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현대미술을 이토록 색다르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영국 현대미술에 주목하는 시간
영국 현대미술을 충실한 현장 취재로 생동감 있게 전달하여 현대미술 책의 새로운 등장을 알렸던 《창조의 제국》이 10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창조의 제국》은 2009년 초판 출간 당시 ‘영국 현대미술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탄탄한 책’으로 평가받으며, 영국 현대미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창조의 제국》은 현장감이 느껴지는 문장과 자료를 기반으로, yBa(Young British Artists)로 불리는 영국 청년 작가들이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이들의 활동이 제도권에 흡수되는 1990년대, 현대미술이 국가브랜딩과 창조산업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2000년대의 흐름을 따라 영국 현대미술의 자취를 살핀다.
죽은 상어를 방부액에 담아 전시한 데이미언 허스트, 겸손한 개념미술을 선보이는 마틴 크리드, 영국 팝아트의 대표 작가 피터 블레이크와 줄리언 오피, 불순한 오브제로 미술계의 가식과 편견을 뒤엎는 세라 루커스, 영국 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 공공미술 작품으로 지역 경제를 일으킨 앤터니 곰리, 트라팔가 광장의 중심에 현대미술 작품을 세운 마크 월린저, 잉카 쇼니바레, 마크 퀸, 거리 미술로 제도권에 진입한 뱅크시 등….
이제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국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들도 《창조의 제국》을 통해 새 힘을 얻는다. 저자가 보여주는 영국 아트신의 현장은 역사적 르포르타주이자 예술사의 역사적 기록이 됨으로써, 이전에 만날 수 없었던 정보와 지식을 전하기 때문이다.
영국을 ‘창조의 제국’이라 이름 짓게 한 영국 현대미술 힘은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이 놀라운 성취가 역사적 우연이거나 단지 재능 있는 개인에 기댄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 속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키워낸 진보적인 학제간 교육, 새로운 감성을 흡수해 미술의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한 컬렉터와 아트 딜러, 대중의 눈높이와 시대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려는 미술관과 박물관, 예술적 상상력을 마케팅에 적용한 기업들, 그리고 새로운 국가 이미지 창출을 위해 정책적으로 현대미술을 지원한 정부”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결론짓는다. ‘창조의 제국’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 현대미술은 어디로 가는가
초판의 문제의식과 성취를 유지하면서 이번 개정판은, 10년 사이에 영국 사회를 뒤흔든 브렉시트와 영국 현대미술의 상관관계, 그리고 브렉시트 이후 영국 현대미술의 불확실한 전망에 주목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와 감각을 추구”했던 ‘창조의 제국’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여전히 ‘창조의 제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브렉시트라는 정치적 입장은 영국 아트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저자는 브렉시트 투표 결과가 주는 시사점, 즉 세대‧지역‧계급간의 분열이 영국 아트신에 큰 위기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 어느 나라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무대”를 제공해 왔던 영국의 모습을 잃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영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들은 ‘영국 작가’로 편입되고, 영국 아트신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영국의 주요 미술기관 리더의 자리도 열려 있다.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인재 누구든” 영국 아트신의 주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영국인 차별 정책을 주장하는 브렉시트가 현실화된다면? 이 가능성은 모두 사라질 수 있다. ‘차이와 다양성 존중'의 가치를 버린 영국이 ’창조의 제국‘으로 건재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 대부분이 브렉시트 반대 캠페인 활동을 벌이는 것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한다. “지역과 문화의 차이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 시민사회를 향한 비전과 가치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예술의 역할이다.” 이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 현대미술을 전망함에 있어 저자가 가장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영국을 ‘창조의 제국’으로 만든 바로 그 메시지다.
마틴 크리드의 <작품 850번>을 표지로…
《창조의 제국》과 함께 ‘미술관을 달리다’
이 책의 표지 이미지는 마틴 크리드의 <작품 850번>(2008)이다. ‘미술관을 달리는’ <작품 850번>은 테이트 브리튼이 해마다 한 작가를 선정해 미술관 중앙의 듀빈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하는 ‘테이트 브리튼 커미션’ 출품작으로, 30초마다 한 사람씩 86미터에 달하는 복도 입구부터 끝까지 달리는 퍼포먼스 작품이다. 빛, 소리, 공기, 행위 등 비물질적인 재료를 다루는 크리드의 대표작 중 하나다. 저자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긴 복도를 전력 질주하는 주자들의 움직임은 그림과 조각으로 가득 찬 정지된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음악적 리듬감을 부여했다.
고요한 미술관에서 뜻밖의 비일상적인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관람객들에게 웃음과 놀라움을 함께 선사한 것이다.”
《창조의 제국》의 표지로 <작품 850번>을 선정한 것은 ‘창조의 제국’이라는 별칭을 가진 영국의 현대미술을 집약해 표현하기 위함이다. <작품 850번>은 영국 현대미술의 특징을 찾아낼 만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데, 먼저 런던 올림픽을 위시한 문화 올림피아드의 일환으로 기획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터너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 영국 아트신을 상징하는 미술관(테이트)에서 전시된 점, 무엇보다 어떤 공간에서도 전시 가능한 현대미술의 가변성, 비물질성이라는 속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을 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사각 프레임 안에 갇히지 않고, 의도된 위치에 놓이지 않는 순간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크리드의 작품을 통해, 미술이 육박해오는 감각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6가지 주제, 23명의 작가론으로 살펴보는
영국 현대미술의 궤적
《창조의 제국》은 총 16장으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장이 끝날 때마다 그 이해를 풍성하게 돕고자 짤막한 작가론을 더했다. 16개의 장은 총 다섯 파트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Part 1. yBa 현대미술의 신화 탄생(1장~4장)
런던 아트신의 새로운 자극 yBa 등장과 배경을 다룬다. 《프리즈》라는 전시를 통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등장한 1988년부터, 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공고히 한 1997년 《센세이션》전 전후까지의 10여 년과 이와 관련된 컬렉터, 화상, 미술학교, 미술 기관 등을 소개한다.
아울러 아티스트 다섯을 소개한다. yBa의 스승이자 스스로 뛰어난 작가로 활동하는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파격적인 작품과 자기 PR로 ‘센세이션’의 중심이 된 데이미언 허스트, 겸손한 개념미술로 대중과 현대미술의 거리를 좁힌 마틴 크리드와 짐 람비, 경계를 벗어나는 표현력과 뛰어난 완성도를 선보인 채프먼 형제의 작가론을 다룬다.
Part 2. 영국 현대미술 성공의 자양분(5장~7장)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미술사·문화사적 상황을 살핀다. 특히, 영국이 겪은 미국 모더니즘의 수용과 저항 또한 현대미술과 대중문화의 상호 영향에 주목한다. 오늘날의 영국 현대미술이 형성된 이면에는 미국 대중문화와 아방가르드의 복잡한 관계가 있었음을 설명한다.
이어지는 작가론은 다음과 같다. 모두를 위한 예술을 외치며 삶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허문 길버트 앤드 조지, 팝아트의 선두주자 줄리언 오피와 게리흄,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제러미 델러와 사이먼 스탈링의 작품을 분석한다.
Part3. 지역 경제를 살린 영국 현대미술의 힘(8장~11장)
우리나라에도 이미 잘 알려진 테이트 모던, 게이츠헤드 경제를 일으킨 기념비적 공공미술 <북방의 천사>. 이 두 사례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이 지역 경제와 역사에 개입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영향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또한 지역주의와 글로벌리즘,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비전을 연결하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사례도 소개한다.
이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흑인 작가 크리스 오필리와 잉카 쇼니바레 MBE, 영국의 공공미술 역사를 다시 쓴 앤터니 곰리, 자가 치유의 작가 트레이시 에민, 페미니즘 담론을 이끌어내는 세라 루커스, 약자와 다양성의 목소리를 담는 그레이슨 페리의 작품세계를 다룬다.
Part 4. 대중과 호흡하는 공공미술의 성공 모델(12장~15장)
대중과의 소통을 추구한 여러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런던 지하철이나 트라팔가 광장의 경우처럼, 기관 주도의 프로젝트와 함께 민간 차원의 자생적 대안 공공미술, ‘뱅크시’로 유명해진 그라피티에 대해서도 다룬다. 이를 통해 미술과 사회,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가 어떻게 소통하며 새로운 창작이 이뤄지는지 이해를 돕는다.
이어 포스트 yBa의 대표주자 팀 노블 앤드 수 웹스터,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마크 티치너, 예술의 사회적 의미와 공공성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마크 퀸, 마크 월린저, 일상의 공간에 담긴 소소한 것들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레이철 화이트리드,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세계로 안내한다.
Part 5. 브렉시트 이후 영국 현대미술이 나아갈 길(16장)
초판 출간 이후 영국 사회가 겪은 10년간의 변화를 담는다. 특히, 정권교체와 더불어 급선회한 문화정책과 사회적 양극화 그리고 세계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브렉시트 현상을 중심으로 영국 미술계가 당면한 현실과 그에 대한 미술의 대응과 전망을 다룬다.
브렉시트에 대해 니컬러스 서로타 전 총관장은 “낙관주의적 분위기가 사라졌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또한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라는 말로 우려를 표현했으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레바논 출신의 미국 시인이자 화가인 에텔 아드난의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니라 공생, 불신이 아니라 사랑, 고립이 아니라 공통의 미래”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분열과 불신, 고립을 극복하고 공생과 사랑, 인류 공통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며 실천 의지를 불어넣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예술, 예술인, 예술 기관이 해야 하는 일 아닐까.
―16장 〈창조의 제국, 그 후〉 부분 (본문 511쪽)
본문에서
영국에서는 현대미술이 갤러리의 하얀 벽에 갇혀 있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이 흔하다. 지역 재개발과 관련해 공공미술 세미나가 열리고, 도심 광장의 개선 사업에도 현대미술 프로젝트가 개입된다. 테이트가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리노베이션해 현대미술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도 예술적 포부와 더불어 일자리 창출 및 지역 경제에 대한 기여도가 함께 논의됐다.
― 프롤로그 (본문 23쪽)
1997년 가을 약 100일간 로열 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 전시는 개막 전부터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중략) 전반적으로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이들 신예 작가의 작품이 영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미술 기관으로 알려진 로열 아카데미에서 선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한 가지 논란거리는 이 전시가 yBa의 또 다른 대부로 알려진 찰스 사치의 개인 컬렉션만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이 전시에 특정인의 소장품 가격을 높이려는 음험한 사리사욕이 개입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2장 〈사치 컬렉션과 센세이션〉 부분 (본문 65쪽)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건축에 새로운 상상력을 담은 테이트 모던 덕분에 왕궁, 성당, 공원, 박물관 등 고풍 일색이던 런던의 관광지 리스트는 짧은 기간 동안 21세기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됐다. 미술관 개관 당시 영국의 미술계는 “우리도 세계적인 동시대 미술관을 갖게 됐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현대미술에 대해 시큰둥하던 보수적인 언론들도 이때만큼은 호의적인 찬사를 보냈다.
―8장 〈테이트 모던_미술관의 미래〉 부분 (본문 263쪽)
〈하우스〉는 단순한 스펙터클이나 심오한 미학적 가치를 담은 오브제라기보다 작품이 착안돼 실현되기까지 복잡다단한 과정과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하나의 내러티브다. 이 프로젝트는 재개발과 강제 이주, 주민들의 저항에 관한 이야기와 집주인, 재개발업자, 관련 기관들의 동의와 협조를 구하는 일련의 소통 과정까지 담고 있다. (중략) 〈하우스〉는 재개발 붐이 시작된 이스트엔드의 공간 변화와 자본 논리에 밀려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나는 힘없는 노동자 계층의 삶을 배경으로 세워진 것이다.
―14장 〈공공미술_무한상상의 실현〉 부분 (본문 441쪽)
“와, 영리한데! ART(예술)의 알파벳 순서를 바꿔서 RAT(쥐)이 됐군요.” 뱅크시의 대표적 아이콘인 쥐 그림 앞에서 누군가 젠체하며 이렇게 말했다. 터무니없는 과대 해석에 당황한 뱅크시는 엉겁결에 “네”라고 대답해버렸다. 교양과 지식을 과시하며 고상한 척 하다 보면 솔직함과 단순함이 사라지는 법. 그는 이런 덕목을 잃은 거리예술은 더 이상 존재 이유와 가치가 없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 사건 이후 뱅크시는 당분간 쥐를 그리지 않았다.
―15장 〈거리미술의 네오르네상스〉 부분 (본문 484쪽)
영국을 ‘창조의 제국’이라 지칭한 이유는 창조적 영역에 있어서 절대우위의 지배권력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여 인류 보편의 가치와 감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중략) 21세기 예술은 서로 다른 지역과 문화의 차이가 상호 보완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 시민사회를 향한 비전과 가치를 제시할 때 그 빛을 발할 것이다.
― 에필로그 (본문 516~517쪽)
저자소개
지은이 : 임근혜(Jade Lim)
이곳에서 동시대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yBa 작가 등 영국 미술의 중심인물들을 비롯한 세계의 인재들과 교류하며, 글로벌 미술현장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2003년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에서 약 5년간의 큐레이터 활동 후, 2010년 다시 영국으로 떠나 레스터 대학에서 박물관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한국 공공미술관의 제도적 특성과 정부와의 역학 관계를 중심으로 한 제도 연구를 했고, 귀국 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2013~2017)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2팀장(2017~)으로 일하고 있다.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미술기관의 새로운 역할과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저술을 통해, 미술관 안팎에서 직업적 전문 의식과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길잡이가 되길 희망한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목차
창조의 제국을 열며 ― 초판 서문 11
프롤로그 19
01장 yBa_현대미술의 신화 탄생 29
—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54
02장 사치 컬렉션과 센세이션 63
— 데이미언 허스트 ·88
03장 터너상_고급예술의 대중화 95
— 마틴 크리드 + 짐 람비 ·118
04장 아티스트와 아트 스타 127
— 제이크 & 디노스 채프먼 ·152
05장 ICA_다제간 창작의 산실 159
— 길버트 & 조지 ·183
06장 팝, 아트 그리고 팝아트 189
— 줄리언 오피 + 게리 흄 ·210
07장 브리타니아 vs 아메리카나 221
— 제러미 델러 + 사이먼 스탈링 ·242
08장 테이트 모던_미술관의 미래 251
— 크리스 오필리 + 잉카 쇼니바레 MBE ·276
09장 지역 경제를 살린 ‘예술천사’ 285
— 앤터니 곰리 ·308
10장 이스트엔드 스토리 315
— 트레이시 에민 + 세라 루커스 ·338
11장 현대미술을 끌어안은 박물관 349
— 그레이슨 페리 ·376
12장 상상이 달리는 지하철 381
— 팀 노블 & 수 웹스터 + 마크 티치너 ·402
13장 광장을 회복하라 409
— 마크 퀸 + 마크 월린저 ·428
14장 공공미술_무한상상의 실현 437
— 레이철 화이트리드 ·458
15장 거리미술의 네오르네상스 465
— 뱅크시 ·485
16장 창조의 제국, 그 후 491
에필로그 513
감사의 글 518
주 520 · 도판 목록 522
편집자 추천글
"영국 현대미술을 이토록 색다르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영국 현대미술에 주목하는 시간
영국 현대미술을 충실한 현장 취재로 생동감 있게 전달하여 현대미술 책의 새로운 등장을 알렸던 《창조의 제국》이 10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창조의 제국》은 2009년 초판 출간 당시 ‘영국 현대미술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탄탄한 책’으로 평가받으며, 영국 현대미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창조의 제국》은 현장감이 느껴지는 문장과 자료를 기반으로, yBa(Young British Artists)로 불리는 영국 청년 작가들이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이들의 활동이 제도권에 흡수되는 1990년대, 현대미술이 국가브랜딩과 창조산업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2000년대의 흐름을 따라 영국 현대미술의 자취를 살핀다.
죽은 상어를 방부액에 담아 전시한 데이미언 허스트, 겸손한 개념미술을 선보이는 마틴 크리드, 영국 팝아트의 대표 작가 피터 블레이크와 줄리언 오피, 불순한 오브제로 미술계의 가식과 편견을 뒤엎는 세라 루커스, 영국 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 공공미술 작품으로 지역 경제를 일으킨 앤터니 곰리, 트라팔가 광장의 중심에 현대미술 작품을 세운 마크 월린저, 잉카 쇼니바레, 마크 퀸, 거리 미술로 제도권에 진입한 뱅크시 등….
이제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국 현대미술 작가와 작품들도 《창조의 제국》을 통해 새 힘을 얻는다. 저자가 보여주는 영국 아트신의 현장은 역사적 르포르타주이자 예술사의 역사적 기록이 됨으로써, 이전에 만날 수 없었던 정보와 지식을 전하기 때문이다.
영국을 ‘창조의 제국’이라 이름 짓게 한 영국 현대미술 힘은 어디에 있는가. 저자는 이 놀라운 성취가 역사적 우연이거나 단지 재능 있는 개인에 기댄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회 속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키워낸 진보적인 학제간 교육, 새로운 감성을 흡수해 미술의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한 컬렉터와 아트 딜러, 대중의 눈높이와 시대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려는 미술관과 박물관, 예술적 상상력을 마케팅에 적용한 기업들, 그리고 새로운 국가 이미지 창출을 위해 정책적으로 현대미술을 지원한 정부”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결론짓는다. ‘창조의 제국’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 현대미술은 어디로 가는가
초판의 문제의식과 성취를 유지하면서 이번 개정판은, 10년 사이에 영국 사회를 뒤흔든 브렉시트와 영국 현대미술의 상관관계, 그리고 브렉시트 이후 영국 현대미술의 불확실한 전망에 주목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와 감각을 추구”했던 ‘창조의 제국’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여전히 ‘창조의 제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브렉시트라는 정치적 입장은 영국 아트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저자는 브렉시트 투표 결과가 주는 시사점, 즉 세대‧지역‧계급간의 분열이 영국 아트신에 큰 위기를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 어느 나라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무대”를 제공해 왔던 영국의 모습을 잃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영국을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들은 ‘영국 작가’로 편입되고, 영국 아트신의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영국의 주요 미술기관 리더의 자리도 열려 있다.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인재 누구든” 영국 아트신의 주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영국인 차별 정책을 주장하는 브렉시트가 현실화된다면? 이 가능성은 모두 사라질 수 있다. ‘차이와 다양성 존중'의 가치를 버린 영국이 ’창조의 제국‘으로 건재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 대부분이 브렉시트 반대 캠페인 활동을 벌이는 것에서 희망을 발견하고자 한다. “지역과 문화의 차이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 시민사회를 향한 비전과 가치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예술의 역할이다.” 이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 현대미술을 전망함에 있어 저자가 가장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영국을 ‘창조의 제국’으로 만든 바로 그 메시지다.
마틴 크리드의 <작품 850번>을 표지로…
《창조의 제국》과 함께 ‘미술관을 달리다’
이 책의 표지 이미지는 마틴 크리드의 <작품 850번>(2008)이다. ‘미술관을 달리는’ <작품 850번>은 테이트 브리튼이 해마다 한 작가를 선정해 미술관 중앙의 듀빈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하는 ‘테이트 브리튼 커미션’ 출품작으로, 30초마다 한 사람씩 86미터에 달하는 복도 입구부터 끝까지 달리는 퍼포먼스 작품이다. 빛, 소리, 공기, 행위 등 비물질적인 재료를 다루는 크리드의 대표작 중 하나다. 저자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창조의 제국》의 표지로 <작품 850번>을 선정한 것은 ‘창조의 제국’이라는 별칭을 가진 영국의 현대미술을 집약해 표현하기 위함이다. <작품 850번>은 영국 현대미술의 특징을 찾아낼 만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데, 먼저 런던 올림픽을 위시한 문화 올림피아드의 일환으로 기획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터너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 영국 아트신을 상징하는 미술관(테이트)에서 전시된 점, 무엇보다 어떤 공간에서도 전시 가능한 현대미술의 가변성, 비물질성이라는 속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점을 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사각 프레임 안에 갇히지 않고, 의도된 위치에 놓이지 않는 순간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크리드의 작품을 통해, 미술이 육박해오는 감각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6가지 주제, 23명의 작가론으로 살펴보는
영국 현대미술의 궤적
《창조의 제국》은 총 16장으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장이 끝날 때마다 그 이해를 풍성하게 돕고자 짤막한 작가론을 더했다. 16개의 장은 총 다섯 파트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Part 1. yBa 현대미술의 신화 탄생(1장~4장)
런던 아트신의 새로운 자극 yBa 등장과 배경을 다룬다. 《프리즈》라는 전시를 통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등장한 1988년부터, 이들이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공고히 한 1997년 《센세이션》전 전후까지의 10여 년과 이와 관련된 컬렉터, 화상, 미술학교, 미술 기관 등을 소개한다.
아울러 아티스트 다섯을 소개한다. yBa의 스승이자 스스로 뛰어난 작가로 활동하는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파격적인 작품과 자기 PR로 ‘센세이션’의 중심이 된 데이미언 허스트, 겸손한 개념미술로 대중과 현대미술의 거리를 좁힌 마틴 크리드와 짐 람비, 경계를 벗어나는 표현력과 뛰어난 완성도를 선보인 채프먼 형제의 작가론을 다룬다.
Part 2. 영국 현대미술 성공의 자양분(5장~7장)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미술사·문화사적 상황을 살핀다. 특히, 영국이 겪은 미국 모더니즘의 수용과 저항 또한 현대미술과 대중문화의 상호 영향에 주목한다. 오늘날의 영국 현대미술이 형성된 이면에는 미국 대중문화와 아방가르드의 복잡한 관계가 있었음을 설명한다.
이어지는 작가론은 다음과 같다. 모두를 위한 예술을 외치며 삶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허문 길버트 앤드 조지, 팝아트의 선두주자 줄리언 오피와 게리흄,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제러미 델러와 사이먼 스탈링의 작품을 분석한다.
Part3. 지역 경제를 살린 영국 현대미술의 힘(8장~11장)
우리나라에도 이미 잘 알려진 테이트 모던, 게이츠헤드 경제를 일으킨 기념비적 공공미술 <북방의 천사>. 이 두 사례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이 지역 경제와 역사에 개입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영향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또한 지역주의와 글로벌리즘,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비전을 연결하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사례도 소개한다.
이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흑인 작가 크리스 오필리와 잉카 쇼니바레 MBE, 영국의 공공미술 역사를 다시 쓴 앤터니 곰리, 자가 치유의 작가 트레이시 에민, 페미니즘 담론을 이끌어내는 세라 루커스, 약자와 다양성의 목소리를 담는 그레이슨 페리의 작품세계를 다룬다.
Part 4. 대중과 호흡하는 공공미술의 성공 모델(12장~15장)
대중과의 소통을 추구한 여러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런던 지하철이나 트라팔가 광장의 경우처럼, 기관 주도의 프로젝트와 함께 민간 차원의 자생적 대안 공공미술, ‘뱅크시’로 유명해진 그라피티에 대해서도 다룬다. 이를 통해 미술과 사회, 그리고 주류와 비주류가 어떻게 소통하며 새로운 창작이 이뤄지는지 이해를 돕는다.
이어 포스트 yBa의 대표주자 팀 노블 앤드 수 웹스터,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마크 티치너, 예술의 사회적 의미와 공공성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마크 퀸, 마크 월린저, 일상의 공간에 담긴 소소한 것들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레이철 화이트리드,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세계로 안내한다.
Part 5. 브렉시트 이후 영국 현대미술이 나아갈 길(16장)
초판 출간 이후 영국 사회가 겪은 10년간의 변화를 담는다. 특히, 정권교체와 더불어 급선회한 문화정책과 사회적 양극화 그리고 세계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브렉시트 현상을 중심으로 영국 미술계가 당면한 현실과 그에 대한 미술의 대응과 전망을 다룬다.
―16장 〈창조의 제국, 그 후〉 부분 (본문 511쪽)
본문에서
영국에서는 현대미술이 갤러리의 하얀 벽에 갇혀 있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이 흔하다. 지역 재개발과 관련해 공공미술 세미나가 열리고, 도심 광장의 개선 사업에도 현대미술 프로젝트가 개입된다. 테이트가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리노베이션해 현대미술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도 예술적 포부와 더불어 일자리 창출 및 지역 경제에 대한 기여도가 함께 논의됐다.
1997년 가을 약 100일간 로열 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 전시는 개막 전부터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중략) 전반적으로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이들 신예 작가의 작품이 영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미술 기관으로 알려진 로열 아카데미에서 선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한 가지 논란거리는 이 전시가 yBa의 또 다른 대부로 알려진 찰스 사치의 개인 컬렉션만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이 전시에 특정인의 소장품 가격을 높이려는 음험한 사리사욕이 개입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건축에 새로운 상상력을 담은 테이트 모던 덕분에 왕궁, 성당, 공원, 박물관 등 고풍 일색이던 런던의 관광지 리스트는 짧은 기간 동안 21세기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됐다. 미술관 개관 당시 영국의 미술계는 “우리도 세계적인 동시대 미술관을 갖게 됐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현대미술에 대해 시큰둥하던 보수적인 언론들도 이때만큼은 호의적인 찬사를 보냈다.
〈하우스〉는 단순한 스펙터클이나 심오한 미학적 가치를 담은 오브제라기보다 작품이 착안돼 실현되기까지 복잡다단한 과정과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는 하나의 내러티브다. 이 프로젝트는 재개발과 강제 이주, 주민들의 저항에 관한 이야기와 집주인, 재개발업자, 관련 기관들의 동의와 협조를 구하는 일련의 소통 과정까지 담고 있다. (중략) 〈하우스〉는 재개발 붐이 시작된 이스트엔드의 공간 변화와 자본 논리에 밀려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나는 힘없는 노동자 계층의 삶을 배경으로 세워진 것이다.
“와, 영리한데! ART(예술)의 알파벳 순서를 바꿔서 RAT(쥐)이 됐군요.” 뱅크시의 대표적 아이콘인 쥐 그림 앞에서 누군가 젠체하며 이렇게 말했다. 터무니없는 과대 해석에 당황한 뱅크시는 엉겁결에 “네”라고 대답해버렸다. 교양과 지식을 과시하며 고상한 척 하다 보면 솔직함과 단순함이 사라지는 법. 그는 이런 덕목을 잃은 거리예술은 더 이상 존재 이유와 가치가 없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 사건 이후 뱅크시는 당분간 쥐를 그리지 않았다.
영국을 ‘창조의 제국’이라 지칭한 이유는 창조적 영역에 있어서 절대우위의 지배권력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여 인류 보편의 가치와 감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중략) 21세기 예술은 서로 다른 지역과 문화의 차이가 상호 보완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계 시민사회를 향한 비전과 가치를 제시할 때 그 빛을 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