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재일 여성들의 삶과 증언
할머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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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타 후미코 지음│안해룡·김해경 옮김│344쪽│16,800원│152*217mm│2024년 9월 30일
ISBN 979-11-6689-287-5 03900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여기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파친코〉의 ‘선자’들이 있다!”
고생도 가난도 자랑으로 여기며
씩씩하게 극복해온 재일 조선 여성들의 삶과 증언
“그 솥을 주워서 살았어요. 아하하하. 밥솥을 주워 살아갈 사람은 살라고 하는 거니까.” 열일곱에 결혼을 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박정숙(가명. 1919년생 경상남도 출신) 할머니의 말이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남편 때문에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막걸리를 만들어 팔고, 농가에서 채소를 얻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솥을 얻어 잘 됐다며 기뻐했다.
“시골은 파친코에서 일하지 않으면 노가다밖에 할 일이 없어요. 점원 같은 일에 한국인을 써주지 않으니까.” 간토대지진 이후 학살에서 살아남고, 전쟁도 끝나고, 해방도 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 억척스럽게 낯선 땅에 터를 잡고 살아간 할머니들의 목소리에는 억울함도 분함도 한(恨)도 있지만, 무엇보다 힘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향한 의지’였다.
이러한 재일 1세대 여성 조선인의 삶을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 저자 가와타 후미코가 취재와 기록을 통해 약 40년 전부터 세상에 알렸지만,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다. 이 책 《할머니의 노래》를 참고한 드라마 〈파친코〉가 다시 한번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생생한 기록과 몸으로 체득한 이야기는 생명력이 길었다. 중요한 것은 고생도 가난도 삶으로 끌어안아 살아간 그네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노동자로, 여성 가장으로, 재일 조선인으로…
바다 건너 낯설고 척박한 땅에서
그녀들이 일궈온 삶과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 책은 식민지 전쟁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역경을 지고 살아온 재일 1세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삶을 선명하게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파란만장이라는 단어조차 가벼이 느껴질 만큼 혹독한 세월을 지나온 이들이 여기에 있다.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땅,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노동자로, 가장으로, 어머니로, 여성으로, 식민지의 설움과 전쟁의 참혹성을 겹겹으로 견뎌냈다.
일제 식민지 전쟁을 몸소 체험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이자 살아 있는 역사이다. 그러나 이제 전쟁을 겪은 세대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어려울 만큼 세월이 지났다. 피해 당사자로서 직접 용기 있게 나선 ‘위안부’ 할머니들도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기억해야 할 역사들도 말없이 사라지고 있다.
설사 이들이 살아 있어도 우리는 전쟁과 식민지 시대의 참상을, 사람의 입이 아니라 권력이 쓴 문자를 통해서 한 줄의 사건으로 접한다. 실상을 알리는 목소리가 외면당한 자리에 엉뚱한 발언들이 나서서 뒤덮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눈감아왔던 ‘남성들이 말하지 않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특히 ‘일본인이야말로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자고 되뇐다.
이 책의 인터뷰이는 모두 29명. 그중 최고령자인 서맹순(1918년생) 할머니는 어린 노동자로 새벽 5시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안순자(1940년생), 박정란(가명, 1934년생) 할머니는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를 당했고, 박남주(1932년생), 김남출(1929년생), 하해수(1924년생)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었다. 전쟁 통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송신도(1922년생)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잇달아 다섯이나 아이를 뱄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다 싶어 기차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 박수련(1925년생) 할머니는 재일 코리언에게 특히 발병 비율이 높았던 한센병에 걸려 고생했다. 박정숙(가명. 1919년생) 할머니는 시집간 첫날부터 매를 맞았고, 남편이 유곽에서 만든 아이까지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았다. 세 살 때 일본에 간 김분란(1927년생) 할머니는 혼자 아이를 낳고 직접 실로 양쪽을 묶어 탯줄을 잘랐다. 모두 극도의 빈곤을 겪었으며 민족 차별과 가부장제와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대개 성인이 되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어린 노동자로 극히 낮은 임금을 받고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할머니들의 수는 적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꽤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唄)―재일 여성의 전중·전후’라는 제목으로 2012년부터 1년 여간 총 12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들을 직접 찾아가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려 애쓴 저자는 한국인도 재일 코리언도 아닌, 일본 여성 가와타 후미코이다.
1987년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
배봉기 할머니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기록
가와타 후미코는 보육과 주택 문제, 농어촌 여성과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의 인생을 기록하고 취재하는 일본의 언론인으로서, 특히 빈곤과 성노예제 문제에 천착해왔다.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배봉기 할머니를 10년 넘게 만나 소통하며 그 이야기들을 꼼꼼히 기록하기도 했다. (그 기록의 결과물은 1987년 《빨간 기와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며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일찌감치 노인들의 인생담을 경청하면서 깨달음을 경험했다는 저자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야말로 오히려 죽지 않은 생생한 언어를 쓴다고 말한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려 애쓴 흔적은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또 다른 미덕은 저자의 이런 태도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한 사람의 이야기마다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담을 수 있을 만큼 이 책에 실린 29인의 할머니들은 아주 솔직하고 상세히 인생담을 털어놓고 있는데, 이것은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감응하지 않으면 쉽게 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들을 만큼 같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연대감과 우정이 인터뷰에 응한 할머니들의 마음을 여는 온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조선어 표현을 포함해 재일 할머니들이 쓰는 입말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려 했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시점을 되짚어 정확한 사건 자료들을 찾아냄으로써 개인사의 기억이라는 씨줄과 역사상 사건이라는 날줄을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어낸다. 그렇게 생생함과 객관성을 동시에 담보한다.
제일 1세대는 식민지 지배로 인한 나라 없는 설움과 전쟁으로 인한 참혹상을 동시에 겪은 세대다. 말도 통하지 않은 곳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여성 노동자로 살았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으면, 오죽하면 고생도 가난도 자랑을 한다고 할까. 언뜻 들으면 처연하기만 한 이 표현을 다시 되새겨보면, 그 무엇도 날 어쩌지 못한다는 삶의 의지와 강인함이 배어 있다.
저자는 이 표현에 대해 말 그대로 자랑스럽다는 뜻인지, 지나온 척박한 현실을 하소연해봐야 소용없음을 자조하는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딘지 그 고생과 가난을 훌훌 털어버리는 듯한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속이 시원하다고 말한다. 잘 견뎌왔다며 스스로도 놀랄 정도인 극한 상황을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재일 할머니들은 꿋꿋하게 삶을 이어왔으니, ‘고생 자랑’ ‘가난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알 것 같다고 말이다.
동시에 저자는 이 표현을 일본의 정치와 뒤틀린 일본 사회를 일본인보다 혹독하게 감내하면서 살아온 재일 할머니들의 자랑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런 할머니들에게서 씩씩함과 당당함을 읽을 수 있다.
재일 여성의 개인사를 통해 드러나는
전쟁과 질병, 그리고 삶에 대한 진실
일본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살면서 온갖 차별을 받은 재일 코리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일본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 그리고 노동 시간을 규제하는 법은 있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공장법이 그렇고, 임시노동이나 중노동의 기회만 얻을 수 있었던 조선인은 그나마도 동일 노동을 하고도 일본인보다 60~70퍼센트 정도의 임금을 받았다.
조선옷을 입으면 경찰들이 “기모노 입어!”라면서 먹물을 넣은 물총을 쏘아댔고, 학교에 가도 조선어를 쓸 수 없었다. 조선어를 말한 학생에게는 자기가 지니고 있던 표를 건네주었다.
“마지막에 ‘아무개가 가장 많았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말을 안 하게 되는 거야. 일본어로 말하라고 해도 모르지, 다들 긴장이 되니까 아예 서로 이야기를 안 해요. 그래도 선생님에게 불만을 얘기할 수는 없었어.” ― 115쪽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이 여성에게 범했던 중대한 인권유린인데도 반세기 가까이 방치되어 있었다. 피해 당사자에게 침묵이 강요되었다. 송신도 할머니의 옆구리에는 칼자국이 10센티 크기로 나 있고, 허벅지 안쪽에는 총검에 찔린 상처와 총탄이 스친 흉터가 있다. 오른쪽 귀는 난청이다.
“군인이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겠다면서 말이야. 조선말을 쓰면 귀싸대기를 때려. 엄청났어. 저 솥뚜껑 같은 손으로 후려쳤지. 귀 고막이 터져버렸어.” ―239쪽에서
재난은 사람을 골라 오지 않는다. 히로시마 원폭이 터졌을 때 일본인도 조선인도 똑같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재난 피해를 똑같이 겪었어도 그 이후의 양상은 다르다. 당시 재일 코리언은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고 치료를 받지 못했다. 피폭 이후 ABCC(원폭피해조사위원회)에서 혈액 검사, 심전도 같은 검사를 몇 가지 받기는 했지만, 결과는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연구 조사의 대상만 되었을 뿐 치료는 방치되다시피 한 것이다.
재일 코리언들은 또한 감염과 발병이 위생과 영향 상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한센병 발병률이 높다. 이는 건강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비율이 낮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할머니 한 명 한 명의 노래
잘 쓰인 역사보다 더 깊은 울림
어릴 적 뜻도 모르고 외워야 했던 〈황국신민의 서사〉를 수십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기억하는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히로시마 피폭을 묘사하는 부분을 보면, 할머니들의 기억력은 신기하리만큼 비상하다. 60년도 더 된 오래된 일들의 순간순간을 그렇게 자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살아남아야 했던 처절함이 그만큼 또렷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마음으로 몸으로 새긴 하나하나의 기억은 동아시아 역사가 영원히 껴안고 짊어져야 할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피폭 직후 아무런 증상도 없었던 사람이 가을이 되자 원인도 모르게 잇달아 죽어갔다. 돌연 잇몸에서 피가 나오거나, 코피를 쏟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남주 씨는 설사가 끊이지 않았다. 의식불명에 빠지기도 했다. 가족은 포기했다. 하지만 와카야마의 친척들이 문병을 오면서 가지고 온 말린 양귀비 잎을 달여 마시자 설사는 멈췄다. 양귀비가 한동안 후쿠시마초 이곳저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 후 양귀비를 따러 갔다가 두세 그루를 뽑고 더 이상 심지 않았다. ―111쪽에서
역사란 생활을 부여잡고 살아내는 이들의 흔적이다. 어린 나이부터 노동 착취와 차별 속을 헤쳐 간, 척박한 삶에 내던져졌던 재일 할머니들이 살아온 생생한 역사 현장을 재일 1세 할머니들의 기억과 함께 만날 수 있다. 그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고 대면해야만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들은 “지금도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전쟁만 없으면 된다”라고 말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시집간 첫날부터 폭행을 당하고, 남편은 도박과 여자에 빠져 혼자 탯줄을 끊어가며 아이를 낳고, 돈 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출산 직후부터 일거리를 찾아나서며 장사를 하고, 이산의 아픔을 겪고, 그것도 모자라 재해를 당하고…. 재일 할머니들이 겪어온 세월은 그야말로 다중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하지만 아픈 인생살이를 토로하는 중에도 할머니들이 드러내는 표현과 생각에는 유연성과 서정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무겁고 우울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때론 익살스럽게 다가오고, 때론 강인한 기운이 전해지기도 한다. 재일 1세 할머니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노래해 본다. “아, 힘내고, 아, 힘내고, 힘내!”
지은이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배봉기 할머니의 삶을 취재한 《빨간 기와집》을 1987년 출간하며, ‘재일 여성들’의 삶과 강인한 태도, 그리고 진실을 세상에 알린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1943년 일본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 가와타 후미코는 1966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중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바로 어제의 여자들》(1979) 《여자들의 자장가》(1982) 등 여성들의 삶을 기록하고, 1977년 배봉기 할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위안부와 관련한 책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1993) 《전쟁과 성》(1995) 《인도네시아의 위안부》(1997)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2005) 등 모두 후미코가 직접 현장을 찾고 증언자들과 인연을 맺어 기록한 책이다.
후미코는 위안부 피해 사실 증언자를 취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전후 보상 실현 시민 기금’과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 센터’ 공동대표,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지하는 모임’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며, 2023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는 일에 앞장섰다.
옮긴이 안해룡
사진가이며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전시기획자 등 텍스트와 사진, 영상을 넘나들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 1995년부터 한국, 중국, 일본 등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사진과 영상에 담는 기록 작업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다이빙벨〉을 감독했다. 현재는 조선인 노동자가 종사한 일본의 근대 토목 유산 찾아서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 1》, 《북녘 일상의 풍경들》, 역서로는 《가부키초》, 《공습》, 《미디어 리터러시》 등이 있다.
옮긴이 김해경
서울에서 태어나 1999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프리저널리스트 집단 아시아프레스에 소속된 저널리스트로, 다큐멘터리 〈조국을 바라보며-러시아 연해주 고려인 소녀의 여름〉 등을 발표했으며 〈한국 저널리스트가 본 북한〉, 〈동북아시아 교류를 어떻게 넓힐까〉로 일본 방송에 출연해 한반도 문제를 주제로 발표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시사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의 ‘반도를 읽는다’ 코너에 한반도 관련 기사를 기고했다. 역서로는 《공습》, 《첫 제과 레시피》 등이 있다.
책 속으로
13쪽
나는야 에헤- 진 재판 괜찮아 좋아 그렇지만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으니
여기 모인 분들 잘 들어요 두 번 다시 전쟁은 하지 말아주세요
도시코(송 씨의 일본 이름)는 지금도, 100년 살아도, 내일 죽어도
할 때는 한다. 돈이 없어도, 입을 것이 없어도, 장식품이 없어도
해내겠어. 이 정치가 거지들. 아, 힘내고, 아, 힘내고, 힘내
― 서문에서(송신도 할머니가 부른 노래)
24쪽
급여는 나오지 않았고, 간단한 옷만 제공되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빈곤 가정의 식구를 덜어주는 셈이라서 어린아이의 노동 대가는 침식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름 간편복 말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맹순 씨는 집에서 나올 때 입고 있었던 조선옷이 헤지면 몇 번이나 기우고 기우면서 입고 다녔다.
―서맹순 할머니
68쪽
부근에 큰 파친코 가게가 개업해 파친코 일을 그만두었다. 반년 뒤 도례 씨는 야키니쿠야(焼肉屋)를 시작했다. 남편은 “그런 장사를 하려면 죽어버려”라며 반대했다. 야키니쿠야는 ‘여자를 죽인다’고들 했다. 철판 세척, 김치 담기, 양념 만들기 등 중노동이었기 때문이다.
―김도례 할머니
82쪽
“이제, 불이 타기 시작하면서 하늘이 새빨갛고. 소이탄이라 빨라요. 비행기가 낮은 곳을 날면서 사람이 걷고 있는 곳에 우수수, 삐삐삐삐삐. 위에서 오니까 다 타버려. 뜨거워서 있을 수 없어요. 방공 두건이 타면서 머리카락이 타니까 다들 벗어던져. 옷을 하나 벗고, 두 개 벗고, 다 벗어버려.”
― 박봉례 할머니
110~112쪽
“최악이 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어떻게든 살려는 생각이 들지. 사람도 죽기를 원치 않아요. 원폭으로 죽은 사람은 너무 비참했으니까.” (…) 쌀 암거래, 막걸리 제조, 불난 곳에서 철재 수집, 돼지 사육 등 대다수 재일 여성들이 경험한 일을 남주 씨도 해야 했다. 가장 오래 한 일이 양돈업이었다. 보통면허를 취득해 2톤 차를 몰았다. “어, 여자가 트럭 운전을 다 하네”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자가 운전하는 일은 드문 시절이었다. 남편과 함께 500마리의 돼지를 사육했다.
― 박남주 할머니
160쪽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은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여선 씨는 ‘해방’을 실감하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은 ‘아아, 전쟁이 끝나서 다행이다’라는 심정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은 정말 좌불안석이었어요. 술렁술렁, 술렁술렁. 안절부절을 못 했어요.”
― 양여선 할머니
203~204쪽
일본 전국 13곳에 있는 국립 한센병 요양소의 입소자는 2011년 2276명. 이 가운데 재일 코리언은 102명으로 전체 입소자의 4.48%에 해당한다. 일본 총 인구에서 차지하는 한국·조선 국적의 외국인 등록자 0.43%의 10배에 달하는 비율이다. 한센병의 감염이나 발병에는 영양과 위생 상태가 영향을 준다. 극도의 빈곤은 영양이나 위생 상태 악화의 요인이 된다.
275쪽
“뉴스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말이 아파요. 과거 일본이 조선인을 괴롭힌 적 있잖아요?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나 죽은 조선인이 아주 많지요? 납치 문제도 핵 문제도 있지만 서로 양보하고 대화하면서 평화조약을 맺으면 아시아도 일본도 미국도 평화스러워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좋으련만.”
― 배창희 할머니
목차
서문│알아야 할 역사에 내딛는 첫걸음 9
1 빨리 태어나서 손해를 봤어 17
길쌈을 배우려던 무렵 일본 공장으로•말도 모르면서 아이를 돌보고, 용케 해냈어•공장의 어린 노동자, 가혹한 환경•‘가난해서’와 ‘여자라서’•배우고 싶다, 그때도 지금도
2 둥둥 떠가는 솥, ‘주워서 살았어’ 41
열일곱에 결혼해서 시동생들을 키웠어•가족 넷이 세상을 떠나다•장사는 말이지, 맛있으면 먹으러 오는 거야•자식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들•“두 손 든 거잖아”•막걸리를 만들면 경찰이 잡아갔어•술 마시던 시어머니, 마시지 않던 남편
3 대충 묻었어, 죽으면 죽은 채로 71
한 번이라도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고 잠들어보고 싶었어•대충 묻었어, 죽으면 죽은 채로•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흰 저고리에 행선지를 먹물로 써서•‘헌병 같은 일’을 하던 집에 얹혀살다•셋이 손잡고 도망가는데 왠지 한쪽 손이 무거워•알몸으로 어깨를 껴안고 몸을 따뜻하게•강에서 건진 검은 익사체가 둑 여기저기에
4 히로시마 거리가 통째로 사라졌어 101
“엄마, 피 나와” “너도”•피폭과 동시에 맞은 아버지의 ‘해방’•원폭 후유증이 어떤 건지는 몰라•의사도 모른다니 말이 돼?•60년도 더 지나 나타난 원폭 피해
5 겪을 대로 겪었지, 고생은 나의 힘 131
교실의 ‘오줌싸개 할멈’•남편은 도박에 찌들고, 혼자서 출산을•궁지에 빠진 남편의 거짓말•날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70인분의 밥을 짓다•중고 삼륜차로 폐품을 모으며
6 밀항선을 탔다가 인생길이 틀어졌다 157
술렁술렁 안절부절, 재봉틀을 싣고 제주도로•내 몸으로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도항 증명서와 전후 법적 위치•학교 다니고 싶어서 일 본으로•죽으면 갈 테니 지금은 괜찮아
7 아저씨, 빨간 종이로 된 약 주세요 181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현미를 찧다가 친구가 부른 노래•빨간 종이로 된 약 주세요•그렇게 정직했던 남편이 거짓말을•한센병 비율이 높은 재일 코리언
8 여기는 40번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출발점은 여기야 205
탯줄도, 추억의 사진도 없다•40번지 소사•함께 싸워 쟁취한 집•무서워서 혼자 여기서 살겠냐?•인생에서 가장 공부가 되었다•사람과 사람, 40번지 시대의 커뮤니티
9 전쟁도 쓰나미도 삶을 빼앗지는 못해 229
우리 마리코는 흙까지 먹었다니까•‘위안부 110번’에 전해진 정보•칼을 차고 위안소로 온 군인•몸속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겨울이 싫어•재판에 져도 나는 녹슬지 않아
10 피붙이가 헤어지면 안 돼, 절대로! 253
이렇게 길어질지는 생각도 못 했어요•새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일본으로•아궁이 앞에서 눈물만 찔찔•결국은 유랑민, 뿌리 없는 풀•의사가 되었지만 병사한 장남•뉴스를 들을 때마다 가슴 아파
11 우리 학교는 정말 창유리가 없었어 277
교실에서 쫓겨난 아이들•사진 속 또 한 명의 소녀•겨울이면 뭔가를 뒤집어쓰고•조선 이름을 불러줘요•홍일점으로 시작된 교사 생활
12 후쿠시마, 원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305
원전 사고 후 우울해진 손자•아버지는 조선인, 어머니는 일본인•지진 당시 나미에마치에 한국・조선인은 12명•대피소가 된 조선 학교에서 아들이 있는 곳으로•점점 가난해져, 푸하하•한국 할머니에게 집 빌려주는 사람은 없어요
맺는말 | 식은땀을 흘려가며 들은 이야기들 329
옮긴이의 글 | 일본 여성이 직접 마주한 재일 여성의 삶과 기록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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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재일 여성들의 삶과 증언
할머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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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타 후미코 지음│안해룡·김해경 옮김│344쪽│16,800원│152*217mm│2024년 9월 30일
ISBN 979-11-6689-287-5 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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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파친코〉의 ‘선자’들이 있다!”
고생도 가난도 자랑으로 여기며
씩씩하게 극복해온 재일 조선 여성들의 삶과 증언
“그 솥을 주워서 살았어요. 아하하하. 밥솥을 주워 살아갈 사람은 살라고 하는 거니까.” 열일곱에 결혼을 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박정숙(가명. 1919년생 경상남도 출신) 할머니의 말이다. 가족을 돌보지 않는 남편 때문에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막걸리를 만들어 팔고, 농가에서 채소를 얻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솥을 얻어 잘 됐다며 기뻐했다.
“시골은 파친코에서 일하지 않으면 노가다밖에 할 일이 없어요. 점원 같은 일에 한국인을 써주지 않으니까.” 간토대지진 이후 학살에서 살아남고, 전쟁도 끝나고, 해방도 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 억척스럽게 낯선 땅에 터를 잡고 살아간 할머니들의 목소리에는 억울함도 분함도 한(恨)도 있지만, 무엇보다 힘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향한 의지’였다.
이러한 재일 1세대 여성 조선인의 삶을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 저자 가와타 후미코가 취재와 기록을 통해 약 40년 전부터 세상에 알렸지만,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다. 이 책 《할머니의 노래》를 참고한 드라마 〈파친코〉가 다시 한번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생생한 기록과 몸으로 체득한 이야기는 생명력이 길었다. 중요한 것은 고생도 가난도 삶으로 끌어안아 살아간 그네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노동자로, 여성 가장으로, 재일 조선인으로…
바다 건너 낯설고 척박한 땅에서
그녀들이 일궈온 삶과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 책은 식민지 전쟁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역경을 지고 살아온 재일 1세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삶을 선명하게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파란만장이라는 단어조차 가벼이 느껴질 만큼 혹독한 세월을 지나온 이들이 여기에 있다.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땅,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노동자로, 가장으로, 어머니로, 여성으로, 식민지의 설움과 전쟁의 참혹성을 겹겹으로 견뎌냈다.
일제 식민지 전쟁을 몸소 체험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이자 살아 있는 역사이다. 그러나 이제 전쟁을 겪은 세대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어려울 만큼 세월이 지났다. 피해 당사자로서 직접 용기 있게 나선 ‘위안부’ 할머니들도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기억해야 할 역사들도 말없이 사라지고 있다.
설사 이들이 살아 있어도 우리는 전쟁과 식민지 시대의 참상을, 사람의 입이 아니라 권력이 쓴 문자를 통해서 한 줄의 사건으로 접한다. 실상을 알리는 목소리가 외면당한 자리에 엉뚱한 발언들이 나서서 뒤덮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눈감아왔던 ‘남성들이 말하지 않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특히 ‘일본인이야말로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자고 되뇐다.
이 책의 인터뷰이는 모두 29명. 그중 최고령자인 서맹순(1918년생) 할머니는 어린 노동자로 새벽 5시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안순자(1940년생), 박정란(가명, 1934년생) 할머니는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를 당했고, 박남주(1932년생), 김남출(1929년생), 하해수(1924년생)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었다. 전쟁 통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송신도(1922년생)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잇달아 다섯이나 아이를 뱄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다 싶어 기차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 박수련(1925년생) 할머니는 재일 코리언에게 특히 발병 비율이 높았던 한센병에 걸려 고생했다. 박정숙(가명. 1919년생) 할머니는 시집간 첫날부터 매를 맞았고, 남편이 유곽에서 만든 아이까지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았다. 세 살 때 일본에 간 김분란(1927년생) 할머니는 혼자 아이를 낳고 직접 실로 양쪽을 묶어 탯줄을 잘랐다. 모두 극도의 빈곤을 겪었으며 민족 차별과 가부장제와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대개 성인이 되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어린 노동자로 극히 낮은 임금을 받고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할머니들의 수는 적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꽤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唄)―재일 여성의 전중·전후’라는 제목으로 2012년부터 1년 여간 총 12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들을 직접 찾아가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려 애쓴 저자는 한국인도 재일 코리언도 아닌, 일본 여성 가와타 후미코이다.
1987년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
배봉기 할머니와의 만남으로 시작된 기록
가와타 후미코는 보육과 주택 문제, 농어촌 여성과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의 인생을 기록하고 취재하는 일본의 언론인으로서, 특히 빈곤과 성노예제 문제에 천착해왔다.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배봉기 할머니를 10년 넘게 만나 소통하며 그 이야기들을 꼼꼼히 기록하기도 했다. (그 기록의 결과물은 1987년 《빨간 기와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며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일찌감치 노인들의 인생담을 경청하면서 깨달음을 경험했다는 저자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야말로 오히려 죽지 않은 생생한 언어를 쓴다고 말한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려 애쓴 흔적은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또 다른 미덕은 저자의 이런 태도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한 사람의 이야기마다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담을 수 있을 만큼 이 책에 실린 29인의 할머니들은 아주 솔직하고 상세히 인생담을 털어놓고 있는데, 이것은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감응하지 않으면 쉽게 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들을 만큼 같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연대감과 우정이 인터뷰에 응한 할머니들의 마음을 여는 온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조선어 표현을 포함해 재일 할머니들이 쓰는 입말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려 했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시점을 되짚어 정확한 사건 자료들을 찾아냄으로써 개인사의 기억이라는 씨줄과 역사상 사건이라는 날줄을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어낸다. 그렇게 생생함과 객관성을 동시에 담보한다.
제일 1세대는 식민지 지배로 인한 나라 없는 설움과 전쟁으로 인한 참혹상을 동시에 겪은 세대다. 말도 통하지 않은 곳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여성 노동자로 살았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으면, 오죽하면 고생도 가난도 자랑을 한다고 할까. 언뜻 들으면 처연하기만 한 이 표현을 다시 되새겨보면, 그 무엇도 날 어쩌지 못한다는 삶의 의지와 강인함이 배어 있다.
저자는 이 표현에 대해 말 그대로 자랑스럽다는 뜻인지, 지나온 척박한 현실을 하소연해봐야 소용없음을 자조하는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딘지 그 고생과 가난을 훌훌 털어버리는 듯한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속이 시원하다고 말한다. 잘 견뎌왔다며 스스로도 놀랄 정도인 극한 상황을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재일 할머니들은 꿋꿋하게 삶을 이어왔으니, ‘고생 자랑’ ‘가난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알 것 같다고 말이다.
동시에 저자는 이 표현을 일본의 정치와 뒤틀린 일본 사회를 일본인보다 혹독하게 감내하면서 살아온 재일 할머니들의 자랑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런 할머니들에게서 씩씩함과 당당함을 읽을 수 있다.
재일 여성의 개인사를 통해 드러나는
전쟁과 질병, 그리고 삶에 대한 진실
일본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살면서 온갖 차별을 받은 재일 코리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일본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 그리고 노동 시간을 규제하는 법은 있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공장법이 그렇고, 임시노동이나 중노동의 기회만 얻을 수 있었던 조선인은 그나마도 동일 노동을 하고도 일본인보다 60~70퍼센트 정도의 임금을 받았다.
조선옷을 입으면 경찰들이 “기모노 입어!”라면서 먹물을 넣은 물총을 쏘아댔고, 학교에 가도 조선어를 쓸 수 없었다. 조선어를 말한 학생에게는 자기가 지니고 있던 표를 건네주었다.
“마지막에 ‘아무개가 가장 많았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말을 안 하게 되는 거야. 일본어로 말하라고 해도 모르지, 다들 긴장이 되니까 아예 서로 이야기를 안 해요. 그래도 선생님에게 불만을 얘기할 수는 없었어.” ― 115쪽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이 여성에게 범했던 중대한 인권유린인데도 반세기 가까이 방치되어 있었다. 피해 당사자에게 침묵이 강요되었다. 송신도 할머니의 옆구리에는 칼자국이 10센티 크기로 나 있고, 허벅지 안쪽에는 총검에 찔린 상처와 총탄이 스친 흉터가 있다. 오른쪽 귀는 난청이다.
“군인이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겠다면서 말이야. 조선말을 쓰면 귀싸대기를 때려. 엄청났어. 저 솥뚜껑 같은 손으로 후려쳤지. 귀 고막이 터져버렸어.” ―239쪽에서
재난은 사람을 골라 오지 않는다. 히로시마 원폭이 터졌을 때 일본인도 조선인도 똑같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재난 피해를 똑같이 겪었어도 그 이후의 양상은 다르다. 당시 재일 코리언은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고 치료를 받지 못했다. 피폭 이후 ABCC(원폭피해조사위원회)에서 혈액 검사, 심전도 같은 검사를 몇 가지 받기는 했지만, 결과는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연구 조사의 대상만 되었을 뿐 치료는 방치되다시피 한 것이다.
재일 코리언들은 또한 감염과 발병이 위생과 영향 상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한센병 발병률이 높다. 이는 건강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비율이 낮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할머니 한 명 한 명의 노래
잘 쓰인 역사보다 더 깊은 울림
어릴 적 뜻도 모르고 외워야 했던 〈황국신민의 서사〉를 수십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기억하는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히로시마 피폭을 묘사하는 부분을 보면, 할머니들의 기억력은 신기하리만큼 비상하다. 60년도 더 된 오래된 일들의 순간순간을 그렇게 자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살아남아야 했던 처절함이 그만큼 또렷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마음으로 몸으로 새긴 하나하나의 기억은 동아시아 역사가 영원히 껴안고 짊어져야 할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피폭 직후 아무런 증상도 없었던 사람이 가을이 되자 원인도 모르게 잇달아 죽어갔다. 돌연 잇몸에서 피가 나오거나, 코피를 쏟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남주 씨는 설사가 끊이지 않았다. 의식불명에 빠지기도 했다. 가족은 포기했다. 하지만 와카야마의 친척들이 문병을 오면서 가지고 온 말린 양귀비 잎을 달여 마시자 설사는 멈췄다. 양귀비가 한동안 후쿠시마초 이곳저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 후 양귀비를 따러 갔다가 두세 그루를 뽑고 더 이상 심지 않았다. ―111쪽에서
역사란 생활을 부여잡고 살아내는 이들의 흔적이다. 어린 나이부터 노동 착취와 차별 속을 헤쳐 간, 척박한 삶에 내던져졌던 재일 할머니들이 살아온 생생한 역사 현장을 재일 1세 할머니들의 기억과 함께 만날 수 있다. 그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고 대면해야만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들은 “지금도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전쟁만 없으면 된다”라고 말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시집간 첫날부터 폭행을 당하고, 남편은 도박과 여자에 빠져 혼자 탯줄을 끊어가며 아이를 낳고, 돈 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출산 직후부터 일거리를 찾아나서며 장사를 하고, 이산의 아픔을 겪고, 그것도 모자라 재해를 당하고…. 재일 할머니들이 겪어온 세월은 그야말로 다중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하지만 아픈 인생살이를 토로하는 중에도 할머니들이 드러내는 표현과 생각에는 유연성과 서정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무겁고 우울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때론 익살스럽게 다가오고, 때론 강인한 기운이 전해지기도 한다. 재일 1세 할머니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노래해 본다. “아, 힘내고, 아, 힘내고, 힘내!”
지은이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배봉기 할머니의 삶을 취재한 《빨간 기와집》을 1987년 출간하며, ‘재일 여성들’의 삶과 강인한 태도, 그리고 진실을 세상에 알린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1943년 일본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 가와타 후미코는 1966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중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바로 어제의 여자들》(1979) 《여자들의 자장가》(1982) 등 여성들의 삶을 기록하고, 1977년 배봉기 할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위안부와 관련한 책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황군 위안소의 여자들》(1993) 《전쟁과 성》(1995) 《인도네시아의 위안부》(1997) 《위안부라고 불리는 전장의 소녀》(2005) 등 모두 후미코가 직접 현장을 찾고 증언자들과 인연을 맺어 기록한 책이다.
후미코는 위안부 피해 사실 증언자를 취재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전후 보상 실현 시민 기금’과 ‘일본의 전쟁 책임 자료 센터’ 공동대표, ‘재일 위안부 재판을 지지하는 모임’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며, 2023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는 일에 앞장섰다.
옮긴이 안해룡
사진가이며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전시기획자 등 텍스트와 사진, 영상을 넘나들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 1995년부터 한국, 중국, 일본 등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사진과 영상에 담는 기록 작업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다이빙벨〉을 감독했다. 현재는 조선인 노동자가 종사한 일본의 근대 토목 유산 찾아서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인 노동자 위령비를 찾아서 1》, 《북녘 일상의 풍경들》, 역서로는 《가부키초》, 《공습》, 《미디어 리터러시》 등이 있다.
옮긴이 김해경
서울에서 태어나 1999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프리저널리스트 집단 아시아프레스에 소속된 저널리스트로, 다큐멘터리 〈조국을 바라보며-러시아 연해주 고려인 소녀의 여름〉 등을 발표했으며 〈한국 저널리스트가 본 북한〉, 〈동북아시아 교류를 어떻게 넓힐까〉로 일본 방송에 출연해 한반도 문제를 주제로 발표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시사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의 ‘반도를 읽는다’ 코너에 한반도 관련 기사를 기고했다. 역서로는 《공습》, 《첫 제과 레시피》 등이 있다.
책 속으로
13쪽
나는야 에헤- 진 재판 괜찮아 좋아 그렇지만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으니
여기 모인 분들 잘 들어요 두 번 다시 전쟁은 하지 말아주세요
도시코(송 씨의 일본 이름)는 지금도, 100년 살아도, 내일 죽어도
할 때는 한다. 돈이 없어도, 입을 것이 없어도, 장식품이 없어도
해내겠어. 이 정치가 거지들. 아, 힘내고, 아, 힘내고, 힘내
― 서문에서(송신도 할머니가 부른 노래)
24쪽
급여는 나오지 않았고, 간단한 옷만 제공되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빈곤 가정의 식구를 덜어주는 셈이라서 어린아이의 노동 대가는 침식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름 간편복 말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맹순 씨는 집에서 나올 때 입고 있었던 조선옷이 헤지면 몇 번이나 기우고 기우면서 입고 다녔다.
―서맹순 할머니
68쪽
부근에 큰 파친코 가게가 개업해 파친코 일을 그만두었다. 반년 뒤 도례 씨는 야키니쿠야(焼肉屋)를 시작했다. 남편은 “그런 장사를 하려면 죽어버려”라며 반대했다. 야키니쿠야는 ‘여자를 죽인다’고들 했다. 철판 세척, 김치 담기, 양념 만들기 등 중노동이었기 때문이다.
―김도례 할머니
82쪽
“이제, 불이 타기 시작하면서 하늘이 새빨갛고. 소이탄이라 빨라요. 비행기가 낮은 곳을 날면서 사람이 걷고 있는 곳에 우수수, 삐삐삐삐삐. 위에서 오니까 다 타버려. 뜨거워서 있을 수 없어요. 방공 두건이 타면서 머리카락이 타니까 다들 벗어던져. 옷을 하나 벗고, 두 개 벗고, 다 벗어버려.”
― 박봉례 할머니
110~112쪽
“최악이 되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어떻게든 살려는 생각이 들지. 사람도 죽기를 원치 않아요. 원폭으로 죽은 사람은 너무 비참했으니까.” (…) 쌀 암거래, 막걸리 제조, 불난 곳에서 철재 수집, 돼지 사육 등 대다수 재일 여성들이 경험한 일을 남주 씨도 해야 했다. 가장 오래 한 일이 양돈업이었다. 보통면허를 취득해 2톤 차를 몰았다. “어, 여자가 트럭 운전을 다 하네”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자가 운전하는 일은 드문 시절이었다. 남편과 함께 500마리의 돼지를 사육했다.
― 박남주 할머니
160쪽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은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여선 씨는 ‘해방’을 실감하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은 ‘아아, 전쟁이 끝나서 다행이다’라는 심정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은 정말 좌불안석이었어요. 술렁술렁, 술렁술렁. 안절부절을 못 했어요.”
― 양여선 할머니
203~204쪽
일본 전국 13곳에 있는 국립 한센병 요양소의 입소자는 2011년 2276명. 이 가운데 재일 코리언은 102명으로 전체 입소자의 4.48%에 해당한다. 일본 총 인구에서 차지하는 한국·조선 국적의 외국인 등록자 0.43%의 10배에 달하는 비율이다. 한센병의 감염이나 발병에는 영양과 위생 상태가 영향을 준다. 극도의 빈곤은 영양이나 위생 상태 악화의 요인이 된다.
275쪽
“뉴스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말이 아파요. 과거 일본이 조선인을 괴롭힌 적 있잖아요?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나 죽은 조선인이 아주 많지요? 납치 문제도 핵 문제도 있지만 서로 양보하고 대화하면서 평화조약을 맺으면 아시아도 일본도 미국도 평화스러워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좋으련만.”
― 배창희 할머니
목차
서문│알아야 할 역사에 내딛는 첫걸음 9
1 빨리 태어나서 손해를 봤어 17
길쌈을 배우려던 무렵 일본 공장으로•말도 모르면서 아이를 돌보고, 용케 해냈어•공장의 어린 노동자, 가혹한 환경•‘가난해서’와 ‘여자라서’•배우고 싶다, 그때도 지금도
2 둥둥 떠가는 솥, ‘주워서 살았어’ 41
열일곱에 결혼해서 시동생들을 키웠어•가족 넷이 세상을 떠나다•장사는 말이지, 맛있으면 먹으러 오는 거야•자식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들•“두 손 든 거잖아”•막걸리를 만들면 경찰이 잡아갔어•술 마시던 시어머니, 마시지 않던 남편
3 대충 묻었어, 죽으면 죽은 채로 71
한 번이라도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고 잠들어보고 싶었어•대충 묻었어, 죽으면 죽은 채로•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흰 저고리에 행선지를 먹물로 써서•‘헌병 같은 일’을 하던 집에 얹혀살다•셋이 손잡고 도망가는데 왠지 한쪽 손이 무거워•알몸으로 어깨를 껴안고 몸을 따뜻하게•강에서 건진 검은 익사체가 둑 여기저기에
4 히로시마 거리가 통째로 사라졌어 101
“엄마, 피 나와” “너도”•피폭과 동시에 맞은 아버지의 ‘해방’•원폭 후유증이 어떤 건지는 몰라•의사도 모른다니 말이 돼?•60년도 더 지나 나타난 원폭 피해
5 겪을 대로 겪었지, 고생은 나의 힘 131
교실의 ‘오줌싸개 할멈’•남편은 도박에 찌들고, 혼자서 출산을•궁지에 빠진 남편의 거짓말•날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70인분의 밥을 짓다•중고 삼륜차로 폐품을 모으며
6 밀항선을 탔다가 인생길이 틀어졌다 157
술렁술렁 안절부절, 재봉틀을 싣고 제주도로•내 몸으로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도항 증명서와 전후 법적 위치•학교 다니고 싶어서 일 본으로•죽으면 갈 테니 지금은 괜찮아
7 아저씨, 빨간 종이로 된 약 주세요 181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현미를 찧다가 친구가 부른 노래•빨간 종이로 된 약 주세요•그렇게 정직했던 남편이 거짓말을•한센병 비율이 높은 재일 코리언
8 여기는 40번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출발점은 여기야 205
탯줄도, 추억의 사진도 없다•40번지 소사•함께 싸워 쟁취한 집•무서워서 혼자 여기서 살겠냐?•인생에서 가장 공부가 되었다•사람과 사람, 40번지 시대의 커뮤니티
9 전쟁도 쓰나미도 삶을 빼앗지는 못해 229
우리 마리코는 흙까지 먹었다니까•‘위안부 110번’에 전해진 정보•칼을 차고 위안소로 온 군인•몸속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겨울이 싫어•재판에 져도 나는 녹슬지 않아
10 피붙이가 헤어지면 안 돼, 절대로! 253
이렇게 길어질지는 생각도 못 했어요•새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일본으로•아궁이 앞에서 눈물만 찔찔•결국은 유랑민, 뿌리 없는 풀•의사가 되었지만 병사한 장남•뉴스를 들을 때마다 가슴 아파
11 우리 학교는 정말 창유리가 없었어 277
교실에서 쫓겨난 아이들•사진 속 또 한 명의 소녀•겨울이면 뭔가를 뒤집어쓰고•조선 이름을 불러줘요•홍일점으로 시작된 교사 생활
12 후쿠시마, 원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305
원전 사고 후 우울해진 손자•아버지는 조선인, 어머니는 일본인•지진 당시 나미에마치에 한국・조선인은 12명•대피소가 된 조선 학교에서 아들이 있는 곳으로•점점 가난해져, 푸하하•한국 할머니에게 집 빌려주는 사람은 없어요
맺는말 | 식은땀을 흘려가며 들은 이야기들 329
옮긴이의 글 | 일본 여성이 직접 마주한 재일 여성의 삶과 기록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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