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정치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할 때 주요 통제 수단으로 삼는 것 중 하나가 ‘시간’이다. 우리는 일정한 연령이 되어야 성인으로서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누리고, 중범죄를 저지르면 일정 기간 자유를 박탈당하는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또한 귀화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나라에 일정 기간 거주해야 하며, 일부 국가에서는 일정한 임신 기간 이후에는 낙태를 금지당한다. 세금신고에서부터, 군복무, 정년퇴직, 연금 등의 복지혜택, 비자와 영주권, 공소시효, 일정한 기간마다 되풀이되는 여러 선거 일정에 이르기까지 정치는 시민에게 자격과 권리를 부여하고 박탈하는 데 각종 시간(대기시간과 마감시간)을 이용한다.
하지만 시간 규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정치 영역을 찾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권력의 행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에도, 시간은 이제까지 정치학에서 본격적인 연구 주제가 되지 못했다. 국가가 국민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암묵적 인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장 정치학자인 엘리자베스 F. 코헨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며, 국가가 시민의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왜 정당한지, 부당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 묻는다. 시간은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시간이 정치적 절차에서 꼭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가 시민들의 시간을 공평하게 다루지 않을 때 발생하는 시간적 불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가 기다리라고 요구할 때 그 타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시간에 대한 정치사상사적 관점들과 정치경제학 이론, 실제 정치 관행과 규범적 분석을 동원하여 이제까지 정치학에서 간과되었던 시간의 정치적 가치를 밝히려 한다.
시간은 어떻게 정치적 경계를 설정하는가?
국가는 영토와 시간이라는 두 가지 정치적 경계를 가진다. 철조망과 장벽, 국경수비대로 상징되는 지리적 경계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적 경계는 더 효율적이고 강력하게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영토의 경계를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다른 나라와 마찰을 빚지만, 시간적 경계는 정치 시스템 안에서 얼마든지 간단한 문서만으로 유효기간과 데드라인을 설정할 수 있다.
시간적 경계는 정체와 주권이 확립되는 기점이 되기도 하고, 국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가 1793년 공화국 출범에 맞춰 새로운 달력과 시간제도를 선포하고, 독일이 나치 정권과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 전후 ‘슈툰데 눌’(0시)을 선언한 것이 전자의 사례라면, 1608년 영국에서 일어난 ‘캘빈 사건’은 후자를 대표하는 역사적 재판이다. 제임스 1세 때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버트 캘빈의 상속권을 둘러싼 이 재판의 쟁점은 캘빈이 신민인지 여부였다(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첫 통합 군주였지만, 당시 스코틀랜드인은 잉글랜드 법에서 신민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훗날 권리청원을 주도한 에드워드 코크 판사는 캘빈처럼 ‘포스트나티’(왕이 나라를 통합한 후에 태어난 사람)는 신민이지만 ‘안테나티’(왕이 나라를 통합하기 전에 태어난 사람)는 아니라고 판결함으로써, 출생지나 혈통만큼이나 출생 시점을 국민의 중요한 자격 요건으로 삼는 전통을 만들었다.
특정일을 기준으로 국민과 비국민, 권리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나눈 예는 무수히 많다. 일례로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괌을 할양받은 1899년 당시 섬에 살고 있었거나 이후 섬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1952년 시민권을 주었고, 1986년 이민법 개정 덕분에 1982년부터 미국에 거주해온 불법체류자들은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적 경계는 그것이 설정되는 방식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고정된 단독 경계’는 캘빈 사건이나 프랑스 공화국 달력에서처럼 특정한 날짜를 지정하여 그날을 기준으로 사람들의 법적 지위가 달라지는 경우다. 둘째, ‘초읽기 경계’는 비자 만료나 공소시효처럼 기한을 명시하는 경우다. 셋째, ‘반복적 경계’는 선거 일정이나 선거구 조정처럼 데드라인이 반복되는 경우다. 단독 경계는 단순하고 효율적이지만 자의적이고 변경 불가능한 데 반해, 반복적 경계는 합의에 의해 결정되고 변경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민주적이다.
저자소개
지은이 : 엘리자베스 F. 코헨(Elizabeth F. Cohen)
2003년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현대 정치이론, 정치사상사, 이민과 시민권 문제 등이다. 지금까지 《시민권 연구Citizenship Studies》 《의학철학저널Journal of Medicine and Philosophy》 《정치학의 관점Perspectives on Politics》 《윤리와 국제문제Ethics and International Affairs》 등의 학술지에 여러 논문을 발표하여, 아동의 권리, 이민자 수용소의 개선, 이민정책, 동성결혼, 범죄자와 전과자의 시민권 박탈 문제 등에서 진보적이면서도 균형 잡힌 의견을 피력해왔다.
저서로는 《민주정치와 준시민Semi-Citizenship in Democratic Politics》(2009)이 있으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폴리티코》 등의 대중지에도 활발히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옮긴이 : 최이현
옮긴 책으로 토머스 페인의 《상식》, 《2017 세계경제대전망》(공역), 《여자들에게, 문제는 돈이다》, 《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등이 있으며, 계간지 《뉴필로소퍼》 번역에 참여하고 있다.
책정보 및 내용요약
국가는 합법적으로 국민의 시간을 통제하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특정한 시간이나 기간에 정치적 의미가 부여될 때, 우리는 그 타당한 이유를 질문해야 한다. 이 책은 시간이 민주적 합의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정치 행위자들이 권리를 거래할 수 있게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재화’라고 주장한다. 또한 국가가 시민들의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규범적 분석을 통해 국가가 일부 사람들의 시간을 남용하고 차별하는 경우, 시간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사람들이 겪는 시간적 불평등에 주목한다.
이제까지 정치와 정의에 관한 이론들에서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던 시간의 정치적 가치에 대한 주목할 만한 분석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새로이 생각해보게 해줄 것이다.
목차
1. 정치와 시간
이 책의 개요 – 19
사회과학 속 시간 – 38
몇 가지 주의할 점 – 45
정치에서 시간이 왜 중요한가? - 48
2. 국민국가, 국민, 시민의 주권을 결정하는 시간적 경계
영토적 경계와 시간적 경계 – 53
다양한 시간적 경계 - 57
시간적 경계의 세 가지 유형 – 87
시간적 경계의 규범적 의미 – 97
3. 민주주의와 기간 그리고 살아있는 합의
정치적 재화인 ‘기간’과 민주적 ‘과정’의 관계- 103
정치사상사에서 시간의 정치적 가치 – 108
시간의 헌법적 가치 – 115
자유민주주의에서 하나의 재화로서의 시간 – 131
미국 시민권: 기간과 살아있는 합의 - 135
합의를 넘어: 민주적 과정을 위한 시간의 가치 – 141
정치 과정의 대용물로서 시간적 절차 – 148
4. 시간의 정치적 가치
시간 공식 – 153
시간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 155
왜 시간인가? - 163
정치적 시간과 정의 – 186
5. 시간의 정치경제학
정치적 거래 도구로서의 시간 – 191
시간의 정치경제학 – 194
규범적 함의 – 221
상대적으로 공평한 재화로서의 시간 – 237
6. 시간과 민주주의
민주정치에서 시간의 특별한 가치- 241
시간성 위에 서 있는 민주주의 – 247
심화 연구를 위한 안내 – 255
주 - 258
참고문헌 - 282
편집자 추천글
해외 서평
“시간은 그 불가피한 심판에 저항하려는 모든 인간의 시도를 거부하는 가장 희소한 자원이다. 그 결과 시간은 권력과 자원을 놓고 벌이는 투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실제로 시간은 그러한 투쟁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정치이론가들은 시간에 대해 이제까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명쾌하고 매력적인 새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녀는 시간의 정치경제학을 전개하고, 권리와 권력과 분배에 관한 수많은 논쟁에서 그것이 가지는 함의를 보여준다. 중요하고 신선한 공헌이다.”
- 이언 샤피로 (예일대학교 정치학과 석좌교수)
“정치와 시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가득한 책. 저자는 시간이 정치 행위자들에게 비교불가능한 것들을 거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모든 데드라인이 동일하지는 않다고 설명한다. 정치이론가와 실증적 연구자들은 저자의 이 주목할 만한 연구에서 귀중한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 수잔 스톡스 (예일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이 선구적인 책에서 저자는 시간이라는 차원을 통해 정치학의 핵심 개념들을 다시 생각할 때 정치가 어떻게 보일지를 묻는다. 문제들은 독창적이고, 처벌에서 시민권까지 아우르는 여러 영역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정치이론가와 공공정책 연구자가 꼭 읽어야 할 책.”
- 코리 브렛슈나이더 (브라운대학교)
“이 책은 시간이 현대의 정치적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여러 방식을 보여준다. 코헨이 보여주는 둘 사이의 관계는 놀랍고 명쾌하다. 이 뛰어난 책을 읽는 데 쓰는 시간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 조지프 H. 카렌스 (토론토대학교)
시간은 정치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할 때 주요 통제 수단으로 삼는 것 중 하나가 ‘시간’이다. 우리는 일정한 연령이 되어야 성인으로서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누리고, 중범죄를 저지르면 일정 기간 자유를 박탈당하는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또한 귀화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나라에 일정 기간 거주해야 하며, 일부 국가에서는 일정한 임신 기간 이후에는 낙태를 금지당한다. 세금신고에서부터, 군복무, 정년퇴직, 연금 등의 복지혜택, 비자와 영주권, 공소시효, 일정한 기간마다 되풀이되는 여러 선거 일정에 이르기까지 정치는 시민에게 자격과 권리를 부여하고 박탈하는 데 각종 시간(대기시간과 마감시간)을 이용한다.
하지만 시간 규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정치 영역을 찾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권력의 행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에도, 시간은 이제까지 정치학에서 본격적인 연구 주제가 되지 못했다. 국가가 국민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암묵적 인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장 정치학자인 엘리자베스 F. 코헨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며, 국가가 시민의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왜 정당한지, 부당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 묻는다. 시간은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시간이 정치적 절차에서 꼭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가 시민들의 시간을 공평하게 다루지 않을 때 발생하는 시간적 불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국가가 기다리라고 요구할 때 그 타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시간에 대한 정치사상사적 관점들과 정치경제학 이론, 실제 정치 관행과 규범적 분석을 동원하여 이제까지 정치학에서 간과되었던 시간의 정치적 가치를 밝히려 한다.
시간은 어떻게 정치적 경계를 설정하는가?
국가는 영토와 시간이라는 두 가지 정치적 경계를 가진다. 철조망과 장벽, 국경수비대로 상징되는 지리적 경계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적 경계는 더 효율적이고 강력하게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영토의 경계를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다른 나라와 마찰을 빚지만, 시간적 경계는 정치 시스템 안에서 얼마든지 간단한 문서만으로 유효기간과 데드라인을 설정할 수 있다.
시간적 경계는 정체와 주권이 확립되는 기점이 되기도 하고, 국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가 1793년 공화국 출범에 맞춰 새로운 달력과 시간제도를 선포하고, 독일이 나치 정권과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 전후 ‘슈툰데 눌’(0시)을 선언한 것이 전자의 사례라면, 1608년 영국에서 일어난 ‘캘빈 사건’은 후자를 대표하는 역사적 재판이다. 제임스 1세 때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버트 캘빈의 상속권을 둘러싼 이 재판의 쟁점은 캘빈이 신민인지 여부였다(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첫 통합 군주였지만, 당시 스코틀랜드인은 잉글랜드 법에서 신민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훗날 권리청원을 주도한 에드워드 코크 판사는 캘빈처럼 ‘포스트나티’(왕이 나라를 통합한 후에 태어난 사람)는 신민이지만 ‘안테나티’(왕이 나라를 통합하기 전에 태어난 사람)는 아니라고 판결함으로써, 출생지나 혈통만큼이나 출생 시점을 국민의 중요한 자격 요건으로 삼는 전통을 만들었다.
특정일을 기준으로 국민과 비국민, 권리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나눈 예는 무수히 많다. 일례로 미국은 스페인으로부터 괌을 할양받은 1899년 당시 섬에 살고 있었거나 이후 섬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1952년 시민권을 주었고, 1986년 이민법 개정 덕분에 1982년부터 미국에 거주해온 불법체류자들은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적 경계는 그것이 설정되는 방식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고정된 단독 경계’는 캘빈 사건이나 프랑스 공화국 달력에서처럼 특정한 날짜를 지정하여 그날을 기준으로 사람들의 법적 지위가 달라지는 경우다. 둘째, ‘초읽기 경계’는 비자 만료나 공소시효처럼 기한을 명시하는 경우다. 셋째, ‘반복적 경계’는 선거 일정이나 선거구 조정처럼 데드라인이 반복되는 경우다. 단독 경계는 단순하고 효율적이지만 자의적이고 변경 불가능한 데 반해, 반복적 경계는 합의에 의해 결정되고 변경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민주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