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정보 및 내용요약
“한때 북반구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가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학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청중석에서는 분노에 찬 질문들이 쏟아졌고, 아가시를 향해 온갖 야유와 비난, 욕설을 퍼부었다. 한 저명한 지질학자는 계속해서 ‘하느님’을 연호했다. 학문적인 예의라는 겉치레는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마치 정치집회의 군중처럼 흥분해 날뛰었다. 서로 점잔을 빼던 학회장은 이내 무지와 혼동의 험악한 난투장으로 바뀌었다. 촉망받던 지질학자가 일순간에 3류 학자로 추락하고 마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과학사에 영원히 그 오명을 남긴 유명한 ‘1837년 뇌샤텔 강연’의 전모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한때 1,600미터나 되는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였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지만,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을까?
몇몇 에스키모인과 펭귄들 외에는 아무도 ‘빙하시대(Ice Age)’의 존재를 알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빙하시대를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일류 과학자가 일순간에 엉터리 취급을 받고, 당대 가장 위대한 지질학자도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이를 부인하던 시기가 있었다. 불과 15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온갖 고난에도 북극해를 항해하고 알프스 산을 누비며 빙하시대를 밝혀낸 이들이 있다. 그들 이전에는 아무도 지구를 뒤덮었던 빙하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 이후에는 아무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빙하시대는 우리들의 인식의 관문을 통과했고, 이제 고정관념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이 책은 미지에 도전하는 탐험가의 심장과 사실을 밝히려는 과학자의 정신으로, 완전한 무지에서 전혀 새로운 지식을 확립한 잊혀진 영웅들, 아이스 파인더(Ice Finder)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편집자 추천글
시인, 교수, 정치가 - 빙하시대를 발견한 세 영웅
인류의 역사가 한 시대의 고정관념에 도전해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낳은 위대한 개척자들의 지적 여정이라면, 빙하시대의 발견만큼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없을 것이다.
<아이스 파인더>는 19세기 과학사의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인 빙하시대의 발견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 사람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이다. 과학자로서 그리고 탐험가로서 그들은 비단 새로운 지질학적 사실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 지구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그들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빙하시대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지구, 지구상의 생명체를 올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이스 파인더>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다. 지질학자인 루이 아가시와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그리고 탐험가 엘리샤 켄트 케인(Elisha Kent Kane)이 그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빙하시대를 상상할 수 있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 세 사람의 선구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 아가시의 외로운 투쟁
독일의 훔볼트와 더불어 근대 박물학의 양대 산맥이었던 프랑스의 조르주 퀴비에의 수제자로서, 물고기 화석 연구로 근대 지질학에서 확고한 명성을 쌓은 루이 아가시는 빙하의 모양과 운동에 관한 독자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최초로 빙하시대를 주장했지만, 곧 학계의 비웃음과 냉대에 시달려야 했던 비운의 학자였다.
아가시는 스위스인으로 알프스 산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프스 산맥에는 당시의 지질학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지형들이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알프스 주봉의 암석들이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기이한 모양으로 쌓여 있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어떻게 그렇게 멀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당시 지질학의 일인자는 영국의 찰스 라이엘이었고, 그는 이 문제를 홍수에 떠내려온 빙산의 퇴적물로 설명했다. 이른바 ‘빙산표류설’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아가시는 수십 차례에 걸쳐 알프스 산맥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은 후에, 이것은 바로 알프스 정상을 덮고 있는 빙하의 흔적, 빙퇴석임을 밝혀냈다. 거대한 빙하가 알프스 정상의 바위와 흙을 실어다 여기까지 운반하고는 녹아 없어지면서 생겼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는 알프스의 빙하는 한때 지금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컸으며, 어떤 곳은 한때 완전히 빙하로 덮여 있었지만 이후에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는 것, 더 나아가 이러한 빙퇴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지역, 곧 북극부터 지중해까지 북반구 전체가 한때 하나의 거대한 빙하로 덮여 있었다는 것, 그 빙하시대 동안 아마도 생명체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멸종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증거를 수집,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맨 앞에서 살펴본 기념비적인 뇌샤텔 강연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을 경청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배척당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스코틀랜드와 미국 등을 탐사하며, 빙하시대 이론을 계속 가꾸어갔다. 계속되는 연구와 증거 앞에 빙하반대론자들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빙하론이 대세를 이루는 듯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영광을 차지한 것은 아가시가 아니라 이제까지 줄곧 빙하론을 반박해온 찰스 라이엘이었다.
아가시는 말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미국 근대 과학의 진흥을 위해 헌신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많은 미래 과학자들을 길러냈다.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이며 아가시를 따라 수차례 탐사 여행을 동행했던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나와 같은 세대 중 아가시에게 교육받지 않은 과학자는 거의 없다.”
빙하시대를 밝힌 그의 공로는 죽을 때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었다.
시인 켄트의 무시무시한 모험
앞의 뇌샤텔 강연으로 돌아가 보자. 왜 과학자들이 그처럼 이성을 잃고 광분했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계곡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얼음덩이, 북반구 전체를 덮고 생명체를 절멸시키는 빙하를 그들은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빙하는 알프스 꼭대기의 조그만 만년설뿐이었고,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극을 얼지 않는 잔잔한 바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과학자의 논리가 아니라 시인의 영감, 바로 상상력이었다. 거대한 빙하의 존재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시적 언어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가시의 능력 밖이었다.
하지만 뇌샤텔 강연이 있은 지 20년 후, 사람들의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그린란드의 거대한 얼음지옥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탐험가 엘리샤 켄트 케인의 극해 탐험기를 읽은 사람들은 비로소 육지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빙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무턱대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빙하시대’가 이제는 상상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아가시가 그토록 기다렸던 시인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케인은 커다란 업적을 이뤄 불멸의 명성을 얻으려는 야심만만한 미국의 젊은이였다. 세계 이곳저곳을 탐험한 그는 1853년,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얼지 않는 북극해 항로’를 찾아나섰다. 한겨울에도 큰 호수의 한 가운데는 얼음이 얇거나 전혀 얼지 않듯, 당시 사람들은 빙산이 떠다니는 지역을 지나면 북극 주변은 얼음이 없는 평온한 바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도 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케인은 탐험대를 이끌고 허드슨 만을 지나 그린란드 서쪽을 따라 북극으로 항해해갔다. 천신만고 끝에 빙산의 숲을 헤치고 이제껏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그린란드 북단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끝도 없는 얼음의 바다, 대륙빙의 너른 벌판이었다.
“범선에서 남쪽으로 14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정찰대는 갑작스럽게 경계에 다다랐다. 그들은 그린란드 대륙빙을 발견했다. 이 대륙빙은 얼어붙은 강도 아니고 전방으로 뻗어 있는 빙하 후미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린란드 끝에서 끝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가득 덮고 있는 한 덩어리의 광활한 얼음 바다였다. 가장자리의 높이만도 120미터나 되었다. ……그 장면은 대서양만큼이나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였고 대서양처럼 얼어붙은 파도 아래 어떤 산과 계곡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찰대 앞에는 멜빌 만에서 본 얼음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얼음이 놓여 있었다. 실제로 남극해를 항해한 선원 한두 명과 에스키모인 몇 명을 제외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얼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이 태초의 대빙하와 처음으로 맞부딪친 지질학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얼지 않는 북극해를 찾아왔던 탐험대에게 그것은 끝없는 절망만을 안겨주었다. 더 이상 돌아갈 수도 없었다. 혹독한 겨울바람은 그들의 퇴로까지도 모두 꽁꽁 얼려버렸다. 그들은 봄이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이윽고 봄이 왔지만 돌아가는 길은 더욱 험난했다. 얼마 전진하지도 못했는데 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다. 식량과 연료가 있는 첫번째 겨울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식량도 연료도 거의 떨어져갔다. 추위와 굶주림에 선원들도 썰매개들도 서서히 죽어갔다. 이윽고 그들은 쥐를 잡아먹고 갑판을 뜯어 불을 때기 시작했다.
무려 17개월 동안 케인 탐험대는 얼음지옥에 갇혀 있었다. 그들이 보트 두 대에 의지해 극적으로 생환했을 때, 전세계는 그들을 열렬히 환호했다. 특히 그들이 목격한 거대한 빙하 이야기는 모든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케인은 고향에 돌아온 후 자신의 항해일지를 바탕으로 탐험기를 집필했다. 그의 탐험기는 한동안 미국 어느 가정에나 성서와 나란히 꽂힐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가 묘사한 어마어마한 빙하의 이미지가 비로소 모든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케인은 탐험기를 마친 후 곧 세상을 떠났다. 2년간의 그린란드 생활은 이미 그를 너무나도 쇠약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영웅적인 탐험가이자 모두에게 빙하시대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 위대한 시인은 죽음과 함께 곧 잊혀져갔다.
정치가 라이엘의 음모
찰스 라이엘은 ‘지질학의 아버지’답게 19세기 지질학계를 호령하던 독재자였다. 그가 당대 지질학의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독창적인 연구 때문이 아니라 사실을 종합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저 『지질학 원리』의 개정판을 거듭 내면서 매해 새롭게 밝혀진 지질학적 사실들을 추가해나갔다(이 책은 다윈이 비글 호 탐험 때 소장했던 것으로, 다윈은 라이엘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자신의 책에 들어 있지 않은 어떠한 사실도 인정하지 않겠으며, 오직 자신의 책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태도였다.
그는 빙하론을 처음부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이다”라는 자신의 모토에 정면으로 위반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관찰할 수 있는 지질학적인 힘만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계곡을 깎고 피오르드를 만드는 대빙하란 상상의 존재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어디에서도 빙하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그의 무지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가시가 그의 고향 에든버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아가시와 함께 주변 지형을 탐사하며 지금은 다 녹아 없어졌지만 아일랜드가 한때 두터운 빙하로 덮였었다는 것, 그것이 여러 특이 지형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아가시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아가시가 학회에서 그러한 주장을 펼칠 때, 그는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를 보고는 슬그머니 자신의 옛 주장으로 돌아갔다. 이는 그의 정치가로서의 처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케인의 탐험 이후 모든 사람이 빙하를 이야기하자, 그는 재빠르게 빙하 이론에 대한 연구 성과를 모은 후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아가시의 빙하이론을 일부 인정하면서 아가시가 틀린 부분을 수정한 것이었다(즉, 아가시의 주장처럼 빙하시대 동안 생명체는 절멸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였다는 이론. 라이엘의 새 책 『고대인의 지질학적 증거』는 빙하시대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첫 책으로, 새로운 지질학적 고고학의 모범이 되었다).
사람들은 라이엘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빙하시대 개념의 출처로 아가시를 인용하였다. 아가시의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가시는 줄곧 안타를 쳤지만 경기에는 지고 말았다. 최후의 승리의 미소를 지은 사람은 정치의 달인 라이엘이었다.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한 과학사
<아이스 파인더>는 이처럼 세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준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병렬구조로 진행되어 각 국면에서 그들이 느꼈던 성공과 실패, 보람과 좌절, 갈등과 화해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특히, 케인의 그린란드 탐험 이야기는 글 전체에 끊임없이 긴장과 흥미를 제공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빙하가 그저 알프스 산 위의 고요한 눈더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빙하는 일종의 얼음의 강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그 운동이 알프스의 깊은 계곡들을 깎고, 나이아가라 폭포와 슈피리어 호를 만들고, 수십 수백 톤의 해안 바위들을 저 내륙 깊숙이까지 옮겨놓는 것이다. 타이타닉 호를 침몰시킨 거대한 빙산은 이런 빙하로부터 떨어져나온 작은 조각일 뿐이다. <아이스 파인더>를 읽고 있노라면, 거대한 빙하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우리의 눈앞에 선명히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저자의 일관된 문제의식은 ‘과학은 어떻게 진보하는가’이다. 아가시도, 라이엘도, 켄트도 모두 틀린 가정과 선입견에서 출발했다. 아가시는 알프스 지근에 살면서도 오랫동안 빙하에 주목하지 못했으며, 라이엘은 지질학적 힘으로서 빙하의 역할을 부정했고, 켄트는 얼지 않는 북극해를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지에서 결국 전혀 새로운 지식, 빙하시대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진실이 드러났다. 아가시가 빙하시대를 처음 주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도 이와 같았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제시된 증거들을 애써 외면했다. 빙하시대가 새로운 고정관념이 된 현대인들에게 당시 그들의 태도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학은 사실의 축적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고정관념은 명확한 사실 앞에서도 가끔 완강히 저항한다는 것, 우리의 인식의 틀을 바꿀 수 있는 어떤 사건(빙하시대의 경우에는 상상력을 일깨운 켄트의 시적 언어가 이에 해당한다)이 따르지 않는 한 새로운 이론은 정착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현재의 사실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저자는 은연중 강조한다.
저자소개
지은이 : 에드먼드 블레어 볼스
옮긴이 : 김문영
책정보 및 내용요약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가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학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청중석에서는 분노에 찬 질문들이 쏟아졌고, 아가시를 향해 온갖 야유와 비난, 욕설을 퍼부었다. 한 저명한 지질학자는 계속해서 ‘하느님’을 연호했다. 학문적인 예의라는 겉치레는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마치 정치집회의 군중처럼 흥분해 날뛰었다. 서로 점잔을 빼던 학회장은 이내 무지와 혼동의 험악한 난투장으로 바뀌었다. 촉망받던 지질학자가 일순간에 3류 학자로 추락하고 마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과학사에 영원히 그 오명을 남긴 유명한 ‘1837년 뇌샤텔 강연’의 전모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한때 1,600미터나 되는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였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지만,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을까?
몇몇 에스키모인과 펭귄들 외에는 아무도 ‘빙하시대(Ice Age)’의 존재를 알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빙하시대를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일류 과학자가 일순간에 엉터리 취급을 받고, 당대 가장 위대한 지질학자도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이를 부인하던 시기가 있었다. 불과 15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온갖 고난에도 북극해를 항해하고 알프스 산을 누비며 빙하시대를 밝혀낸 이들이 있다. 그들 이전에는 아무도 지구를 뒤덮었던 빙하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 이후에는 아무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빙하시대는 우리들의 인식의 관문을 통과했고, 이제 고정관념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이 책은 미지에 도전하는 탐험가의 심장과 사실을 밝히려는 과학자의 정신으로, 완전한 무지에서 전혀 새로운 지식을 확립한 잊혀진 영웅들, 아이스 파인더(Ice Finder)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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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가 한 시대의 고정관념에 도전해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낳은 위대한 개척자들의 지적 여정이라면, 빙하시대의 발견만큼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없을 것이다.
<아이스 파인더>는 19세기 과학사의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인 빙하시대의 발견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 사람의 파란만장한 이야기이다. 과학자로서 그리고 탐험가로서 그들은 비단 새로운 지질학적 사실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 지구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그들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빙하시대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지구, 지구상의 생명체를 올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이스 파인더>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다. 지질학자인 루이 아가시와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그리고 탐험가 엘리샤 켄트 케인(Elisha Kent Kane)이 그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빙하시대를 상상할 수 있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 세 사람의 선구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 아가시의 외로운 투쟁
독일의 훔볼트와 더불어 근대 박물학의 양대 산맥이었던 프랑스의 조르주 퀴비에의 수제자로서, 물고기 화석 연구로 근대 지질학에서 확고한 명성을 쌓은 루이 아가시는 빙하의 모양과 운동에 관한 독자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최초로 빙하시대를 주장했지만, 곧 학계의 비웃음과 냉대에 시달려야 했던 비운의 학자였다.
아가시는 스위스인으로 알프스 산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프스 산맥에는 당시의 지질학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지형들이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알프스 주봉의 암석들이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기이한 모양으로 쌓여 있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어떻게 그렇게 멀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당시 지질학의 일인자는 영국의 찰스 라이엘이었고, 그는 이 문제를 홍수에 떠내려온 빙산의 퇴적물로 설명했다. 이른바 ‘빙산표류설’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아가시는 수십 차례에 걸쳐 알프스 산맥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은 후에, 이것은 바로 알프스 정상을 덮고 있는 빙하의 흔적, 빙퇴석임을 밝혀냈다. 거대한 빙하가 알프스 정상의 바위와 흙을 실어다 여기까지 운반하고는 녹아 없어지면서 생겼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는 알프스의 빙하는 한때 지금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컸으며, 어떤 곳은 한때 완전히 빙하로 덮여 있었지만 이후에 완전히 녹아 없어졌다는 것, 더 나아가 이러한 빙퇴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지역, 곧 북극부터 지중해까지 북반구 전체가 한때 하나의 거대한 빙하로 덮여 있었다는 것, 그 빙하시대 동안 아마도 생명체의 상당수가 사라졌고 멸종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와 증거를 수집,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맨 앞에서 살펴본 기념비적인 뇌샤텔 강연이다. 하지만 그의 의견을 경청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배척당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스코틀랜드와 미국 등을 탐사하며, 빙하시대 이론을 계속 가꾸어갔다. 계속되는 연구와 증거 앞에 빙하반대론자들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빙하론이 대세를 이루는 듯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영광을 차지한 것은 아가시가 아니라 이제까지 줄곧 빙하론을 반박해온 찰스 라이엘이었다.
아가시는 말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미국 근대 과학의 진흥을 위해 헌신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많은 미래 과학자들을 길러냈다. 미국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이며 아가시를 따라 수차례 탐사 여행을 동행했던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나와 같은 세대 중 아가시에게 교육받지 않은 과학자는 거의 없다.”
빙하시대를 밝힌 그의 공로는 죽을 때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사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었다.
시인 켄트의 무시무시한 모험
앞의 뇌샤텔 강연으로 돌아가 보자. 왜 과학자들이 그처럼 이성을 잃고 광분했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계곡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얼음덩이, 북반구 전체를 덮고 생명체를 절멸시키는 빙하를 그들은 일찍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빙하는 알프스 꼭대기의 조그만 만년설뿐이었고, 그때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극을 얼지 않는 잔잔한 바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과학자의 논리가 아니라 시인의 영감, 바로 상상력이었다. 거대한 빙하의 존재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해주는 시적 언어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가시의 능력 밖이었다.
하지만 뇌샤텔 강연이 있은 지 20년 후, 사람들의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그린란드의 거대한 얼음지옥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탐험가 엘리샤 켄트 케인의 극해 탐험기를 읽은 사람들은 비로소 육지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빙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무턱대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빙하시대’가 이제는 상상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아가시가 그토록 기다렸던 시인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케인은 커다란 업적을 이뤄 불멸의 명성을 얻으려는 야심만만한 미국의 젊은이였다. 세계 이곳저곳을 탐험한 그는 1853년,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얼지 않는 북극해 항로’를 찾아나섰다. 한겨울에도 큰 호수의 한 가운데는 얼음이 얇거나 전혀 얼지 않듯, 당시 사람들은 빙산이 떠다니는 지역을 지나면 북극 주변은 얼음이 없는 평온한 바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도 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케인은 탐험대를 이끌고 허드슨 만을 지나 그린란드 서쪽을 따라 북극으로 항해해갔다. 천신만고 끝에 빙산의 숲을 헤치고 이제껏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그린란드 북단에 이르렀을 때,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끝도 없는 얼음의 바다, 대륙빙의 너른 벌판이었다.
“범선에서 남쪽으로 14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정찰대는 갑작스럽게 경계에 다다랐다. 그들은 그린란드 대륙빙을 발견했다. 이 대륙빙은 얼어붙은 강도 아니고 전방으로 뻗어 있는 빙하 후미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린란드 끝에서 끝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가득 덮고 있는 한 덩어리의 광활한 얼음 바다였다. 가장자리의 높이만도 120미터나 되었다. ……그 장면은 대서양만큼이나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였고 대서양처럼 얼어붙은 파도 아래 어떤 산과 계곡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찰대 앞에는 멜빌 만에서 본 얼음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얼음이 놓여 있었다. 실제로 남극해를 항해한 선원 한두 명과 에스키모인 몇 명을 제외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얼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이 태초의 대빙하와 처음으로 맞부딪친 지질학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얼지 않는 북극해를 찾아왔던 탐험대에게 그것은 끝없는 절망만을 안겨주었다. 더 이상 돌아갈 수도 없었다. 혹독한 겨울바람은 그들의 퇴로까지도 모두 꽁꽁 얼려버렸다. 그들은 봄이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이윽고 봄이 왔지만 돌아가는 길은 더욱 험난했다. 얼마 전진하지도 못했는데 다시 겨울이 오고 있었다. 식량과 연료가 있는 첫번째 겨울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식량도 연료도 거의 떨어져갔다. 추위와 굶주림에 선원들도 썰매개들도 서서히 죽어갔다. 이윽고 그들은 쥐를 잡아먹고 갑판을 뜯어 불을 때기 시작했다.
무려 17개월 동안 케인 탐험대는 얼음지옥에 갇혀 있었다. 그들이 보트 두 대에 의지해 극적으로 생환했을 때, 전세계는 그들을 열렬히 환호했다. 특히 그들이 목격한 거대한 빙하 이야기는 모든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케인은 고향에 돌아온 후 자신의 항해일지를 바탕으로 탐험기를 집필했다. 그의 탐험기는 한동안 미국 어느 가정에나 성서와 나란히 꽂힐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가 묘사한 어마어마한 빙하의 이미지가 비로소 모든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케인은 탐험기를 마친 후 곧 세상을 떠났다. 2년간의 그린란드 생활은 이미 그를 너무나도 쇠약하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영웅적인 탐험가이자 모두에게 빙하시대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 위대한 시인은 죽음과 함께 곧 잊혀져갔다.
정치가 라이엘의 음모
찰스 라이엘은 ‘지질학의 아버지’답게 19세기 지질학계를 호령하던 독재자였다. 그가 당대 지질학의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독창적인 연구 때문이 아니라 사실을 종합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저 『지질학 원리』의 개정판을 거듭 내면서 매해 새롭게 밝혀진 지질학적 사실들을 추가해나갔다(이 책은 다윈이 비글 호 탐험 때 소장했던 것으로, 다윈은 라이엘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자신의 책에 들어 있지 않은 어떠한 사실도 인정하지 않겠으며, 오직 자신의 책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태도였다.
그는 빙하론을 처음부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현재는 과거를 푸는 열쇠이다”라는 자신의 모토에 정면으로 위반되기 때문이었다. 현재 관찰할 수 있는 지질학적인 힘만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계곡을 깎고 피오르드를 만드는 대빙하란 상상의 존재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어디에서도 빙하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그의 무지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가시가 그의 고향 에든버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아가시와 함께 주변 지형을 탐사하며 지금은 다 녹아 없어졌지만 아일랜드가 한때 두터운 빙하로 덮였었다는 것, 그것이 여러 특이 지형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아가시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아가시가 학회에서 그러한 주장을 펼칠 때, 그는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를 보고는 슬그머니 자신의 옛 주장으로 돌아갔다. 이는 그의 정치가로서의 처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케인의 탐험 이후 모든 사람이 빙하를 이야기하자, 그는 재빠르게 빙하 이론에 대한 연구 성과를 모은 후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그것은 아가시의 빙하이론을 일부 인정하면서 아가시가 틀린 부분을 수정한 것이었다(즉, 아가시의 주장처럼 빙하시대 동안 생명체는 절멸한 것이 아니라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였다는 이론. 라이엘의 새 책 『고대인의 지질학적 증거』는 빙하시대와 인간의 기원에 관한 첫 책으로, 새로운 지질학적 고고학의 모범이 되었다).
사람들은 라이엘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빙하시대 개념의 출처로 아가시를 인용하였다. 아가시의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가시는 줄곧 안타를 쳤지만 경기에는 지고 말았다. 최후의 승리의 미소를 지은 사람은 정치의 달인 라이엘이었다.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한 과학사
<아이스 파인더>는 이처럼 세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극적으로 대비해 보여준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병렬구조로 진행되어 각 국면에서 그들이 느꼈던 성공과 실패, 보람과 좌절, 갈등과 화해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특히, 케인의 그린란드 탐험 이야기는 글 전체에 끊임없이 긴장과 흥미를 제공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빙하가 그저 알프스 산 위의 고요한 눈더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빙하는 일종의 얼음의 강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그 운동이 알프스의 깊은 계곡들을 깎고, 나이아가라 폭포와 슈피리어 호를 만들고, 수십 수백 톤의 해안 바위들을 저 내륙 깊숙이까지 옮겨놓는 것이다. 타이타닉 호를 침몰시킨 거대한 빙산은 이런 빙하로부터 떨어져나온 작은 조각일 뿐이다. <아이스 파인더>를 읽고 있노라면, 거대한 빙하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우리의 눈앞에 선명히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저자의 일관된 문제의식은 ‘과학은 어떻게 진보하는가’이다. 아가시도, 라이엘도, 켄트도 모두 틀린 가정과 선입견에서 출발했다. 아가시는 알프스 지근에 살면서도 오랫동안 빙하에 주목하지 못했으며, 라이엘은 지질학적 힘으로서 빙하의 역할을 부정했고, 켄트는 얼지 않는 북극해를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지에서 결국 전혀 새로운 지식, 빙하시대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진실이 드러났다. 아가시가 빙하시대를 처음 주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도 이와 같았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제시된 증거들을 애써 외면했다. 빙하시대가 새로운 고정관념이 된 현대인들에게 당시 그들의 태도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학은 사실의 축적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의 고정관념은 명확한 사실 앞에서도 가끔 완강히 저항한다는 것, 우리의 인식의 틀을 바꿀 수 있는 어떤 사건(빙하시대의 경우에는 상상력을 일깨운 켄트의 시적 언어가 이에 해당한다)이 따르지 않는 한 새로운 이론은 정착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현재의 사실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저자는 은연중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