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70대 부부의 이별을 준비하는 방법
안타깝게도 얼마 전 91세의 생애를 마감한,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로 잘 알려진 작가 다나베 세이코. 이 책은 그녀의 나이 일흔넷 되던 해의 여름부터 그 이듬해 봄까지를 기록한 일기다. 96세의 노모를 모시며 휠체어 탄 남편을 간호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양의 집필과 강연으로 본업과 생계를 이어가던 중, 설상가상으로 평생의 친구였던 남편에게 말기 암 선고가 떨어진다.
이 책은 남편의 암 투병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 계절 동안의 일기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눈물과 고통의 기록이 결코 아니다. 누워 있는 남편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다가 “바보 같다”라는 면박을 듣고, 본인까지 페이스를 잃으면 안 된다는 의지로 약속된 집필과 강연, 지방 출장도 수시로 떠나는가 하면, 심신이 지쳐 쓰러질 것 같으면 아픈 남편을 뒤로하고 잠깐의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이렇듯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놀라운 자율성으로 간호와 생계라는 전쟁 같은 일상을 겪어내는 긍정을 보여준다.
긍정과 유머의 에너지로
남편과의 사별을 준비하는 일흔넷의 작가
이 책의 한국판 출간을 준비하던 중에 안타깝게도 작가의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피었다 져버리는 자연의 섭리는 이 노작가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결국 2019년 6월 담관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고인이 된 다나베 세이코의 이 책은, 공교롭게도 그녀 인생 최고의 친구였던 남편과의 사별을 앞두고 기록을 시작한 일기문이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문장이지만 이 책을 간단하고도 완벽히 설명할 수 있는 문구가 있다.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장례식 날 일기에 적힌 문구다. “이야, 사람은 장례식장에서도 재미있을 수 있나 봐.”
《남아 있는 날들의 일기》는 처연한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결코 애처롭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이 책은 우리에겐 영화로도 익숙한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원작자인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가 그녀의 나이 일흔넷 되던 해부터 약 9개월간 세 계절에 걸쳐 기록한 일기문이다. 이미 중증 장애를 가진 환자였던 남편에게 암 선고가 떨어진 그해 여름부터, 병원에서의 투병과 간호를 이어가던 가을과 겨울을 거쳐, 이듬해가 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기록이다.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삶은 늘 ‘전쟁 직전의 자세’로 사는 삶이었다. 96세의 노모를 모시는 데다 십수 년간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남편을 간호해야만 했다. 게다가 집안의 가장이니만큼 작가로서의 집필뿐만 아니라 각종 강연과 대담, 지방 출장에 이르기까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분투도 오로지 작가 혼자만의 몫이었다. 그런 와중에 남편과의 마지막 이별을 앞둔 투병 기간을 다룬 일기이니만큼 독자들은 당연히 눈물과 통한의 기록일 거라 예상할 수밖에 없다.
노모의 다리와 요통은 좀 괜찮으시려나. 집 봐줄 사람은 찾아두었다. 병원에 있는 파파는 어떨까. 재검사 결과가 양성이면 좋을 텐데. 이 세상 사람 누구나 고생을 하지만 나는 작전참모로서 삶의 전술을 이것저것 생각해야 한다.
‘고생도 할 만큼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고생이 그 말을 들으면 화를 내겠지?’
앞에서 말한 독백의 시다. 앞으로 더 큰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81쪽)
하지만 일기를 읽다 보면 아픈 남편에 대한 단상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강연장과 출판 업무로 만나는 여러 인물들, 세상 돌아가는 사건에 대한 단상, 과거의 재미난 기억 등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남편을 돌볼 때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다.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걸어보고 그때마다 남편으로부터 “바보”라는 면박을 당한다. 극한의 피로와 정신적인 혼란 속에서 한계를 느끼면 간병인에게 노모와 남편을 맡겨두고 이틀 사흘간의 짤막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남편의 투병 기간을 그린 일기에 이런 특이점이 있다는 것은 그녀의 슬픔이 깊지 않아서가 분명 아닐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현실감, 작가로서의 커리어와 의지를 놓지 않는 프로페셔널한 성실함,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책임감,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율성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어본 독자라면 작가의 문체에서 작가의 성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시선과 유머러스한 생각…… 세상을 걱정하지만 본인과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단순한 코믹적 문체가 아니라, 연륜과 경험 없이는 발현되지 않는 소소한 유머를 일기 곳곳에 배치하여 자기 자신이 결코 슬픔과 연민에 빠져 살고 있지 않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왜 ‘최고 수준의 간호문학’이란 찬사를 들었을까?
《박사가 사랑한 수식》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소설가 오가와 요코는 이 책에 대한 추천의 글에서 한마디로 단언하였다. “이 책은 최고 수준의 간호문학이다.”
간호문학이란 용어 자체가 낯설긴 하지만, 그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픈 가족을 극진히 돌보는 ‘또 다른 형태의 간호’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환자 옆을 지키며 수발을 드는 전통적 형태의 간호가 아니라, 집안의 경제활동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아픈 남편을 지키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능동적 유형의 간호이기 때문이다.
다나베 세이코는 96세의 노모를 돌보는 도우미와, 병원에서 투병 중인 남편을 간호하는 간병인 두 명을 고용하였다. 그래서 사랑하는 엄마와 남편이 부족하지 않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조처한다. 그녀는 밤낮으로 집필과 강연 등의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다. 일정을 마치고 남편의 병원에 들러 저녁을 떠먹이고 실없는 농담으로 남편을 웃겨주며 밤이 되어 집으로 향한다. 어느 날은 죽을 것 같은 피로함으로 소파에 파묻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홀로 술 한잔 기울이며 “나 잘하고 있어”라 스스로를 다독인다.
한 집안의 모든 안팎의 사정을 오직 홀로 지휘하는 작가 다나베 세이코 또한 70대의 노인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후배 작가 오가와 요코가 왜 “최고 수준의 간호문학”이라 칭하였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본인도 나약한 노인이지만, 더 보호받아야 할 두 환자(약자)에게 아낌없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돌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노모와 시한부 남편을 최상으로 돌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삶이 바로 이 모습이었던 것이다.
장시간 검도 수련을 하면 호구에 머리가 쓸려 상처가 남듯이, 사람도 오래 살다 보면 상처가 생기고, 상처가 생겨야 사고의 깊이가 깊어진다. ‘인생의 상처’라고 할까, 아니면 ‘인생의 굳은살’이라고 할까……. (179쪽)
인생은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는,
다나베 세이코만의 연륜과 세상을 보는 온기
다나베 세이코의 다수의 소설을 발표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에세이도 많이 출간했다. 소설가인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연애소설을 맛있게 쓰는 작가’로 얘기할 수 있는데, 반면 그녀의 에세이는 연륜 있는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종합선물 세트와 같다. 많이 살아본 나이 많은 인생선배가, 특히 여성의 입과 마음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글로 쏟아냈다고 할까.
특히 이 책은 그간의 에세이와는 다르게 일기문학이므로 그날그날의 일과와 단상 등이 적혀 있는데, 어느 날은 무심하게 풍경을 읊고, 어느 날은 세상사 돌아가는 문제에 침을 튀기며 비판하고, 어느 날은 아픈 남편에게 과거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음 짓게 한다. 남편 옆에서 소녀가 되었다가, 세태 비판에 여념 없는 할머니가 되었다가, 일터에 가서는 프로페셔널한 커리어우먼이 되어 대중 강연을 펼친다.
다양한 색깔의 일상을 매일매일 갈아입으며 살아가는 다나베 세이코의 문장들에는 슬픔 속에서도 위트가, 잔소리 속에서도 애정이, 웃음 속에서도 애잔함이 느껴지는 힘을 갖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날카롭고도 온기가 배어 있는 그녀의 사람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지만 오롯이 남아 있는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작가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인생의 수다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파파가 “당신, 가여워서 어쩌나”라고 말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나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일이지 않은가. 이제껏 잘 살아 왔어. 이 사람과 부부가 되길 잘했어, 라고 생각했다. (186쪽)
본디 우락부락한 인상이지만, 붙임성 있는 남자였다.
억지웃음이나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다. 이렇게 웃으려고 인간은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사는가보다 싶은 생각이 드는 웃음이다. 그런 그와 인생의 후반생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235쪽)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봤더니 파파는 힘들었는지 안색이 썩 좋지 않다. 하지만 재미있었냐고 묻는다. 어쩐지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다. 그런 그를 보니 이 시가 생각났다.
‘지금까지 잠자코 따라 왔지만, 하느님 이 정도면 됐습니다.’ (67쪽)
텔레비전 소리를 낮춘 병원은 조용했다. 넓은 창밖으로 절반쯤 진 저녁놀이 보였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침대 옆 작은 의자에 평온하게 앉아 그를 바라보는데 아이처럼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끊어서 작게 말했다.
“가여워라. 나는 영원히 당신 편입니다.” (141쪽)
하지만 나는 외로움 잘 타는 그가 혼자 어두운 동굴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가여워서 어쩌나.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자신을 ‘가엽다’고 여겨주는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복이라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가엽다’는 말이 인간의 감정 중 가장 거대하고 무겁고 귀중한 감정을 표현한 말이다. (184쪽)
내가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런 여자, 꽤 괜찮죠! 사랑스럽지 않나요?’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는 ‘이런 남자, 어때요?’라고 말을 걸고 싶기 때문이다. (34쪽)
이별에 정해진 방법은 없다. 공상의 대화를 나누며 그를 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 아닐까. 요즘 세상에 임종을 앞두었거나 목숨이 위급할 때, 남편이 아내에게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고 아내가 사랑을 담아 ‘당신과 살아서 즐거웠어요. 여보, 고마워요’라며 이별을 고하는 것은 싸구려 소설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일흔 살까지 살아온 내 인생 신조는 매일 ‘그날그날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나, 그에게 꽤 잘했다. 평소에 잘해줬으니 그가 죽더라도 울지 않을 것이다. (190쪽)
글쟁이는 대개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자부심과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옆에 있어줄 사람이라면 치켜세워주고 사탕발림으로 격려해주는 간신이 훨씬 낫다. (25쪽)
저자소개
지은이 : 다나베 세이코田辺聖子
1928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그곳을 근거지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58년 《꽃사냥》으로 데뷔했고, 1964년 《감상여행》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그 후 여자의 마음을 확 사로잡는 연애소설을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만들어 갔다. 소설 외에도 사회풍자적 에세이를 정력적으로 썼으며, 《겐지 모노가타리》를 현대어로 풀어내는 등 고전문학 번역에서 평전 집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야마다 에이미, 에쿠니 가오리, 오가와 요코, 와타야 리사 등 후배 작가들과 여성 독자들로부터 두터운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남녀의 습성에 대한 집요한 통찰력과 폭넓은 지성을 유머러스한 문체로 승화하는 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서른 넘어 함박눈》 《딸기를 으깨며》 《아주 사적인 시간》 《감상여행》 《침대의 목적》 《고독한 밤의 코코아》 등 여성의 심리와 생리를 일상의 언어로 섬세하고도 생생하게 그려 낸 소설이 주로 소개되었다. 에세이집으로 《여자는 허벅지》 《하기 힘든 아내》가 있다.
옮긴이 : 조찬희
책정보 및 내용요약
96세의 노모를 모시고, 남편을 간호하고,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분투해왔지만, 이 일기는 눈물과 고통의 기록이 아니다. 다나베 세이코는 긍정과 유머의 에너지로 남편과의 사별을 준비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율성을 우선시해온 그녀는 2019년 6월 별세했다.
목차
들어가며 010
여름 017
가을 083
겨울 163
아직 겨울, 그리고 봄 231
편집자 추천글
안타깝게도 얼마 전 91세의 생애를 마감한,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로 잘 알려진 작가 다나베 세이코. 이 책은 그녀의 나이 일흔넷 되던 해의 여름부터 그 이듬해 봄까지를 기록한 일기다. 96세의 노모를 모시며 휠체어 탄 남편을 간호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양의 집필과 강연으로 본업과 생계를 이어가던 중, 설상가상으로 평생의 친구였던 남편에게 말기 암 선고가 떨어진다.
이 책은 남편의 암 투병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 계절 동안의 일기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눈물과 고통의 기록이 결코 아니다. 누워 있는 남편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다가 “바보 같다”라는 면박을 듣고, 본인까지 페이스를 잃으면 안 된다는 의지로 약속된 집필과 강연, 지방 출장도 수시로 떠나는가 하면, 심신이 지쳐 쓰러질 것 같으면 아픈 남편을 뒤로하고 잠깐의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이렇듯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놀라운 자율성으로 간호와 생계라는 전쟁 같은 일상을 겪어내는 긍정을 보여준다.
긍정과 유머의 에너지로
남편과의 사별을 준비하는 일흔넷의 작가
이 책의 한국판 출간을 준비하던 중에 안타깝게도 작가의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피었다 져버리는 자연의 섭리는 이 노작가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결국 2019년 6월 담관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고인이 된 다나베 세이코의 이 책은, 공교롭게도 그녀 인생 최고의 친구였던 남편과의 사별을 앞두고 기록을 시작한 일기문이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문장이지만 이 책을 간단하고도 완벽히 설명할 수 있는 문구가 있다.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장례식 날 일기에 적힌 문구다. “이야, 사람은 장례식장에서도 재미있을 수 있나 봐.”
《남아 있는 날들의 일기》는 처연한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결코 애처롭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이 책은 우리에겐 영화로도 익숙한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원작자인 소설가 다나베 세이코가 그녀의 나이 일흔넷 되던 해부터 약 9개월간 세 계절에 걸쳐 기록한 일기문이다. 이미 중증 장애를 가진 환자였던 남편에게 암 선고가 떨어진 그해 여름부터, 병원에서의 투병과 간호를 이어가던 가을과 겨울을 거쳐, 이듬해가 되어 결국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기록이다.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삶은 늘 ‘전쟁 직전의 자세’로 사는 삶이었다. 96세의 노모를 모시는 데다 십수 년간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남편을 간호해야만 했다. 게다가 집안의 가장이니만큼 작가로서의 집필뿐만 아니라 각종 강연과 대담, 지방 출장에 이르기까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분투도 오로지 작가 혼자만의 몫이었다. 그런 와중에 남편과의 마지막 이별을 앞둔 투병 기간을 다룬 일기이니만큼 독자들은 당연히 눈물과 통한의 기록일 거라 예상할 수밖에 없다.
노모의 다리와 요통은 좀 괜찮으시려나. 집 봐줄 사람은 찾아두었다. 병원에 있는 파파는 어떨까. 재검사 결과가 양성이면 좋을 텐데. 이 세상 사람 누구나 고생을 하지만 나는 작전참모로서 삶의 전술을 이것저것 생각해야 한다.
‘고생도 할 만큼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고생이 그 말을 들으면 화를 내겠지?’
앞에서 말한 독백의 시다. 앞으로 더 큰 고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81쪽)
하지만 일기를 읽다 보면 아픈 남편에 대한 단상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강연장과 출판 업무로 만나는 여러 인물들, 세상 돌아가는 사건에 대한 단상, 과거의 재미난 기억 등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남편을 돌볼 때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다.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걸어보고 그때마다 남편으로부터 “바보”라는 면박을 당한다. 극한의 피로와 정신적인 혼란 속에서 한계를 느끼면 간병인에게 노모와 남편을 맡겨두고 이틀 사흘간의 짤막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남편의 투병 기간을 그린 일기에 이런 특이점이 있다는 것은 그녀의 슬픔이 깊지 않아서가 분명 아닐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현실감, 작가로서의 커리어와 의지를 놓지 않는 프로페셔널한 성실함,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책임감,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율성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어본 독자라면 작가의 문체에서 작가의 성향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시선과 유머러스한 생각…… 세상을 걱정하지만 본인과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단순한 코믹적 문체가 아니라, 연륜과 경험 없이는 발현되지 않는 소소한 유머를 일기 곳곳에 배치하여 자기 자신이 결코 슬픔과 연민에 빠져 살고 있지 않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왜 ‘최고 수준의 간호문학’이란 찬사를 들었을까?
《박사가 사랑한 수식》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소설가 오가와 요코는 이 책에 대한 추천의 글에서 한마디로 단언하였다. “이 책은 최고 수준의 간호문학이다.”
간호문학이란 용어 자체가 낯설긴 하지만, 그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픈 가족을 극진히 돌보는 ‘또 다른 형태의 간호’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환자 옆을 지키며 수발을 드는 전통적 형태의 간호가 아니라, 집안의 경제활동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아픈 남편을 지키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능동적 유형의 간호이기 때문이다.
다나베 세이코는 96세의 노모를 돌보는 도우미와, 병원에서 투병 중인 남편을 간호하는 간병인 두 명을 고용하였다. 그래서 사랑하는 엄마와 남편이 부족하지 않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조처한다. 그녀는 밤낮으로 집필과 강연 등의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다. 일정을 마치고 남편의 병원에 들러 저녁을 떠먹이고 실없는 농담으로 남편을 웃겨주며 밤이 되어 집으로 향한다. 어느 날은 죽을 것 같은 피로함으로 소파에 파묻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홀로 술 한잔 기울이며 “나 잘하고 있어”라 스스로를 다독인다.
한 집안의 모든 안팎의 사정을 오직 홀로 지휘하는 작가 다나베 세이코 또한 70대의 노인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후배 작가 오가와 요코가 왜 “최고 수준의 간호문학”이라 칭하였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본인도 나약한 노인이지만, 더 보호받아야 할 두 환자(약자)에게 아낌없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돌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노모와 시한부 남편을 최상으로 돌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삶이 바로 이 모습이었던 것이다.
장시간 검도 수련을 하면 호구에 머리가 쓸려 상처가 남듯이, 사람도 오래 살다 보면 상처가 생기고, 상처가 생겨야 사고의 깊이가 깊어진다. ‘인생의 상처’라고 할까, 아니면 ‘인생의 굳은살’이라고 할까……. (179쪽)
인생은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는,
다나베 세이코만의 연륜과 세상을 보는 온기
다나베 세이코의 다수의 소설을 발표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에세이도 많이 출간했다. 소설가인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연애소설을 맛있게 쓰는 작가’로 얘기할 수 있는데, 반면 그녀의 에세이는 연륜 있는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종합선물 세트와 같다. 많이 살아본 나이 많은 인생선배가, 특히 여성의 입과 마음으로 세상을 관찰하여 글로 쏟아냈다고 할까.
특히 이 책은 그간의 에세이와는 다르게 일기문학이므로 그날그날의 일과와 단상 등이 적혀 있는데, 어느 날은 무심하게 풍경을 읊고, 어느 날은 세상사 돌아가는 문제에 침을 튀기며 비판하고, 어느 날은 아픈 남편에게 과거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음 짓게 한다. 남편 옆에서 소녀가 되었다가, 세태 비판에 여념 없는 할머니가 되었다가, 일터에 가서는 프로페셔널한 커리어우먼이 되어 대중 강연을 펼친다.
다양한 색깔의 일상을 매일매일 갈아입으며 살아가는 다나베 세이코의 문장들에는 슬픔 속에서도 위트가, 잔소리 속에서도 애정이, 웃음 속에서도 애잔함이 느껴지는 힘을 갖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날카롭고도 온기가 배어 있는 그녀의 사람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지만 오롯이 남아 있는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작가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인생의 수다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파파가 “당신, 가여워서 어쩌나”라고 말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나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일이지 않은가. 이제껏 잘 살아 왔어. 이 사람과 부부가 되길 잘했어, 라고 생각했다. (186쪽)
본디 우락부락한 인상이지만, 붙임성 있는 남자였다.
억지웃음이나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다. 이렇게 웃으려고 인간은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사는가보다 싶은 생각이 드는 웃음이다. 그런 그와 인생의 후반생을 보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235쪽)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봤더니 파파는 힘들었는지 안색이 썩 좋지 않다. 하지만 재미있었냐고 묻는다. 어쩐지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다. 그런 그를 보니 이 시가 생각났다.
‘지금까지 잠자코 따라 왔지만, 하느님 이 정도면 됐습니다.’ (67쪽)
텔레비전 소리를 낮춘 병원은 조용했다. 넓은 창밖으로 절반쯤 진 저녁놀이 보였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침대 옆 작은 의자에 평온하게 앉아 그를 바라보는데 아이처럼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마디 한마디 끊어서 작게 말했다.
“가여워라. 나는 영원히 당신 편입니다.” (141쪽)
하지만 나는 외로움 잘 타는 그가 혼자 어두운 동굴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가여워서 어쩌나.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자신을 ‘가엽다’고 여겨주는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복이라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가엽다’는 말이 인간의 감정 중 가장 거대하고 무겁고 귀중한 감정을 표현한 말이다. (184쪽)
내가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런 여자, 꽤 괜찮죠! 사랑스럽지 않나요?’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는 ‘이런 남자, 어때요?’라고 말을 걸고 싶기 때문이다. (34쪽)
이별에 정해진 방법은 없다. 공상의 대화를 나누며 그를 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 아닐까. 요즘 세상에 임종을 앞두었거나 목숨이 위급할 때, 남편이 아내에게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고 아내가 사랑을 담아 ‘당신과 살아서 즐거웠어요. 여보, 고마워요’라며 이별을 고하는 것은 싸구려 소설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일흔 살까지 살아온 내 인생 신조는 매일 ‘그날그날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나, 그에게 꽤 잘했다. 평소에 잘해줬으니 그가 죽더라도 울지 않을 것이다. (190쪽)
글쟁이는 대개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자부심과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옆에 있어줄 사람이라면 치켜세워주고 사탕발림으로 격려해주는 간신이 훨씬 낫다.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