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사회교황 연대기 (아카데미판)

THE POPES

교황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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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2014년 출간된 《교황 연대기》의 아카데미판(보급판)입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음 / 남길영 외 옮김 / 872쪽 / 35,000원 / 140*207 반양장 / 2025년 5월 30일 출간

ISBN 979-11-6689-348-3 0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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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연대기》 아카데미판 출간!

베드로에서 프란치스코까지,

‘역사의 인디애나 존스’가 보여주는 교황들의 맨얼굴

 

가톨릭 교황은 2000년간 존속해온,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군주직. 지금도 세계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영적 지도자로 존숭받지만 고대 로마제국 이래 유럽사에선 굵직한 흔적을 남긴 세속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간 명멸했던 280여 명의 교황 가운데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성인(聖人)들도 있고,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함과 죄악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도 있었다.

‘역사의 인디애나 존스’로 불리는 영국 저술가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이들의 행적을 한눈에 보여준다. 정통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에서 이단논쟁, 신성로마제국과의 다툼을 거쳐 바티칸시국의 성립까지 스케이트보드를 타듯 유연하게 그러면서 균형 잡힌 태도로 교황의 역사를 조망했다.



교황, 그들은 성자였는가?

타락한 세속의 권력자였는가?

존 노리치의 펜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교황들의 맨얼굴!

 

베드로에서 프란치스코까지, 숨가쁘게 질주하는 2000년 성속의 교황사

《교황 연대기》는 어떤 책인가?

 

《교황 연대기》는 《비잔티움 연대기》로 유명한 역사가인 존 노리치의 최근작. 25년 이상 구상하고 집필하여 81세가 되던 해에 탈고한 필생의 대작이기도 하다. 서구의 역사의 공백이었던 천년제국 비잔티움의 역사를 복원한 전작에서 보여준 탁월한 이야기 솜씨와 균형 잡힌 시각은 이번에도 여실히 발휘됐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며 바티칸시국의 국가원수다.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하느님의 계시를 가장 확실하게 통역해낼 수 있는 지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겨진다. 교황직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완전한 군주제로, 현재 개혁교황으로 불리는 프란치스코까지 280여 명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책은 2000년간 이어오고 있는 교황직에 대한 간단한 역사서이다. 저자는 다양한 연구 성과를 섭렵하여 방대한 교황의 역사를 한 권 안에 대하드라마처럼 복원해 냈다. 교황들의 업적을 단순나열하기보다는 그들의 인간적 면모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엮어내며, 대립교황을 포함한 수많은 교황들이 진정한 종교의 성자였는지 타락한 세속의 권력자는 아니었는지 파헤치고 있다.

 

방대한 유럽사를 한 눈에 꿰뚫어 주는 책

성 레오 교황은 흉노족과 고트족으로부터 로마를 지켰고,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줌으로써 황제 위에 교황의 위상을 세웠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후계자들은 주로 즉위하는 황제들과 맞서서 패권 다툼을 벌였고, 십자군 원정을 이끈 인노첸시오 3세 교황과 아비뇽에서 행해진 ‘아비뇽 유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알렉산데르 6세, 율리오 2세, 메디치의 레오 10세를 다루고 있다. 교황청의 부패에 맞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반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던 바오로 3세와 나폴레옹과 투쟁했던 비오 7세, 이탈리아 통일 운동 속에서 교황권을 이끌며 많은 변화를 도모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비오 10세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20세기에는 레오 13세 교황과 두 번의 세계대전 중에 교황직을 수행했던 베네딕토 15세와 반유대주의자를 혐오했던 비오 12세, 그리고 그의 총애를 받은 요한 23세를 다루고 있다. 재임한 지 보름도 안 되어 죽음을 맞은 요한 바오로 1세의 미스터리를 풀어보고,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를 살펴보고 있다. 역사 속에서 중간에 사임한 교황은 베네딕토 16세를 포함하여 모두 3명이다. 베네딕토 16세를 이어 2013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었다. 저자 노리치는 한국어판 후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대중교통 이용은 좀 자제해 달라는 바람을 전하며, 아직 평가는 힘들다면서도 저자 역시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의문에 답을 찾아가는 서술 방식

교황권은 대체로 베드로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과연 그 견해는 맞는 것일까? 노리치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보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베드로를 첫 번째 교황으로 보는 근거는 <마태복음> 16장(18~19)에 나오는 구절 외에는 미약하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의 주교를 교황이라고 한다면 베드로는 주교를 지낸 적이 없다. 과연 베드로를 첫 번째 교황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서로마가 망하고 300여 년이 흐른 후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이때부터 로마에는 두 명의 황제가 생겼다. 레오 3세 교황은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로마제국의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황제에게 왕관을 씌워줌으로써 교황 자신에게 왕관과 왕권을 수여할 수 있는 더 큰 권한과 영예를 선물한 것은 아닐까란 의문을 제기한다.

노리치의 이러한 서술 방식은 단편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근거를 가지고 시종일관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파고들지 않으면서도 손쉽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그의 필력이 참으로 놀랍다.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책 속에는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다. 교황이라고 하면 종교적 지도자로 세속과는 거리가 멀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제 교황들 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함과 재산축적, 친족등용, 강간, 살인, 음모 등 죄악 속에서 허우적거린 교황들도 많이 있다. 이 책에는 교황들의 삶과 행동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다. 이 책은 “지금껏 읽은 역사서 중에서 가장 기이하고 재미난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해외 언론평을 받고 있다.

 

여교황 조안 이야기

“오늘날까지도 그 의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놓여 있고, 교황선출 시에 사용된다. 그가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하위 성직자 중 한 사람이 고환을 만져 보고 그가 남자임을 증명한다. 그가 남자임이 확인되면 고환을 만진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친다. ‘그에게 고환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성직자들이 ‘주여, 찬미 받으소서.’라고 화답한다. 그리고 그들은 교황 선출이라는 성스러운 일을 기쁜 마음으로 진행한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여교황 조안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구멍 뚫린 의자를 만든 사람은 조안의 후임자였던 베네딕토 3세라고 구체적으로 확인해준다. 이 모든 이야기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알려진 알렉산데르 6세를 포함한 후임 교황들이 손으로 몸을 더듬는‒품위가 떨어지는‒일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믿을 수 있겠는가?

_142쪽, 6장 교황 조안

 

여교황 조안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자임을 숨기고 교황이 되었다가 정확한 출산일을 알지 못해서 행차하다가 길에서 출산을 했다는, 그래서 여자임이 탄로났다는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여교황 조안이 레오 4세와 베네딕토 3세 사이에서 교황직을 수행할 만한 시간적 공백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도 계속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구멍이 뚫린 의자가 여교황 조안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지 의심을 거둘 수 없다.

 

포르모스 교황의 사후재판 이야기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는 포르모소 교황의 사후재판이다. 이미 장례를 치르고 수개월이나 지난 교황의 시신을 파내와 교황의 제의를 입히고 교황의 자리에 앉혀놓고는 재판을 받게 한 것이었다.

 

후계자인 스테파노 6세의 명에 따라 896년 3월 포르모소의 시신은 다시 꺼내져 사후 8개월 만에 교황의 제의를 입고 교황의 자리에 앉혀져 모의재판을 받았다. 그는 위증과 교황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기소를 당했는데, 그는 다른 교구의 주교 시절에 로마 교구의 주교직을 수락했다고 한다(오늘날에는 죄가 되지 않는다). 예상 가능한 결과였지만, 그에게는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사제 서품을 포함하여 그와 관련된 모든 법적인 행위들은 가치가 없는 무효로 선언되었다. 이 판결은 엄청난 혼란을 불러왔으며, 포르모소의 시신은 (축성할 때 사용하던 오른쪽 세 개의 손가락을 제외하고)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_161쪽, 7장 니콜라오 1세와 창부정치

 

 

호색한, 족벌주의, 탐욕 등으로 얼룩진 최악의 교황들

역사상 최악의 교황으로 꼽히는 사람은 단연 알렉산데르 6세이다. 15세기의 교황이었던 알렉산데르 6세는 재임기간 동안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으며, 자신의 가문과 아들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었고, 딸을 이용해 세력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의 아들인 체사레는 처제인지 여동생인지 아무튼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형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형을 암살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정조를 설교하면서 정작 자신은 정부를 끼고 살고, 영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세속적인 것만 생각하여 교회에 오명을 씌웠다.’고 비난 받는다. 중세 사람들의 도덕을 담당했던 종교의 최고 권력자가 오히려 비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리고 교황청을 최악의 창부정치로 얼룩지게 만든 요한 12세는 가장 방탕한 교황이다. 그는 그 시대에 수치도 모를 만큼 방탕했던 두 남녀, 마로치아와 우고의 손자였으니 그렇게 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래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 마로치아의 손자(요한 12세)는 로마의 기혼녀들과 공개적으로 간통을 저지르며 살았다. 라테란 궁은 매춘의 훈련장으로 바뀌었고, 그가 처녀들과 과부들을 강간하니 독실한 마음으로 베드로 성지를 방문하려던 여성들이 그에게 당하지 않기 위하여 순례를 단념하기도 하였다.”

_167쪽, 7장 니콜라오 1세와 창부정치

 

 

책 속으로 _

 

1500년 동안 끊이지 않은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

 

처음에 하드리아노 4세는 자신을 마중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1세가 보낸 남작들 일행의 호위를 받으며 근엄한 자태로 말을 타고 황제의 진영으로 갔다. 그러나 곧 문제가 발생하였다. 전통적으로는 왕이 앞서서 교황이 탄 말에 굴레를 씌워 끌고 교황이 말에서 내려설 때는 등자를 잡아주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서는 그 순간 하드리아노 4세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지만, 이내 혼자서 내리더니 천천히 걸어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제야 프리드리히 1세는 앞으로 걸어 나와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교황으로부터 전통적인 평화의 입맞춤을 받기 위하여 일어섰다. 이번에는 교황이 어깃장을 놓았다. 최고의 권위인 교황에게 선대의 왕들이 제공했던 그 의식을 프리드리히 1세가 분명하게 거부했으니 이를 바로 잡기 전까지는 교황이 내리는 평화의 입맞춤도 있을 리 만무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마치 신부의 들러리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이 지켜야 할 의무의 일부는 아니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4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표면에 드러난 소소한 외교 의례에는 현실에서 보다 중요한 뭔가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와 교황 사이의 관계에 근본적 타격을 주는 도전적인 태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프리드리히 1세는 항복했다. 그는 자신의 막사를 좀 더 남쪽으로 이동시키라고 명했고, 6월 11일 아침 그곳에서 이틀 전 제대로 거행하지 못했던 의전례를 다시 치렀다. 프리드리히 1세는 말을 타고 오는 교황을 맞이하여 그의 말에 굴레를 씌워 끌고 교황이 말에서 내릴 때는 등자를 꽉 잡아주었다. 하드리아노 4세가 다시 마련된 교황의 자리에 앉아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평화의 입맞춤을 한 뒤 대화가 시작되었다.

_291~292쪽, 11장 영국 출신 교황


교황 vs 교황, 누가 더 적법한가

 

서방의 그리스도교는 이제 역사상 유례 없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대립교황 같은 문제는 이전에도 있었기에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현재는 두 명의 경쟁자가 모두 같은 추기경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우르바노 6세의 선출 과정은 당연히 적법한 절차를 거친 것이었지만—그래서 아무도 그의 폐위 청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반면에 그를 퇴위시킨 방법은 유례 없는 것이었다.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해준 사람들에 의해서 폐위를 당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르바노 6세는 정신병적인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유럽 대륙은 양분되어 갔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그리고 중앙 유럽은 여전히 우르바노 6세에게 충성을 보인 반면, 스코틀랜드, 프랑스, 사보이, 부르고뉴 그리고 나폴리는 클레멘스 7세의 권위를 인정했고, 오랜 망설임 끝에 아라곤과 카스티야도 클레멘스 7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유배를 갔던 시절도 교회는 어떻게 잘 버텨냈지만, 두 명의 교황이 한 명은 아비뇽에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로마에 있는 그런 경우는 참으로 대처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두 명의 교황의 존재는 두 개의 추기경회와 두 개의 상법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하나의 관할구나 수도원에 두 명의 책임자가 임명되고 그에 따른 경비도 2배가 지출된다는 뜻이었다. 경비 측면에서 보자면, 아비뇽에 머물고 있던 클레멘스 7세가 유리했는데,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부서가 완전히 로마로 옮겨가진 않았기 때문이다. 클레멘스 7세는 그 자신과 이름이 같은 사치스러웠던 클레멘스 6세 교황과 경쟁이라도 하듯 교황궁을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꾸몄고, 그곳에서 자신의 경쟁자인 우르바노 6세에 맞서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그에 반해 우르바노 6세의 주변은 너무도 분주했다. 가까이 있는 그의 적은 대담하게도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나폴리의 조반나 여왕이었다. 물론 그녀는 곧 응분의 대가를 치렀다. 우르바노 6세는 1380년 그녀에게 파문을 내리고 그녀의 왕관을 그녀의 사촌인 두라초의 젊은 카를로Charles에게 넘겨주었다. 그다음 해 나폴리로 들어온 카를로는 조반나를 무로의 성에 가두고 곧이어 질식사시켰다.

_439~440쪽, 16장 하늘이시여, 기뻐하소서!


플로렌스를 피로 물든 파치가의 음모

교황은 어디까지 개입했는가?

 

그들 두 가문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음모가 꾸며졌고, 1478년 4월 26일 프란체스코 데 파치와 살비아티 대주교의 명을 받고 계략이 실행되었다. 플로렌스 대성당에서 장엄 미사가 집전되는 가운데, 사전에 계획되었던 그 순간—성체를 받들려는 순간—이 오자 프란체스코를 포함한 암살자들이 메디치가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를 습격하여 가슴과 등을 십여 차례—목격자들은 19회라고 말했다—이상 칼로 찔렀다. 다음 순간 암살단은 로렌초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단검을 꺼내들고 맞서다 성가대 쪽으로 뛰어들어 성구보관실로 달아났다. 그는 중상을 입었어도 생명을 잃지는 않았지만, 줄리아노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즉시 플로렌스 전체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음모에 가담했던 자들이 신속히 색출되었고, 그들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허용되지 않았다. 로렌초는 동쪽 성벽 외부의 처형장을 사용하는 대신 일벌백계로 삼도록 다른 처벌 방법을 택했다. 위대한 인문주의자 포조의 아들 야코포 브라치오리니를 시뇨리아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창에 매달고, 같은 운명을 맞이한 프란체스코 데 파치, 대주교와 그의 동생 야코포 살비아티도 로자 데이 란치[이탈리아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화랑]의 꼭대기 창문에 매달았다. 인문주의자이며 고전 학자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제자였던 안젤로 폴리치아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짐작건대, 죽어가고 있던 대주교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옆에 매달려 있던 프란체스코를 너무 잔인하게 깨물어버려서, 죽고 나서 한참 후에도 프란체스코의 가슴에는 앙다문 그의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식스토 4세는 정말로 파치가의 음모에 개입했던 것일까? 틀림없이 그는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었을 테고, 아마도 적극적으로 독려했을 것이다. 왜냐면 그는 누구보다 메디치 가문이 축출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사람이니 말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는 유혈사태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는데, 처음부터 암살을 모의했던 음모가 어떻게 피를 보지 않기를 바랐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식스토 4세는 늘 위협의 수단으로 써먹던 그 패를 꺼내들어 메디치가에 파문을 명하고 플로렌스 전체에 성무집행금지령을 내려, 이탈리아는 또 다시 전운에 휩싸였다. 파치가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만약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조금만 더 운이 없어서 자신이 동생처럼 파치가의 칼을 맞고 죽는 운명이었다면, 그래서 파치가의 음모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플로렌스 통치체제는 급변했을 것이고 그 누구보다 식스토 4세가 그런 변화를 반겼을 것이다.

_492~494쪽, 17장 르네상스


정부를 끼고 살았던 교황과 그런 교황을 등에 업고 무법자가 된 아들

 

눈엣가시였던 샤를 8세가 프랑스로 돌아가자 알렉산데르 6세는 가족의 지위 강화라는 자신의 주요 과업을 거리낌 없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벌써 간디아의 군주 지위를 얻어낸 그의 맏아들 조반니는 나폴리의 왕관을 쓰도록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497년 6월 조반니가 사라지면서 이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반니는 이틀 후 티베르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목에 깊은 자상을 입었는데 칼에 찔린 자국이 9군데도 넘었다. 그를 살해한 자는 누구였을까? 당시 조반니는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였으나, 난폭하며 불안정한 성격과 남편이 있는 여자들을 주로 농락하는 나쁜 버릇으로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바로 그의 동생 체사레였다. 풍문에 의하면, 동생 호프레의 부인 즉 그들에게는 제수씨가 되는 산시아인지 아니면 여동생 루크레치아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튼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체사레는 능히 형제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3년 후에는 여동생의 두 번째 남편이자 자신의 매제인 아라곤의 알폰소도 거의 죽일 뻔했으며, 평소에도 맏형인 조반니에 대한 질투심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알렉산데르 6세의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3일간 물도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범죄로 인해 공식적인 유죄 판결은커녕 기소를 당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교황이 다행스럽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체사레도 정말 떳떳했다면, 자신의 형을 죽인 자를 색출하기 위해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말이다.

_511쪽, 18장 괴수들


로마를 수도원으로 만든 금욕적인 교황

 

비오 5세Pius Ⅴ(1566~1572)—그가 ‘바오로’라는 교황명을 쓰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는 바오로 4세 교황과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었다. 그는 교황이 되고 나서도 짧은 머리를 고수했으며 교황의 제의 아래에 도미니코회 수사들의 복장을 걸쳤고 참회 행렬 때는 정기적으로 맨발로 걷는 등 상당히 금욕적이었고,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이런 금욕적인 삶을 기대했다. 일련의 모든 칙령들 가운데서도 신성모독을 근절할 방안을 모색하고—신성모독을 저지른 이들 가운데 부자들에게는 무거운 벌금을 매기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태형을 가했다—축일과 공심재를 제대로 준수하도록 했다. 고해성사를 하지 않거나 최근에 성체를 모시지 않은 신자들은 의사의 진찰도 받지 못하게 했다.

성性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매춘 자체를 완전히 폐지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교황은 칙령을 선포하여 모든 미혼의 창녀들은 채찍질을 당할 것이며 남색행위를 했다는 혐의가 드러나면 화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간통에 대하여 사형죄를 적용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독신 남성이 여성을 하인으로 고용하는 것도 금지됐고, 수녀들은 수캐도 키울 수 없었다. 바티칸의 수집품들 가운데 여성 조각품들은 빗장이 채워졌다. 시스티나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속의 인물들도 순결하게 보이도록 다시 덧칠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로마 시민들은 비오 5세가 도시 전체를 거대한 수도원으로 만들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_601~602쪽, 20장 반종교개혁


방종과 폭식으로 죽음에 이른 율리오 3세

 

늘 그렇듯, 음모와 모함이 오가고 난 후, 결국 프랑스와 이탈리아 측에서는—비록 황제의 반대가 있었지만—상대적으로 별 볼 일 없는 후보에게 동의를 했다. 그의 이름은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율리오 3세Julius III(1550~1555) 교황으로 알려짐—로 능력 있는 교회법 변호사였고, 25년 전 로마가 약탈을 당하던 때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공동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보다 그는 이노첸츠라는 이름의 17살짜리 소년에게 미혹되었던 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2년 전 파르마 길거리에서 그 소년을 데려왔다고 하는데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그 소년을 추기경의 자리에 앉혔다.

율리오 3세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전형적인 르네상스 스타일의 교황을 보게 된 것이다. 수치를 모르는 듯 방종하고 친족등용을 서슴지 않고, 그가 여는 연회—로마에서는 널리 회자되었다—는 주요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면 언제나 진탕 먹고 마시는 동성애 파티로 전락했다. 율리오 3세 교황은 교외의 빌라 줄리아—지금은 교외의 작은 마을이 아니라 국립 에트루리아 박물관이 자리한 도시로 성장했다—의 별장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였고,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상당히 심취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을 성가대와 자신의 부속 예배당의 악단 지휘자로 고용했다. 다소 놀라운 사실은 교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어—그는 예수회를 독려하고 트렌트 공의회가 관례대로 진행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메리 1세Mary Ⅰ가 왕위를 계승하여 영국을 다시 가톨릭의 품으로 돌려주었을 때 적잖이 기뻐했다. 그러나 그의 주요 관심사가 쾌락의 추구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러 가지 알려진 안 좋은 것들 중에서도 그의 폭식은 유명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지만, 그의 종말을 가져온 것이 바로 폭식이었다. 그는 소화기관이 갑자기 기능을 멈추면서 1555년 3월 23일 선종했는데, 음식을 못 넘겨 아사한 것이었다.

_595쪽, 20장 반종교개혁


“교황은 로마의 군주지만, 나는 로마의 황제다”

 

황제 즉위 1년 후, 나폴레옹은 6만 8천 명의 군대로 9만 명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805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프레스부르크(현재의 브라티슬라바)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오스트리아는 1797년의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획득한 베네치아를 프랑스에 반환해야 했고, 이스트리아와 달마티아 해안선을 따라 나폴레옹의 새로운 이태리 왕국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선전포고도 없이 교황령 항구인 안코나를 합병했고, 이에 교황은 격노하였다. 앙드레 마세나 원수 휘하의 4만 군대는 남부 이탈리아의 교황령으로 진격했다. 조제프 보나파르트도 황제의 개인 대리인 자격으로 함께했다. 교황이 예민하게 항의하자, 나폴레옹은 매섭게 대응했다. ‘교황 성하는 세속 세계의 일에 대해서는 나를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영적 세계에서 그러하듯 말입니다. 교황 성하는 로마의 군주이지만, 나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_715쪽, 24장 진보와 반동


존경과 추앙을 받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한 교황, 레오 13세

 

레오 13세는 전 세계적으로 존경과 추앙을 받았지만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그 어느 세속 군주도 그보다 더 만사에 격식을 차리지는 않았다. 레오 13세는 방문자 모두가 알현하는 내내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수행원들은 그의 곁에 있을 때 의무적으로 계속 서 있어야 했다. 2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마부에게 말 한마디 건넨 일이 없었다고도 한다. 그러니 레오 13세의 선종 후에 추기경들이 변화를 원했을 만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를 얻어냈다. 비오 10세Pius X(1903~1914)라는 교황명을 택한 주세페 사르토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3세기보다 이전의 식스토 5세 이후 최초) 베네토의 마을 우체부와 재봉사의 아들이었다. 본당 신부로 8년을 보낸 그는 이후 만토바의 주교로, 베네치아의 대주교로 지냈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본당 신부로 남아서 교황 임기 중에도 매주 일요일 오후에 직접 교리문답서를 가르쳤다. 위엄 있고 엄격하거나 무심하고 냉정한 전임자의 모습을 비오 10세에게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따뜻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쉬운 데다 이론보다도 현실을 특히 중시하는 교황이었다.

_777쪽, 26장 레오 13세와 제1차 세계대전


나치의 만행을 보고도 침묵한 비오 12세

 

이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도 유대인이나 나치는 물론이고 독일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가끔씩이지만’이라는 말을 교묘히 추가하는 바람에 대학살의 바탕에 있는 민족이라는 요소가 흐려졌다. 1942년 크리스마스까지만 해도 수백만 명이었던 희생자는 ‘수십만 명’으로 은근슬쩍 줄어들었다. 이 방송을 들은 무솔리니는 치아노에게 말했다. ‘차라리 프레다피오의 본당 신부가 하는 게 나았을 상투적인 말들뿐이로군.’ 그때까지 다른 중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이탈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로마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한 8천여 명은 줏대 없는 교황에게 너나없이 크게 분노했으나 무솔리니 총통이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은 대부분 무사했다. 무솔리니가 반유대주의 법을 여러 개 제정하기는 했지만 효력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943년 7월이 오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침공했고 로마에 폭탄을 투하했으며 무솔리니는 체포되었다. 거의 2년 후인 1945년 4월 29일 무솔리니와 클라레타 페타치는 즉결 처형되었고 교수형을 당한 그들의 시신은 차고 지붕에 매달린 채 남겨졌다. 9월 11일 로마는 독일의 손에 넘어갔고 알베르토 케셀링 장군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 18일 히틀러 친위대는 유대인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_815쪽, 27장 비오 11세와 비오 12세


끊이지 않는 논란 타살인가, 아닌가?

 

요한 바오로 1세는 살해된 것일까? 그렇게 믿을 이유들은 틀림없이 존재했다. 67살치고 그는 무척 건강했다. 검시나 부검은 없었다. 교황청은 분명히 어쩔 줄 몰라 했고 그가 어떻게 사망했고 시신을 어떻게 발견했는지에 관한 사소한 거짓말을 여러 차례 들켰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믿는 것처럼 만약 그가 바티칸 은행과 바티칸 은행장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가 깊이 연루되어 있는 대형 재정 스캔들을 폭로하려는 찰나였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을 국제 범죄자가 적어도 세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인 암브로시아노 은행의 로베르토 칼비는 이후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다리 아래에서 목이 매달린 채로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바티칸은 살인이 쉬운 곳이다. 자체 경찰이 없는 독립국이고 이탈리아 경찰은 요청을 받았을 때만 들어갈 수 있는데, 당시 그런 요청은 없었다.

_842, 28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도 암살자를 용서한 요한 바오로 2세

 

1981년 5월 13일 늦은 오후, 교황이 일반 알현 중에 교황 전용차를 타고 성 베드로 광장을 둘러 가고 있을 때 알리 아자라는 터키 암살자가 그의 정면에서 총을 세 발 발사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제멜리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아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나중에 심문 중인 치안판사에게 자신이 가톨릭교회는 물론 미국과 러시아 제국주의를 모두 혐오하는 ‘국가주의 무신론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자는 1979년 11월에 교황이 터키를 방문하던 시기에 암살을 계획했지만 목표물이 지나치게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아자의 자금줄—만약 있다면—로 불가리아 정부가 크게 의심을 받았지만 진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건강을 회복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암살 미수자를 용서한다고 발표했다. 1983년에 교황은 감옥에 있는 아자를 방문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우정 비슷한 감정이 싹텄다. 말년에 교황은 아자의 어머니와 형제의 알현을 받기도 했다.

_845, 28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후

 

◎ 이 책에 쏟아진 해외 언론의 찬사

 

“이야기들은 재미있고… 모순, 놀라움, 그리고 괴수 같은 인물들이 가득하고, 정략이 판치고… 이어지는 사건들은 가히 흥미롭다.” _스콧츠맨

 

“노리치는 몇 가지 세부적인 정보들을 이용해 인물 전체를 조명해 낼 수 있는 눈을 가진 작가이다.” _메일 온 선데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파고들지 않으면서도, 시종일관 손쉽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그의 필력이 참으로 놀랍다.” _인디펜던트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광대한 자신의 화폭 위에 폭넓은 붓으로 그리듯 개괄적인 접근방법을 써서 인물들마다 거침없이 묘사하면서도 차분함과 번뜩이는 기지, 놀라울 만치 상세한 뒷이야기들이 가득하다.” _파이낸셜타임스

 

“단연코 이 책은 지금껏 읽은 역사서 중에서 가장 기이하고 재미난 이야기로 가득하다.”

_데일리 익스프레스

 

◎ 역자 후기

 

작년 가을, 단풍이 깊게 물들어가던 즈음, 빨강 표지에 <The Popes>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 한 권을 만났다. 길이가 만만치 않아 쉽지 않은 작업이 될 줄을 예상하면서도 예의 새로운 책을 만나는 설렘에 가톨릭 신자인 내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리라는 기대가 더해져 즐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책의 두께가 말해주는 장시간의 작업에 대비해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고, 더불어 역사적 사실과 종교가 만나 민감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 스스로 조심스러운 마음을 갖고 접근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의례 작업 초반에는 책의 전반적인 배경이나 작가의 필치에 익숙해지기 위해 책장이 좀 더디게 넘어가는 편임을 감안하더라도, 이번에는 참으로 품이 많이 들어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부족한 시간을 벌기 위하여 매일 새벽, 잠을 떨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때로 내 삶은 어느 조각보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것인지 그분의 뜻이 궁금하기도 하였고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나는 또 무엇을 채우게 될까 하는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각 언어의 표기 방법이 달라 수도 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지명들과 인물들 그리고 일화들을 찾고 또 찾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사이, 나도 어느덧 로마의 라테란 궁을 거닐고 붉은 모자를 쓴 추기경들 사이에서 콘클라베와 공의회 그리고 황제의 대관식에도 참석하고 베드로 대성당의 미사도 함께 참례하는 듯한 착각을 느낄 만큼 책속에 빠져들면서 교황들의 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어촌의 일개 어부에서 교회의 반석이 되었던 베드로 사도로부터 시작된 교황이라는 자리가 지금껏 2천년의 시간을 넘어 면면히 이어져왔음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그것이 실로 가톨릭의 신비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과거의 교황들은 유럽이 중심무대였으므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오늘날의 교황만큼은 아니어도 많은 역량이 요구되는 자리였음은 분명하다. 2013년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을 포함하여 역대 266명의 교황 가운데 대(大)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은 교황은 레오 1세(440-461)와 그레고리오 1세(590-604), 단 두 명의 교황뿐이었지만 많은 교황들이 좋은 가문 출신으로 풍부한 학식과 능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더러는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자식도 여럿을 두어 교황의 자리에는 부끄러운 교황들도 있었고, 권력욕에 눈이 멀거나 재산 축적에만 혈안이 되었던 몰염치한 교황들, 지나치게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엄격한 교황들, 외교적 수완이 부족해 답답한 교황들,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편협한 교황들, 그리고 인품이 받쳐주질 못해 아쉬운 교황들도 있었고, 때론 너무 일찍 선종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교황들도 있었다. 오랜 교황의 역사에서 완벽에 가깝거나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교황들은 몇 있었어도 완벽한 교황은 단 한 명도 없었음을 느끼며 한 조각조각 맞추어 퍼즐이 완성 되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교황을 통해 변화와 퇴보, 발전과 성장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닐까 헤아려보기도 했다.

 

머리에 지식이 가득한 것이 때로 신앙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신부님도 계셨지만, 나는 우리가 믿는 종교의 근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어져 왔는지를 아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며 특히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회와 교황제도를 이해하는 데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나 자신의 인내심과 다투며 수개월간 이어진 번역작업의 치열한 기억은 이미 어제의 시간 속으로 저물었지만, 좋은 책을 만났던 행운에 감사하며 이 책이 나오기까지 힘을 더해주신 분들 특히나 여러 날 아낌없는 수고를 쏟아 부으셨던 편집팀의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끝으로 의구심이 일 때마다 되뇌곤 했던 한 말씀을 적으며 맺음을 하련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지은이 존 줄리어스 노리치

영국의 작가이자 역사가. 《비잔티움 연대기》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노리치는 호쾌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역사를 생동감 있게 서술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29년에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1952년에 영국 외무성에 들어가 베오그라드와 베이루트의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제네바 군축회담에 영국 대표단으로 참가했을 정도로 유능한 외교관이었지만, 1964년에 외교관으로서의 탄탄대로를 박차고 나와 문화 연구와 역사 저술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 뒤 왕립 빅토리아회, 왕립예술협회, 왕립 문학회, 왕립 지리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2018년 6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 《교황 연대기》는 25년 동안 구상하고 집필한 것으로, 81세 되던 해에 탈고된 노리치 말년의 최근작이기도 하다. 특히 노리치가 교황 비오 12세, 바오로 6세, 요한 23세 등과 맺은 개인적 인연들은 이 책의 서술을 더욱 생생하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교황직을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는 완전한 군주제”라고 정의하는 노리치는 베드로에서 지금의 교황인 프란치스코까지, 교황들의 삶과 행동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복원해 내고 있다.

노리치의 저술로는 《비잔티움 연대기》 외에 《지중해 5000년의 문명사》《베네치아의 역사》《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아토스 산》 등이 있다.

 

 

옮긴이 남길영

숙명여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반복되는 분주한 삶속에서 소박한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다 정신도 육체도 소진되어 버티기 어려울 즈음 세례를 받았다. 오늘 하루도 영혼의 완성에 반발자국이라도 다가가기를 기대하며 살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내 이름은 버터》 《디어 대드》 《캐릭터의 탄생》 《남자의 고전》 등이 있다.

 

옮긴이 임지연

숙명여대 사학과 졸업 후 케이블방송사 근무. 영상보다는 활자에 더 이끌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글밥아카데미 수료 후 바른번역에서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좋은 책을 소개, 번역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23~25장 번역)

 

옮긴이 유혜인

경희대학교 사회과학부를 졸업했다. 글밥아카데미 수료 후 바른번역에서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언제나 마음이 담긴 번역을 하고자 노력한다. 옮긴 책으로는 《유령 호텔》 《빅토리아 시대의 불행한 결혼 이야기》 등이 있다. (26~28장 번역)

 

 

목차

이탈리아 지도・교황 연대표

머리말 18

1장 성 베드로(1~100)

2장 도시의 수호자들(100~536)

3장 비질리오(537~555)

4장 대 그레고리오 1세(590~604)

5장 레오 3세와 샤를마뉴 대제(622~816)

6장 교황 조안(855?~857)

7장 니콜라오 1세와 창부정치(855~964)

8장 종파의 분립(964~1054)

9장 그레고리오 7세와 노르만족(1055~1085)

10장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토 2세(1086~1138)

11장 영국 출신 교황(1154~1159)

12장 알렉산데르 3세와 프리드리히 바바로사(1159~1198)

13장 인노첸시오 3세 교황(1198~1216)

14장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몰락(1216~1303)

15장 아비뇽(1309~1367, 1370~1376)

16장 하늘이시여, 기뻐하소서!(1378~1447)

17장 르네상스(1447~1492)

18장 괴수들(1492~1513)

19장 메디치가의 두 사람(1513~1534)

20장 반종교개혁(1534~1605)

21장 바로크 시대의 로마(1605~1700)

22장 이성의 시대(1700~1748)

23장 예수회와 혁명(1750~1799)

24장 진보와 반동(1799~1846)

25장 비오 9세(1846~1878)

26장 레오 13세와 제1차 세계대전(1878~1922)

27장 비오 11세와 비오 12세(1922~1958)

28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후(1958~현재)

한국어판 후기 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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