점성학의 응용 분야에서도 서양 사람들이 점성학을 통해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데에 비해, 중국의 점성학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왕조의 운명을 점치는 군국점성학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데에서 그 차이가 확연히 나타난다고 했다.
저자소개
지은이 : 쟝샤오위앤江曉原
전공인 과학사 연구 외에도 과학 문화의 확산에도 매진하고 있으며, 저서와 역서, 문집 등 약 30여 종의 책을 출간했고, 100편이 넘는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간행되는 많은 잡지에도 기고하고 있다. 과학․역사․문화 분야의 전문 인터넷 사이트 http://www.shc2000. com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주요 저작으로는 《천학진원天學眞原》, 《천학외사天學外史》, 《회천-천문 역사 연대학으로 보는 무왕의 주나라 정벌回天-武王伐紂于天文歷史年代學》, 《쯔진산 천문대의 역사紫錦山天文臺史》 등이 있으며, 《케임브리지 천문학사》, 《중국과학문명사》 등의 책을 중국어로 옮겼다.
옮긴이 : 홍상훈
책정보 및 내용요약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불확실한 삶에 대한 답을 얻고자 자연의 변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원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종종 종교라는 형식 안에 축적되었다. 고대의 점성학은 그런 종교적 기반 위에, 하늘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 인간은 나름의 방식으로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무늬를 보며 개인의 삶, 나아가 군주와 국가의 운명을 점쳐 왔다.
이 책 <별과 우주의 문화사>는 이처럼 밤하늘 별자리를 바라보는 인간 시선의 역사를 문화사적 시각에서 조명한 책이다. 미신이나 사이비 과학으로 치부되어 온 점성학에 대한 이 같은 통시적 접근은 현대 천문학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는 것뿐 아니라 고대 사회의 과학사와 문화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공하며, 숨 가쁘게 질주하고 있는 인류와 현대 과학에 고대 인류의 지혜를 되새길 기회, 나아가 현대의 과학이 지향해야 할 길을 제시한다.
목차
밤하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서양의 점성학
1. 점성학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점성학에 관한 바빌로니아의 역사적 배경
바빌로니아의 점성학
점성학의 전파
2. 신들의 밤하늘, 이집트
고대 이집트의 별과 신
이집트 점성학의 전성기
서양의 점성학에 담긴 이집트 색채
3. 점성학에 빠진 고대 그리스
'별점병'에 걸린 그리스인들
점성학의 '제 1차 황금시대'
점성학의 대가 프톨레마이오스
4. 로마 제국, 황제를 위한 점성학
점성학에 반영된 로마인의 색채
황제 주위의 점성가들
상류사회를 풍미한 점성학
점성학에 대한 회의주의
점성학 서적을 남긴 사람들
5. 기독교와 점성학
6. 중세를 벗어나
점성학의 전파와 발전
점성학과 천문학, 그리고 기상학
점성 의학
학자와 문학가의 눈에 비친 점성학
7. 중세 아랍의 점성학과 천문학
8. 르네상스, 점성학의 전서과 쇠퇴
점성학 '제 2의 황금기'
직업이 된 점성학
점성가가 하는 일
나랏일을 예측하는 점성가
별점 예언은 옳은 것인가?
공격과 반대, 그리고 쇠락
동양의 점성학
9. 중국 점성학의 특수성
2,000 년 군국 점성학 체계
중국 점성학의 사상적 기초
10. 분야 이론
하늘의 구역 구분
하늘과 땅의 대응
몇 가지 비주류 체계들
몇 가지 일화: 분야 이론의 의의
11. 항성 점성학
중국인의 항성 체계
항성의 점상과 점사
북두칠성
나그네별, 상서로운 별, 그리고 요사한 별
12. 태양과 달, 행성에 관한 점성학
태양과 달에 대한 점
행성에 대한 점
13. 혜성과 유성에 관한 점
중국의 혜성 점성학
유성과 운석에 대한 점
개정판 후기
옮긴이의 글
옮긴이 주석
옮긴이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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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학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처음 기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자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변화 원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그 순간부터 인간은 밤하늘 별자리를 관찰하고 거기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최초의 점성학 관련 기록은 바빌로니아 왕조 시대(기원전 1830~기원전 1531 무렵)의 문헌에서 보이는데, 이는 천문 현상을 토대로 풍년 여부를 미리 점친 것이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금성의 출몰표에도 별점 예언이 들어 있고, 아수르 제국 시기(기원전 1530~기원전 612)에는 《징조 모음집》이라는 대형 별점 문헌이 만들어졌다.
오늘날의 점성학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astrology는 고대 그리스어 άστρολοϒια에서 비롯된 것으로, 문자적 의미는 “별자리의 모양에 대한 학문”라는 뜻이다. 또한 동양에서는 “천문天文[하늘의 무늬]”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천문 현상, 즉 각종 천체들이 뒤섞여 운행하면서 하늘에 나타내는 풍경을 가리키며, 이런 풍경을 무늬[文]라고 한 것이다.
별자리의 형태나 특이한 움직임 등 천문 현상을 관찰하여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학은 점사의 대상에 따라 크게 “군국 점성학”과 “생신 점성학”으로 나뉜다. 군국 점성학은 별자리의 모양을 근거로 전쟁의 승부나 풍년 여부, 수해나 가뭄 같은 재해, 제왕의 안위 등 국가와 군사 분야의 큰일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개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제왕의 경우는 예외이다. 제왕의 운명이 그대로 국가적인 대사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생신 점성학은 개인의 출생 시각의 천문 현상을 근거로 개인의 평생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기질이나 운명을 태어날 때부터 예정된 것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서양식 생신 점성학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점성학이 모두 발견되는 반면 동양에서는 거의 군국 점성학만이 존재했다. 특히 동양에서는 하늘과 인간이 끊임없이 소통한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념이 존재하였다. 따라서 점성학을 통해 나온 점사가 여의치 않을 경우 제왕의 덕을 탓하거나 몸가짐을 바로 하여 “하늘의 뜻”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늘의 뜻을 읽다 _ 점성가는 누구이며, 점성가는 무엇을 하였나
고대 서양에서 점성학은 기본적으로 모든 학자들의 필수 과목이었다. 철학, 과학, 수학, 의학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든 학자들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였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천론》과 《천문 현상학》을, 프톨레마이오스는 《사원의 수》를 저술하면서 점성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 역시 “점성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사가 아니라 바보이다”라고 말하는 등 제자들에게 점성학을 전수하여 ‘환자에게 흉한 날’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심지어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마련한 케플러 역시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실 수학자”로 있는 동안 황제인 루돌프 2세를 비롯해서 황제의 반대파들에게도 별점을 쳐주기도 했다.
이중 히포크라테스의 전통 아래 서양에서는 “점성 의학”이라는 것이 발전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생로병사와 건강 여부 등 모든 것이 하늘에 있는 별자리들의 신묘한 역량에 좌우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점성 의학에 따르면 환자의 출생 시각의 별자리가 그에게 찾아올 질병들을 미리 보여 주거나 치료 방법, 치료 시기를 정하는 것 역시 별자리가 일러준 대로 따라야 한다. 또한 개인의 출생 시각의 별자리를 중시하는 생신 점성학의 영향 아래, 의사이기도 했던 서양의 점성가는 일종의 조산사로도 활동하며 임부의 출산 시각을 조절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영국의 어느 유명 점성가가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의 점성가가 했던 일들을 대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당시의 점성가들은 “별점 달력”이라는 책을 제작하여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하였고, 개인의 직업 선택에서부터, 경제 상황 전망, “현자의 돌” 찾기, 항해 운수, 소송의 승패, 결혼과 가정사, 심지어는 잃어버린 물건이나 도망친 하인을 찾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과학자의 눈에 비친 점성학의 역사 _ 천문학의 어머니, 점성학은 최초의 정밀과학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점성학Astrology과 천문학Astronomy는 그 근본이 확연하게 다른 것이다. 즉 전자는 미신이고, 후자는 과학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결코 그렇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 및 그보다 조금 후의 몇 년까지 점성가와 천문학자는 구별할 도리가 없었다. 자연과 세계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는 데 주력한 프톨레마이오스, 트라실로스 등의 고대 자연철학자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점성가였으며, 코페르니쿠스, 티코 브라헤, 케플러 등 현대 과학, 특히 현대 천문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이들 역시 한편으로는 점성학으로 생계를 유지한 점성가였다.
점성학은 분명 비과학적인 전제와 원리에서 출발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점성학 연구 혹은 별점을 치는 데는 다분히 “과학적”인 접근법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점성학에서는 어떤 천체가 임의의 시각에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관측과 계산, 천문 관측기구와 지표천문학, 기하학, 그리고 그 밖의 수학적 도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능과 성질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점성학은 당연히 과학이 아니지만, 거기에 사용된 도구를 가지고 말하자면 점성학은 최초의 ‘과학화된’ 학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점성학은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 이외에도 중요한 과학 유산을 안겨주었다. 점성가들은 다량의 천문 관측 기록을 남겼는데, 하늘에 어떤 혜성이 지나갔다거나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는 등의 기록은 현재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된다. 일례로 1940년대 초기에 황소자리에 있는 게성운은 서기 1054년에 발생한 초신성 폭발의 흔적임이 입증되었으며, 또 1950년대에는 1572년의 초신성인 티코 초신성과 1604년의 초신성인 케플러 초신성의 흔적 속에서 발산되는 전파가 발견되었다. 초신성 폭발은 극히 드문 현상이기 때문에 이런 기록들은 신성과 초신성 폭발 빈도에 대한 통계를 낼 수 있게 해주고, 이에 따라 항성의 변천에 관한 이론에서 항성이 백색왜성으로 변하기 전에 이런 식의 폭발 단계를 거친다는 가설을 실증적으로 검증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대의 운명을 말해 보시오 _ 점성가들의 운명에 얽힌 에피소드
서양 고대의 점성가는 대부분 철학자이자 수학자, 과학자, 왕실의 재상이었다.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들은 국왕의 통치에 조언을 해주는가 하면, 점성학을 통해 국사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였다. 하지만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었다.
고대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자신의 친아버지이자 스승이며, 옛 이집트의 파라오인 점성가 넥타네보를 절벽으로 떨어뜨렸다. 이유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그대는 언제 죽는가”라고 물어 “지금”이라고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지금”이라고 대답을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죽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후세에 제왕과 점성가들 사이에서 지혜와 용기를 다툴 때 자주 등장하는데, 로마의 황제 네로 역시 오랜 세월 자신의 스승이었던 트라실로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이 자신에게 치명적일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린 트라실로스는 별점표를 그리다가 갑자기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결과를 아직 확정할 수는 없지만, 거의 치명적인 위기가 제게 다가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에는 어느 날 프랑스 루이 11세의 궁정 점성가가 루이 11세가 사랑하는 귀부인의 죽음을 예언했는데, 정말로 그날 그 귀부인이 죽었다. 이에 왕은 그 점성가를 죽여 귀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에게 자신의 앞날을 예언해 보라고 하였다. 이 점성가는 트라실로스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하늘의 별자리를 보아하니, 저는 폐하보다 사흘 먼저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루이 11세는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접은 것은 물론이고, 이후로도 점성가의 건강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동양의 하늘과 서양의 하늘 _ 이 책의 구성에 관하여
천문학과 과학사를 전공한 “과학자”인 저자가 이처럼 점성학의 역사를 다룬 이유는 그저 점성학이 천문학의 모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과거 점성가의 예측이 들어맞는 경우를 “소 뒷걸음에 쥐잡기”라거나 “사회학적 예측을 점성학으로 위장”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점성학에 대한 저자의 기본적인 관점은 점성학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일종의 “점술”일 뿐 그 자체로 과학은 아니라는 것이며, 이 책은 점성술의 비법이나 점성학의 과학적 의의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본 시각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인류학적․문화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점성학과 관련해서는, 점성학에 얽힌 특정 역사적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 점성학과 역사라는 테마의 책이 몇 권 있을 뿐, 이처럼 점성학 자체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는 세계적으로 매운 드문 경우이다.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원사료를 직접 참고하면서 고대 점성학의 모습과 그 문화사적 의의를 성공적으로 복원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대 점성학의 역사를 크게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 개괄하는데, 제1부인 “서양의 점성학”에서는 점성학이 탄생한 바빌로니아에서부터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를 거쳐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와 아랍,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까지, 서양 점성학의 탄생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개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른바 ‘황도黃道 12궁’의 발견이 종교적 의례의 차원에서 처음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다른 문화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각 문화 고유의 신화적 우주관과 결합하게 되는 모습을 정치와 사회, 문화적 배경 위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현대 천문학의 모태가 되는 각종 천문 관측 기술과 그것을 토대로 한 우주 모형에 대한 이론들이 점성술이라는 종합적이고 미신적이며 종교적인 행위의 부산물이었음을 강조했다.
제2부 “동양의 점성학”에서는 특히 ‘3원垣 28수’와 ‘12차次’ 체계로 대표되는 중국의 점성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관과 도교를 비롯한 중국 고유의 민간 신앙을 토대로 형성되어서 서양의 점성학과는 형성 배경과 주안점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서양의 별자리 개념인 ‘궁宮’이 실제 천문 관측을 토대로 신화적 상상을 덧입혀 만든 것인 데에 비해, 중국의 별자리 개념인 ‘수宿’는 일종의 개념적 상상에 의해 안배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이를 토대로 한 점성학의 응용 분야에서도 서양 사람들이 점성학을 통해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데에 비해, 중국의 점성학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왕조의 운명을 점치는 군국점성학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데에서 그 차이가 확연히 나타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