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의 규준規準은 오직 하나, 자유
톨스토이 교육사상의 밑바탕은 장 자크 루소의 교육소설이자 지침서 《에밀》과 맞닿아 있다. 루소는 “인간은 완전한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했는데, 톨스토이는 이 주장을 굳건한 진리처럼 여겼다. 갓 태어난 순간의 인간이야말로 조화造化, 진리眞理, 선善, 미美의 원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도 타고난 완전성과 높은 도덕적 자질이 내재한다고 본 것이다. 모든 인간은 사회에서 가하는 어떠한 폭력이나 강요 없이 자신의 신념과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톨스토이 교육관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톨스토이에게 교육은, 넓은 의미에서 “평등의 요구와 전진운동이라는 불변의 법칙을 토대로 삼는 인간 활동”이다. 당연히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상하上下의 관계가 아닌, 교사와 학생이 평등해야만 교육이라는 하나의 공동 목적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교육학 역사와 각종 교육사에서 공히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는 법칙을 우리는 자각하고 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교육자가 깨닫게 하려면, 피교육자는 자신의 불만을 표현할 권한을 지녀야 한다. 또는 피교육자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교육은 적어도 회피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학의 규준은 자유, 오직 이것 하나다.”
톨스토이가 설립한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는 학생을 구속하는 일체의 속박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톨스토이는 “등교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학교에 다니더라도 교사의 말을 듣지 않을 권리”를 학생들이 가지고 있다고 천명했다. 물론 신임 교사들의 시행착오 등으로 인해 현장에서 모두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톨스토이는 학생들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창의적인 교육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당연히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에서 체벌은 “인간 본성에 대한 존중 부족”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번역자 변춘란은 “학습자의 자유를 옹호한 교육자, 톨스토이”라는 제목의 ‘옮긴이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교육철학사를 살펴본 톨스토이는 교육의 준거점이 부재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학교를 위압威壓하는 역사적 족쇄를 풀기 위해서는 각양각색인 학생들의 실생활에 근거해 학교에 더 큰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또한 교육은 기성세대가 학문으로 여기는 것에 주목하기보다 젊은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인간이 지닌 고도의 잠재력을 억압해, 학생들을 이른바 ‘학교스러운 정신상태’라는 쳇바퀴에 가두는 강압적인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인식이다. 교사와 학생이 뜻하지 않게 적이 되는 강압적 학교는 진보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학교는 교육의 수단인 동시에 끊임없이 참신한 결론을 도출하는 젊은 세대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이러한 ‘교육학적 실험실’로서의 학교라는 이상에 접근하려면, 특히 학생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불만을 표현할 권한, 즉 학습자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한 실험장이 될 수 있다면 학교는 시대의 요구와 지식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학생들 각각의 요구에 융통성을 발휘할 것이다.”
당대 교육 현실 비판하며 대안 제시한 톨스토이
톨스토이가 젊어서부터 교육에 천착한 이유는 자신이 더불어 살던 툴라 지역, 확대하면 러시아 전역의 농민들의 처지와 당시 대두된 이들에 대한 교육 현실이 기형적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역사의 동력으로서 인민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교육은 그러한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보탬이 된다. 하지만 당대 교육 현실은 정부와 교회의 의제에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1859년 무렵 직접 교육 전선에 뛰어든다. 학습자의 요구와 해방이 존재하는 교육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서 말이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회 계층이 생각하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위해서라도 가르치는 사람, 즉 교사의 변화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교사는 언제나 저도 모르게 자신에게 가장 편한 교수법을 선택하려 한다. 어떤 교수법이 교사에게 더 편할수록, 학생들에게는 더 불편하다. 오로지 학생들이 만족하는 교수 방식이 옳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의 교육 방법과 각 과목의 세부적인 진행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한다. 특히 농민의 자식들이 학생들의 생활 형편과 특징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는 그만큼 톨스토이가 농민과 그 자녀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傍證이다. 특히 《학교는 아이들의 실험장이다》 거의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철부지 소년 숌카와 페드카에 대한 설명은 “타고난 잠재력을 스스로 펼치도록 돕는 자유로운 길”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충분하게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의 주된 수업 방식인 학생들과의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학생 개개인이 자유로운 인격으로 자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에서 음악과 미술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당시 예술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농민 자식들”에게 예술은 사실상 범접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술을 즐길 권리”마저 빼앗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톨스토이는 “영혼의 힘을 다해 요구하는 최상의 향유 영역으로 그를 안내할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면서 미술과 음악 교육의 전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농민의 아들 숌카가 보여준 음악적 재능을 일상생활에서 관찰한 대목은 이렇다.
“지난여름 우리는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 한껏 신이 나 있었다. 농민 아들 녀석 하나가 달려 나가더니 우리를 앞서가던 달구지에 올라탔다. 어느 머슴네 아이의 꼬드김에 걸려들어 책 도둑질을 한 적이 있는 아이였다. 굵은 광대뼈에 다부진 소년은 온통 주근깨투성이로 곱장다리에 초원 지역 장정의 태가 완연했지만, 영리하고 힘 좋고 재능 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이 고삐를 잡고 모자를 비뚜름히 쓰더니 한쪽 옆으로 침을 탁 뱉고는 농부의 유장한 노래 한 자락을 뽑아 올리기 시작했다. 솜씨가 아주 제법이었다! 아이는 한껏 감정을 담고 짧게 숨을 돌려가며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질 낮은 학교는 쓸모가 없다”
교육의 목적과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의 다양한 실험을 적시한 톨스토이는 《학교는 아이들의 실험장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의무교육을 실현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무모한 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1859년 톨스토이가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를 시작할 당시 농민들은 교육에 열의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교회 관리인이나 제대한 병사에게, 즉 제대로 배움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읽고 쓰기 정도만을 배울 뿐이었다. 그마저도 적확하지 않은 교육 방식들이 사용되는 통에 제대로 된 교육은 언감생심이었다. 상황이 이런대도 러시아 정부는 시대적 당위라는 이유로 강압적으로 학교를 늘리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더구나 폭정에 시달리는 농민들은 정부의 명령이라면 불만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일로 여겼다.
“‘(대책을) 강구할 수 있고, 학교를 설립할 수 있고, 읽고 쓰기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라고 적혀있는 말을, 농민 해방 이후에는 싫든 좋든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학교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디서나 받아들였다. 인민과 상대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인쇄된 말, 특히 공식적인 말의 형태는 인민에게 이해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설령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인민은 그런 말을 변경 불가한 차르의 명령과 절대복종의 요구로만 받아들인다. 그들은 전혀 조건적 형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질 낮은 학교는 쓸모가 거의 없을뿐더러, 너무나 해롭고 인민교육 사업을 퇴보시킨다.” 정부 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교육 전문가들, 즉 교사 양성이 시급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적정 수효의 교사 수급은 물론 적정한 지역에 배치하는 일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기존 교사들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톨스토이는 그런 이들을 일러 교사가 아닌 ‘경찰’이라고 일갈한다. “호통치고, 돈을 거두고, 이따금 숙제를 내주거나 물어보는” 것으로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학생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교를 실험장 삼아 커가는 아이들
저자소개
지은이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Lev Nikolayevich Tolstoy)
옮긴이 : 변춘란
책정보 및 내용요약
톨스토이가 평생 천착한 학교교육의 핵심
톨스토이 교육론 국내 초역!
《학교는 아이들의 실험장이다》는 위대한 지성이자 사상가, 소설가 등의 명성에 가려 국내에는 거의 소개된 적이 없는 ‘교육자 톨스토이’의 면모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지금까지 교육에 관한 톨스토이의 철학은 단편적으로 소개되었을 뿐, 러시아어 원전을 번역·출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교는 아이들의 실험장이다》는 톨스토이의 방대한 교육철학을 담은 ‘교육론’의 전반부로 “교육 사업에 3년간 정력적으로 몰두한 시기”의 글들을 담고 있다. 톨스토이는 가족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 인민학교를 열고 농민 아이들을 가르쳤다. 동시에 자비로 교육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펴내며 교육적 사유와 실천이 담긴 글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학교는 아이들의 실험장이다》는 교육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중심으로 전개했던 톨스토이의 교육적 통찰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원류源流에 해당한다. 19세기 중반은서유럽은 물론 러시아에서도 교육이 ‘강압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다. 톨스토이는 당대 현실 속에서 인민(국민)교육의 문제를 간파하고 해외 답사와 연구에 매진했고, 초등교육 현장을 몸소 겪고 실천하면서 교육적 통찰을 체계화했다. 학교 운영과 잡지 발간은 장기간 지속되지 못했지만, 톨스토이를 생애 말년까지 교육에 관한 다양한 글들을 집필·발표했다.
목차
2. 인민교육에 대하여· 9
3. 학교와 민간서적 기록의 의미에 대하여· 44
4. 11~12월의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 49
5. 11~12월의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신성역사·러시아사·지리 · 136
6. 11~12월의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후속편· 201
7. 읽고 쓰기 교육 방법에 대하여 · 227
8. 인민학교의 자유로운 발생과 발전에 대하여 · 263
9. 인민학교 설립 공통 기획안 · 316
옮긴이 해설: 학습자의 자유를 옹호한 교육자, 톨스토이 · 373
레프 톨스토이 연보· 382
편집자 추천글
교육학의 규준規準은 오직 하나, 자유
톨스토이 교육사상의 밑바탕은 장 자크 루소의 교육소설이자 지침서 《에밀》과 맞닿아 있다. 루소는 “인간은 완전한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했는데, 톨스토이는 이 주장을 굳건한 진리처럼 여겼다. 갓 태어난 순간의 인간이야말로 조화造化, 진리眞理, 선善, 미美의 원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도 타고난 완전성과 높은 도덕적 자질이 내재한다고 본 것이다. 모든 인간은 사회에서 가하는 어떠한 폭력이나 강요 없이 자신의 신념과 견해를 자유롭게 형성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톨스토이 교육관의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톨스토이에게 교육은, 넓은 의미에서 “평등의 요구와 전진운동이라는 불변의 법칙을 토대로 삼는 인간 활동”이다. 당연히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인간관계의 중요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상하上下의 관계가 아닌, 교사와 학생이 평등해야만 교육이라는 하나의 공동 목적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교육학 역사와 각종 교육사에서 공히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는 법칙을 우리는 자각하고 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교육자가 깨닫게 하려면, 피교육자는 자신의 불만을 표현할 권한을 지녀야 한다. 또는 피교육자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교육은 적어도 회피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학의 규준은 자유, 오직 이것 하나다.”
톨스토이가 설립한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는 학생을 구속하는 일체의 속박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톨스토이는 “등교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학교에 다니더라도 교사의 말을 듣지 않을 권리”를 학생들이 가지고 있다고 천명했다. 물론 신임 교사들의 시행착오 등으로 인해 현장에서 모두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톨스토이는 학생들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창의적인 교육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당연히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에서 체벌은 “인간 본성에 대한 존중 부족”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번역자 변춘란은 “학습자의 자유를 옹호한 교육자, 톨스토이”라는 제목의 ‘옮긴이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교육철학사를 살펴본 톨스토이는 교육의 준거점이 부재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학교를 위압威壓하는 역사적 족쇄를 풀기 위해서는 각양각색인 학생들의 실생활에 근거해 학교에 더 큰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또한 교육은 기성세대가 학문으로 여기는 것에 주목하기보다 젊은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인간이 지닌 고도의 잠재력을 억압해, 학생들을 이른바 ‘학교스러운 정신상태’라는 쳇바퀴에 가두는 강압적인 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인식이다. 교사와 학생이 뜻하지 않게 적이 되는 강압적 학교는 진보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학교는 교육의 수단인 동시에 끊임없이 참신한 결론을 도출하는 젊은 세대의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이러한 ‘교육학적 실험실’로서의 학교라는 이상에 접근하려면, 특히 학생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불만을 표현할 권한, 즉 학습자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한 실험장이 될 수 있다면 학교는 시대의 요구와 지식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학생들 각각의 요구에 융통성을 발휘할 것이다.”
당대 교육 현실 비판하며 대안 제시한 톨스토이
톨스토이가 젊어서부터 교육에 천착한 이유는 자신이 더불어 살던 툴라 지역, 확대하면 러시아 전역의 농민들의 처지와 당시 대두된 이들에 대한 교육 현실이 기형적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역사의 동력으로서 인민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교육은 그러한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보탬이 된다. 하지만 당대 교육 현실은 정부와 교회의 의제에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1859년 무렵 직접 교육 전선에 뛰어든다. 학습자의 요구와 해방이 존재하는 교육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서 말이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회 계층이 생각하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위해서라도 가르치는 사람, 즉 교사의 변화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교사는 언제나 저도 모르게 자신에게 가장 편한 교수법을 선택하려 한다. 어떤 교수법이 교사에게 더 편할수록, 학생들에게는 더 불편하다. 오로지 학생들이 만족하는 교수 방식이 옳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의 교육 방법과 각 과목의 세부적인 진행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한다. 특히 농민의 자식들이 학생들의 생활 형편과 특징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는 그만큼 톨스토이가 농민과 그 자녀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傍證이다. 특히 《학교는 아이들의 실험장이다》 거의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철부지 소년 숌카와 페드카에 대한 설명은 “타고난 잠재력을 스스로 펼치도록 돕는 자유로운 길”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충분하게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의 주된 수업 방식인 학생들과의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학생 개개인이 자유로운 인격으로 자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에서 음악과 미술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당시 예술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농민 자식들”에게 예술은 사실상 범접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술을 즐길 권리”마저 빼앗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톨스토이는 “영혼의 힘을 다해 요구하는 최상의 향유 영역으로 그를 안내할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다면서 미술과 음악 교육의 전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농민의 아들 숌카가 보여준 음악적 재능을 일상생활에서 관찰한 대목은 이렇다.
“지난여름 우리는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 한껏 신이 나 있었다. 농민 아들 녀석 하나가 달려 나가더니 우리를 앞서가던 달구지에 올라탔다. 어느 머슴네 아이의 꼬드김에 걸려들어 책 도둑질을 한 적이 있는 아이였다. 굵은 광대뼈에 다부진 소년은 온통 주근깨투성이로 곱장다리에 초원 지역 장정의 태가 완연했지만, 영리하고 힘 좋고 재능 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이 고삐를 잡고 모자를 비뚜름히 쓰더니 한쪽 옆으로 침을 탁 뱉고는 농부의 유장한 노래 한 자락을 뽑아 올리기 시작했다. 솜씨가 아주 제법이었다! 아이는 한껏 감정을 담고 짧게 숨을 돌려가며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질 낮은 학교는 쓸모가 없다”
교육의 목적과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의 다양한 실험을 적시한 톨스토이는 《학교는 아이들의 실험장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의무교육을 실현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무모한 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1859년 톨스토이가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를 시작할 당시 농민들은 교육에 열의가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교회 관리인이나 제대한 병사에게, 즉 제대로 배움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읽고 쓰기 정도만을 배울 뿐이었다. 그마저도 적확하지 않은 교육 방식들이 사용되는 통에 제대로 된 교육은 언감생심이었다. 상황이 이런대도 러시아 정부는 시대적 당위라는 이유로 강압적으로 학교를 늘리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더구나 폭정에 시달리는 농민들은 정부의 명령이라면 불만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일로 여겼다.
“‘(대책을) 강구할 수 있고, 학교를 설립할 수 있고, 읽고 쓰기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라고 적혀있는 말을, 농민 해방 이후에는 싫든 좋든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학교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디서나 받아들였다. 인민과 상대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인쇄된 말, 특히 공식적인 말의 형태는 인민에게 이해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설령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인민은 그런 말을 변경 불가한 차르의 명령과 절대복종의 요구로만 받아들인다. 그들은 전혀 조건적 형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질 낮은 학교는 쓸모가 거의 없을뿐더러, 너무나 해롭고 인민교육 사업을 퇴보시킨다.” 정부 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교육 전문가들, 즉 교사 양성이 시급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적정 수효의 교사 수급은 물론 적정한 지역에 배치하는 일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기존 교사들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톨스토이는 그런 이들을 일러 교사가 아닌 ‘경찰’이라고 일갈한다. “호통치고, 돈을 거두고, 이따금 숙제를 내주거나 물어보는” 것으로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학생의 탄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교를 실험장 삼아 커가는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